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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9-24 01:33:17

프로이센의 마리 공주

마리 왕비(바이에른)에서 넘어옴
<colbgcolor=#A3D0D7><colcolor=#000000> 바이에른 왕국 막시밀리안 2세의 왕비
프로이센의 마리 공주
Prinzessin Marie von Preußen
파일:Hanfstaengl,_Franz_-_Königin_Marie_von_Bayern_(1825-1889)_(Zeno_Fotografie).jpg
이름 프리데리케 프란치스카 아우구스테 마리 헤트비히
(Friederike Franziska Auguste Marie Hedwig)
출생 1825년 10월 15일
프로이센 왕국 베를린 베를린 성
사망 1889년 5월 17일 (향년 63세)
바이에른 왕국 호엔슈방가우 성
배우자 막시밀리안 2세 (1842년 결혼 / 1864년 사망)
자녀 루트비히 2세, 오토
아버지 프로이센의 빌헬름 왕자[1]
어머니 헤센홈부르크의 마리아 아나
형제 아달베르트, 엘리자베트[2], 발데마어
종교 프로이센 교회 연합[3]가톨릭
파일:Stieler_-_Marie,_Kronprinzessin_von_Bayern_(Schönheitengalerie).jpg
초상화

1. 개요2. 생애
2.1. 어린 시절2.2. 왕비2.3. 왕태후
3. 가족관계
3.1. 조상3.2. 자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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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바이에른 왕국막시밀리안 2세의 왕비. 프로이센 왕국 빌헬름 왕자와 헤센홈부르크의 마리아 아나 공녀의 4녀로, 프리드리히 빌헬름 2세의 손녀다.

2. 생애

2.1. 어린 시절

1825년 10월 15일 베를린에서 프로이센의 빌헬름 왕자의 7번째 아이로 태어났다. 활동적이고 아름다운 소녀로 자란 마리는 하이킹이 취미였다.

작센코부르크고타 공국에른스트 2세와의 혼담이 제기되었지만 무산되었다. 1841년 12월, 바이에른 왕국의 막시밀리안 2세와의 결혼이 결정되었다.

2.2. 왕비

파일:Marie,_Queen_of_Bavaria.jpg
바이에른의 왕비 마리, 요제프 카를 스틸러 作, 1843년
1842년 10월 12일에 마차를 타고 바이에른 뮌헨에 도착한 마리는 마차에서 내리자마자 약혼자인 막시밀리안의 품 안으로 뛰어들었다. 두 사람은 알러하일리겐 궁정 교회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마리는 활발하고 사교적인 성격이었지만 막시밀리안 2세는 학구적이고 차분했다. 정반대의 성격과 취향을 가지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두 사람은 금슬 좋은 부부가 되었다. 결혼하고 넉달만에 임신했지만 얼마 안 가 유산했다. 2년 뒤인 1845년 8월 25일에 첫 아들 루트비히 2세를 낳았다. 그리고 3년 후인 1848년 4월 27일, 둘째 오토조산했다.

친절하고 밝은 성격의 마리는 대중들에게 인기있는 왕비였다. 마리는 자선 활동을 활발히 하면서 성실하게 공무를 수행했다.

2.3. 왕태후

파일:Albert,_Joseph_-_König_Maximilian_II._mit_Familie_(Zeno_Fotografie).jpg
막시밀리안 2세 일가, 1860년
1864년 3월 10일에 막시밀리안 2세가 급사하고 장남 루트비히 2세가 즉위했다. 남편의 죽음 이후 마리는 대중 앞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주로 님펜부르크 궁전과 호엔슈방가우 성에서 은거했다.

1869년 12월 18일에 바이에른 여성 협회 활동을 통해 부상당한 군인들을 지원했다. 이러한 활동은 바이에른 적십자 설립으로 이어졌다.

루트비히 2세가 결혼하지 않았기에 마리는 바이에른 왕실에서 가장 신분이 높은 여성이었다. 그러나 루트비히 2세는 자신과 성격이 정반대인 어머니를 좋아하지 않았다. 루트비히 2세는 점점 어머니와 마주하는 걸 피하고 마리를 '자신의 전임자의 아내'라고 부르는 등 그녀를 멀리했다.[4]

말년에 루트비히 2세는 의사들로부터 정신적으로 문제가 있다는 진단을 받았다. 동생 오토는 형보다 훨씬 전부터 심각한 조현병을 앓았고, 마리는 점점 증세가 심해지는 오토를 돌보았다. 1886년 6월 10일에 루트비히 2세가 정신질환을 이유로 폐위당하고 얼마 안 가 의문스러운 죽음을 맞았다.[5] 이러한 불행에 마리는 사람들의 동정을 받으며 우울해했다. 그러나 곧바로 이 모든 게 신의 뜻이라고 여기며 가족의 비극을 잘 받아들였다고 한다.

1889년 호엔슈방가우 성에서 사망했다. 마리의 유해는 뮌헨 테아티너 교회에 남편의 묘 맞은편에 안장되었다.

3. 가족관계

3.1. 조상

본인 부모 조부모 증조부모
프로이센의 마리
(Princess Marie of Prussia)
<colbgcolor=#fff3e4,#331c00> 프로이센의 빌헬름 왕자
(Prince Wilhelm of Prussia)
<colbgcolor=#ffffe4,#323300> 프리드리히 빌헬름 2세
(Friedrich Wilhelm II)
프로이센의 아우구스트 빌헬름 왕자
(Prince August Wilhelm of Prussia)
브라운슈바이크볼펜뷔텔의 루이제 여공작
(Duchess Luise of Brunswick-Wolfenbüttel)
헤센다름슈타트의 프리데리케 루이제
(Princess Frederika Louisa of Hesse-Darmstadt)
헤센다름슈타트 방백 루트비히 9세
(Louis IX, Landgrave of Hesse-Darmstadt)
팔츠츠바이브뤼켄의 카롤리네 여백작
(Countess Palatine Caroline of Zweibrücken)
헤센홈부르크의 마리아 아나
(Princess Maria Anna of Hesse-Homburg)
헤센홈부르크 방백 프리드리히 5세
(Frederick V, Landgrave of Hesse-Homburg)
헤센홈부르크 방백 프리드리히 4세
(Frederick IV, Landgrave of Hesse-Homburg)
졸름스브라운펠스의 울리케 루이즈
(Princess Ulrike Louise of Solms-Braunfels)
헤센다름슈타트의 카롤리네
(Princess Caroline of Hesse-Darmstadt)
헤센다름슈타트 방백 루트비히 9세
(Louis IX, Landgrave of Hesse-Darmstadt)
팔츠츠바이브뤽켄의 카롤리네 여백작
(Countess Palatine Caroline of Zweibrücken)

3.2. 자녀

자녀 이름 출생 사망
1남 루트비히 2세
(Ludwig II)
1845년 8월 25일 1886년 6월 13일
2남 오토
(Otto I)
1848년 4월 7일 1916년 10월 11일


[1] 프리드리히 빌헬름 2세의 막내아들이다.[2] 루트비히 4세의 어머니[3] 프리드리히 빌헬름 3세의 법령에 따라 루터파칼뱅파가 혼합된 종교로, 루터파에 가까운 개신교의 일종이다.[4] 다만 루트비히 2세가 폐위되기 직전 마지막으로 두 사람이 만났을 때 재정적인 문제를 알게 된 마리가 자신의 보석들을 팔겠다고 제안하자 매우 감동받았다고 한다.[5] 오토가 뒤를 이었지만 통치 능력이 없다고 판단되어 1913년 11월 5일에 폐위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