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악의 시기였다. 미국에서는 마이클 잭슨 좋아한다고 하면 놀림감이 될 정도로 조롱당했다고 한다. 물론 한국에서도 첫 내한이 있었던 1996년 당시 공중파 3사에서는 연일 아동 성추행 혐의를 언급하며 그의 이미지가 굉장히 안 좋을 때였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언론에서는 마이클 잭슨이 재기할 수 있을까?라며 의문과 호기심을 드러냈다.
히스토리 앨범 커버
새 앨범 작업은 1994년 1월 중순부터 시작됐었다. 스티브 포카로는 이번에도 같이 작업을 했는데 프로젝트는 굉장히 거대하고 값 비싸다고 했다. 나에게 스튜디오와 보조 엔지니어를 주고 방에서 일하는 데 하루에 2,500달러를 지불받았으며 매일 최고급의 음식들을 먹을 수 있었다는 것이었다. 마이클의 팀원들이 스튜디오에서 작업을 시작하고 마이클은 3월에 합류했었고 Dangerous 앨범 제작 도중 만든 'They Don't Care About Us'를 완성하기를 원했으며 'Stranger in Moscow’ 작업을 시작했다. 늦은 봄 그리고 여름 동안 마이클은 더 많은 곡을 작업했다. ‘Money’,‘1993년 10월 데뷔 힙합 앨범을 발표한 샤킬 오닐의 랩이 삽입된 '2 Bad’, ‘D.S' 그리고 ‘Morphine’ 모르핀은 마이클의 처방약 데메롤의 문제와 관련한 것인데 록 밴드 Nine Inch Nails의 앨범 Downward Spiral에서 영향을 받은 곡이라고 한다. 또한 10년 전 작업한 ‘Little Susie’를 꺼내기로 결정한다. 마이클과 Foster는 피아노에 앉아 좋아하는 옛날 노래에 대해 이야기 했는 데 마음에 드는 것 중 하나가 찰리 채플린의 'Smile'이라고 언급했다. 제임스 브라운, 세메 데이비스 주니어, 재키 윌슨 처럼 채플린은 마이클에게 항상 영향을 끼쳤다. 영화 Modern Times에서 나온 채플린이 만든 스마일은 이때만 해도 기악 곡으로 18년후 John Turner와 Geoffrey Parsons가 가사와 제목을 추가할 때 온건히 'Smile'이 됐었다. 마이클은 Foster와 오케스트라 트랙인 ‘Childhood’를 작업하기를 바랐고 이것은 자신의 인생이 경험한 유년 시절에 대한 느낌을 반영한 것으로 네버랜드의 'Giving Tree'에서 작곡했다고 한다. 마이클은 이 노래의 가치가 중요하다며 "당신이 정말로 나에 대해 알고 싶다면 내가 쓴 노래 중 가장 정직한 'Childhood'가 있다며, 사람들은 그것을 경청해야 한다."고 말했다고 Smile과 Childhood 는 모두 오케스트라와 함께 녹음했다. 'Earth Song'은 1988년 6월 비엔나에서의 Bad 투어 중 호텔 방에서 갑작스레 떠오른 아이디어로 1990년 8월 Bill Bottrell과 작업을 완료했지만 마이클은 만족하지 못했고 2번 째 파트에 기타 리프를 넣는 등 다시 작업했다. 마이클은 "나는 지구상의 많은 고통을 느끼고 있다며 이 노래로 하여금 사람들에게 지구의 목소리를 들려주고 싶다"며 창작 동기를 설명했다. 앨범의 원래 출시 목표일은 1994년 6월이었는데 이번에도 놓쳤다. 원래 앨범에는 히트곡 모음집과 5개의 새로운 곡만 포함 시키기로 했는 데 새로운 곡 수는 계속 증가했다.
