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 | 마티아스 카부레크 (Matthias Kaburek) |
생년월일 | 1911년 2월 9일 |
사망년월일 | 1976년 2월 17일 |
국적 | 오스트리아 |
출신지 | 빈 |
포지션 | 센터 포워드 |
신체조건 | 불명 |
등번호 | -[1] |
소속팀 | 비엔나 CFC (1928) SK 라피트 빈 (1928-1936) FC 메스 (1936-1937) USB 롱위 (1937-1938) SK 라피트 빈 (1939-1944) |
감독 | ASK 홀라브룬 (1946) FC 브르노 (1947) |
국가대표 | 4경기 2골 (1934-1935 / 오스트리아) 1경기 0골 (1939 / 독일) |
1. 생애[2]
1.1. 선수 생활
1.1.1. 클럽
카부레크의 첫 소속팀은 비엔나 크리켓 풋볼 클럽이었지만 1928년 오스트리아의 명문 팀 중 하나인 SK 라피트 빈에서 뛰게 되었다. 데뷔 시즌부터 이 17살의 센터 포워드는 1부 리그 챔피언과 ÖFB-컵, 미트로파 컵 준우승이라는 굵직한 타이틀을 추가했다. 이 해의 컵 대회 결승전에서는 득점도 성공시켰지만 피르스트 비에나 FC에 2대3으로 패배하였다. 미트로파 컵에서는 팀이 첫대회에 이어 2년 연속 결승전 진출은 성공했지만 헝가리의 페렌츠바로시 TC에 밀려 우승에는 실패했다.1930년의 우승을 끝으로 라피트 빈은 한동안 피르스트 비에나와 아드미라 빈에 밀려 우승과는 거리가 있는 세월을 보내야 했다. 그나마 오스트마르크 비엔나를 상대로 7골을 넣은 기록이 있다는 것이 위안. 그러다 1934-35 시즌, 카부레크는 27골을 넣어 리그 득점왕을 차지하는 동시에 팀까지 5년만에 우승하는 커리어 하이 시즌을 보냈다.
1936년, 카부레크는 프랑스 1부 리그 소속이던 FC 메스로 이적했고, 15골을 넣으며 성공적으로 프랑스에도 적응했다. 하지만 다음 시즌, 카부레크는 2부 리그 동부 지구 소속이던 USB 롱위로 임대 이적했는데 지구 꼴찌로 강등 그룹에 속하는 등 처절한 시즌을 보냈다.
결국 카부레크는 1939년, 라피트 빈에 복귀했고 팀은 가울리가 오스트마르크에서 2차례 우승했다. 특히 1941년엔 라피트 빈이 독일 축구 챔피언십에서 우승했는데 이는 독일 축구계 역사상 유일한 오스트리아 클럽의 리그 우승 기록이지만 카부레크는 출전 명단에 없었다.
이후로 카부레크는 조커로 역할이 바뀌게 되었고 1944년까지 선수로 활약했다. 하지만 5시즌 동안 37경기 출전 38골을 기록하여 경기 당 득점율은 크게 늘어 1을 넘겼다.[3]
1.1.2. 국가대표팀
카부레크는 1934년 2월 11일, 이탈리아와의 토리노 원정 경기에서 데뷔했고, 오스트리아는 4대2 승리를 챙겼다.[4] 그 이후, 이탈리아 월드컵에 오스트리아 대표팀으로 소집되었지만 마티아스 신델라에 밀려 단 한 경기도 출전하지 못했다.카부레크는 오스트리아 대표팀으로 4경기에 출전, 2골[5]을 넣었고 1939년 독일 대표팀으로 1경기에 출전했다.
1.2. 감독
1946년, ASK 홀라브룬과 1947년 FC 브르노에서 감독을 맡은 적이 있다.2. 플레이 스타일 & 평가
골 순도 높은 공격수. 하지만 동시대의 더 좋은 공격수들로 인해 평가에서 손해를 보았다.3. 수상
3.1. 클럽
- 오스트리아 1부 리그 우승 3회: 1928-29, 1929-30, 1934-35(SK 라피트 빈)
- 독일 축구 챔피언십 우승 1회: 1941(SK 라피트 빈)
- 가울리가 오스트마르크 우승 2회: 1939-40, 1940-41(SK 라피트 빈)
- 미트로파 컵 우승 1회: 1930(SK 라피트 빈)
- 오스트리아 1부 리그 준우승 2회: 1932-33, 1933-34(SK 라피트 빈)
- 미트로파 컵 준우승 1회: 1928(SK 라피트 빈)
- ÖFB-컵 준우승 2회: 1928–29, 1933-34(SK 라피트 빈)
3.2. 개인
- 오스트리아 1부 리그 득점왕 1회: 1934-35(SK 라피트 빈)
[1] 이 시대에는 등번호가 존재하지 않았다.[2] 출처: 위키피디아, 11v11[3] 라피트 빈 1기 시절에는 121경기에 출전해서 100골을 기록했다.[4] 신델라 없이도 이 경기에서 승리한 오스트리아는 유력한 월드컵 우승 후보로 떠오르게 되었다. 반면 패배한 이탈리아는 월드컵 개최를 세달 반 정도 남겨놓고 주장 움베르토 칼리가리스, 비르지니오 로세타, 잔피에로 콤비 등 주전 수비진들이 단체로 반은퇴 상태에 놓이는 등 심각한 홍역을 치르게 된다.[5] 스위스를 상대로 2경기 2골을 넣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