마이클이 같이 일하기를 바랐던 Jimmy Jam과 Terry Lewis[1]는 이번에는 자넷[2] 에게 동의를 받고 마이클과 같이 작업하며 약 5개의 곡을 만들었는 데 트랙이 자넷 바이브를 가져야 한다고 느꼈다. 그 중 한곡은 자넷의 마음에 쏙 들었는데 마이클은 그 트랙이 아닌 강렬하고 하드한 다른 트랙을 선택했다. 참고로 자넷이 원했던 트랙은 1년후 녹음됐고 Design of a Decade 앨범에 수록된 'Runaway'다. 'Tabloid Junkie'는 Jam과 Lewis가 가져온 트랙 중 하나의 개념에서 따온 것으로 마이클이 좋아하는 자넷 잭슨의 The Knowledge’에서 강한 영향을 받은 곡이다. 마이클은 Jam에게 'HIStory'라는 제목의 곡을 써야 한다며 anthemic song을 원한다고 했다. 노래는 거대한 프로덕션이 됐다. Boyz II Men이 백킹 보컬로 오케스트라,합창단이 동원됐고 역사적인 뉴스 사건과 연설을 녹음한 수많은 테이프도 사용했는 데 160개의 트랙이 하나의 레코드로 믹싱되어야 한 것이다. 그리고 마이클은 정말로 앨범 제작에 드는 시간을 신경 쓰지 않았기에 그 점에서 문제가 있었고 Jam은 마이클이 빠르고 정확한 결정을 내릴 수 있도록 하는 주변의 제작자가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마이클은 'Bad' 때부터 그 누구도 듣지 못한 소리를 원했으며 그것을 만들기 위해 Bruce Swedien에게 오리지날 신디사이저 사운드를 만들 수있는 사람을 물었고 Chuck Wild를 제안했다. 마이클은 척에게 인간의 귀가 들어 본 적이없는 소리를 만들고 싶다며 격렬하고 독특하기를 바란다고 요청했고 제작한 것을 팀 멤버에게 배포하여 일부 트랙에 사용했다고 한다.
그 뒤 알 켈리도 합류했다. 마이클 팀은 'Life'와 'You Are Not Alone'의 데모 테이프를 받았는데 라이프는 마이클이 마음에 들어했지만 최종적으로 선택된 것은 유얼낫알론으로 Life는 R&B 밴드 K-Ci & Jojo가 녹음했다. 'You Are Not Alone'은 좋았지만 더 많은 작업이 필요했고 마이클은 트랙을 다시 제작, 마지막 부분에 합창단을 추가, 마이클은 이것을 통해 '클라이막스와 구조적 감각'을 얻었다고 말했다. 이 앨범에 마지막으로 들어간 곡은 비틀즈의 히트곡 'Come Together'였다. 마이클 잭슨이 가장 좋아하는 비틀즈의 노래 중 하나로 1986년 Bad 앨범 제작 때 Bill Bottrell과 대략적으로 완성한 것으로 9년 후 새 앨범에 수록하기로 결정했다.
마이클은 앨범 제작 과정에 적극적으로 대다수에 참여했으며 앨범의 주제는 마이클 잭슨의 인생에 대한 것으로 최근 사건에 대한 자신의 심리를 투영하고 있다. 이것은 곧 1993년 아동 성추행 혐의가 제기되지 않았다면 완전히 다른 앨범이었을 수도 있었다는 것이다. Jam은 예술가의 개인적 감정이 음악에 반영되면 다른 에너지를 제공한다고 말하며 그 앨범은 자신의 생각을 노래하는 매우 적극적이고 개인적인 그 부분 때문에 나에게 있어서는 가장 훌륭한 마이클의 앨범이라고 평가했다.
하지만 앨범은 작품성의 부족으로 혹평을 받았는 데, 실제로 출시 전 앨범이 완성된 후 마이클은 음반사 임원 등을 초대했고 약 30명의 사람들 앞에서 앨범이 첫 공개됐다. 마지막 음이 울린 후 초대받은 사람들은 한 마디도 없이 박수도 없이 반응도 없이 스튜디오를 떠났다. 당연히 마이클은 충격을 먹었고 .. 히스토리 앨범의 문제점은 좋은 곡과 아닌 곡의 수준 차이가 굉장히 심해 앨범의 응집성이 현저하게 떨어졌었다. 또한 재생 시간이 길었으며 'Little Susie'와 'Smile'을 엔딩곡으로 배치한 것은 너무 엉성하다는 의견도 있으며 AllMusic은 70년대 중반 이후 마이클 잭슨의 가장 약한 앨범이라고 지적했다. 구설수에 휘말리기도 했는데 수록곡 'They Don't Care About Us'의 가사 중 'Jew'는 유대인을 비하하는 용어였고, 'HIStory' 앨범 홍보를 위한 티저 동영상은 팝 스타의 뻔뻔스러운 자기 우상화라는 비판이었다. 이에 대해 마이클은 'Jew라는 용어는 사회 문제를 고발하기 위해 선택한 용어이지 결코 인종차별을 위한 것이 아니었다며 사과했고 가사를 수정하여 재발매했다. 홍보 동영상은 마케팅을 목적으로 고의적으로 노린 것이라고 말했다.
앨범은 최종적으로 2000만장 이상이 판매된 것으로 추정된다, 미국에서는 더블 앨범의 경우 실제 판매량에다 X2배를 하는 인증량을 취하기 때문에 7X 플래티넘을 인증받았지만 실 판매량은 350만장 정도다. 앨범의 완성도도 문제였지만 사건의 여파가 상업성에 영향을 끼쳤음은 분명해 보인다. 그러나 빌보드 앨범 차트에서는 2주간 1위를 차지했었고, 첫번 째 공개된 싱글 'Scream'은 빌보드 싱글 차트에서 5위를 'You Are Not Alone'은 발매 첫 주에 1위라는 최초의 '핫 샷' 기록을 세우며 마이클의 상업적 매력이 아직은 나쁘지 않았음을 보여줬다. 소니는 이 앨범 홍보를 위해 3,000만 달러를 썼는 데 토미 모톨라가 회고하길 그럼에도 매출이 괜찮았다고 하는 걸 보면 꽤 많은 돈을 만졌나보다.
그리고 이해 12월 HBO와 계약을 하고 소규모 콘서트를 열려고 했던 마이클은 무대에서 연습 도중 공황발작으로 쓰러져 병원에 실려갔다. 그동안 누적됐던 스트레스와 피로가 한번에 터진 듯, 당연히 콘서트 계약은 파기됐다. 그리고 리사 마리와는 그동안 쌓였던 갈등이 터져 결국 결혼 생활의 종지부를 찍으며 이 역시 마이클 이미지를 손상시켰다.
1996년부터 'HIStory Tour'가 진행됐고 82회 공연 450만 명의 관중 동원으로 관중 수로만 보면 마이클의 커리어 내에서 가장 성공적인 투어였다. 그러나 투어의 립싱크에 대해서는 많은 비판을 받고 있다. 다음 해 1월 진행된 하와이에서 있던 2번 공연은 모두 매진됐는데 이는 마이클만이 이룬 기록으로 이전까지는 하와이에서 매진을 기록한 메이저 가수가 없다고 한다. 롤링 스톤즈도 엘튼 존도 못 했던 기록, 대중들은 여전히 마이클을 조롱감으로 생각하면서도 최고의 팝 슈퍼스타의 공연에는 관심이 있던 것이다. 그리고 투어 도중 호주에서 '데비 로우'와 결혼을 했는 데 데비는 마이클이 진료받은 피부과의 간호사로 마이클의 팬이었다. 그리고 마이클에게 아이를 낳아주겠다고 하며 결혼을 하게 된다. 즉, 마이클은 데비와 사랑해서 결혼한 게 아니었다.
1997년 2월에는 그의 첫번 째 자녀이자 아들인 '프린스 잭슨'이 태어났고 마이클은 자녀들도 태어나고 서서히 사건의 여파에서 벗어나고 있었다. 그후 히스토리 투어의 전반기가 끝나고 세계적으로 500만장 정도 팔린 리믹스 앨범 Blood on the Dance Floor: HIStory in the Mix를 발매한 다음 후반기 투어를 시작했다. 이 앨범에서는 5개의 신곡과 HIStory 앨범의 수록곡을 리믹스한 8곡을 포함시켰다. 싱글로 발매된 곡은 'Blood on the dance floor', 'Ghosts', 'Is It scary'(잼과 루이스가 만든 곡으로 히스토리에 수록되지 않았다.)인데 Blood On The Dance Floor는 영국, 에스파냐, 뉴질랜드, 덴마크에서 1위를 했다. 자세한 제작 비화를 알고 싶으면 여기를 참조할 것 Blood On The Dance Floor 이야기
1998년에는 '패리스 잭슨'도 출생, 그리고 마이클의 자녀들이 전형적인 흑인의 피부가 아닌 하얀 피부를 가지고 있다는 점에서 친부 논란이 시작됐으며 언론에서는 자녀 사진을 찍기 위해 병원에 헬리콥터까지 동원했다고 한다.
이 시기에도 타블로이드 언론에서는 연일 마이클 잭슨의 사생활에 지나치게 집착하고 보도했고 당연히 마이클은 엄청난 스트레스와 심한 불면증을 앓아 Dangerous 투어 시절부터 복용하기 시작한 진통제에 중독돼 가며 몸이 망가져 갔는 데 잭슨의 사후, 진통제 중독 문제로 잭슨의 주치의들에 대한 비판이 있자 주치의는 매일 마다 잠을 못 잔다며 울고 도와달라는 잭슨을 어떻게 외면할 수 있겠어요? 라고 말했다.
[1] 당시 최고 인기를 누리던 동생 자넷 잭슨의 프로듀서이다. 86년부터 06년까지 자넷 앨범 프로듀싱을 하며 이른바 자넷의 시대를 여는데 크게 이바지했다.[2] 당시 자넷은 반대로 최고 전성기를 누리고 있었다. 오죽하면 마돈나와 함께 Queen of Pop이라 불리며 투톱을 유지했을정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