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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11457E><colcolor=#FFF> 대 모라비아 2대 국왕 모이미르 2세 Mojmir II | ||
제호 | 체코어와 슬로바키아어 | 모이미르 2세 (Mojmír II) |
라틴어 | 모이마루스 (Moimarus 또는 Moymarus) | |
출생 | 미상 | |
사망 | 미상 | |
재위 | 대 모라비아 왕국 국왕 | |
894년 ~ 901년 이후 | ||
형제 | 스바토플루크 2세, 프레슬라프 | |
아버지 | 스바토플루크 1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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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 모라비아 왕국 2대 국왕이자 역사에 등장하는 마지막 모라비아 국왕.2. 행적
모라비아 초대 국왕 스바토플루크 1세의 장남이다. 형제로 스바토플루크 2세와 프레슬라프가 있었다. 894년 아버지가 사망한 뒤 모라비아 국왕에 올랐고, 니트라 공국은 형제 스바토플루크 2세의 영지가 되었으며, 알려지지 않은 영역이 프레슬라프에게 주어졌다. 콘스탄티노스 7세가 기술한 <제국의 통치에 관하여>에 따르면, 스바토플루크 1세는 죽기 전에 지팡이 3개를 가져오게 한 뒤, 이를 묶은 후 첫째 아들에게 주어 부러뜨리게 했다. 그가 그러지 못하자 둘째에게 다시 부러뜨려보게 했고, 그 역시 그러지 못하자 셋째 아들에게도 시도해보게 했다. 세 아들 모두 부러뜨리지 못하자, 지팡이 3개를 세 명에게 각각 하나씩 주게 한 뒤 부러뜨려보라고 했고, 세 아들 모두 지팡이를 쉽게 부러뜨렸다. 그후 그는 세 아들에게 이렇게 충고했다고 한다."만일 너희가 화합과 사랑 가운데 쪼개지지 않으면 너희 대적에게 패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만일 너희 가운데 분쟁과 경쟁이 있어 너희가 스스로 세 정부로 나뉜다면, 너희는 서로 멸망하게 될 것이고, 너희들의 이웃인 원수들 때문에 완전히 망하게 될 것이다."
이 일화가 사실인지는 분명하지 않다. 후대 학자들은 모이마르 2세가 아버지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른 뒤 두 형제와 심각한 내전을 벌이다가 마자르족의 침략에 의해 나라 전체가 무너진 일로 인해 이러한 이야기가 생겨났을 것이라 추정한다.
895년, 스바토플루크 2세가 동프랑크 국왕 아르눌프의 지원을 받고 모이미르 2세를 상대로 반란을 일으켰다. 이후 양자가 서로 화해하면서 갈등이 종식되는 듯 했지만, 스바토플루크 2세는 897년 아르눌프와 다시 동맹을 맺고 반란을 일으켰다. 모이미르 2세는 토벌대를 파견했지만, 스바토플루크 2세를 돕기 위해 파견된 프랑크군에게 패배했다. 이렇듯 모라비아에서 내전이 벌어진 틈을 타 외세의 침략이 벌어졌다. 894년, 마자르족이 블라텐 공국을 공략한 뒤 동프랑크 왕국에 넘겼다. 895년, 보헤미아는 모라비아 왕국에서 독립해 아르눌프의 봉신이 되었다. 897년, 루사티아 역시 아르눌프의 종주권을 인정했다. 여기에 마자르족이 카르파티아 산맥을 넘어와 판노니아 평야 지대에 영구적으로 정착하고 티자강 상류와 증류를 따라 모라비아를 잇따라 침략했다.
898년, 모이미르 2세는 바이에른 성직자들의 영향력을 줄이기 위해 교황에게 모라비아에 새로운 성직자들을 보내달라고 요청했다. 이 사실을 알게 된 바이에른인들은 모라비아를 침공했으나 격파되었다. 이때 스바토플루크 2세가 모이미르 2세에게 체포되었지만, 바이에른인들이 스바토플루크 2세를 구출한 뒤 바이에른으로 데려갔다. 899년 아르눌프가 사망한 뒤, 교황청은 모라비아에 대주교구 1개와 주교구 3개를 설립하여 바이에른 성직자들의 영향력을 줄이기로 결정했으며, 라틴어가 아닌 슬라브어로 예배를 보는 것이 다시 허용되었다.
900년, 마자르족이 다뉴브 강을 건너 모라비아인들과 합세한 뒤 바이에른을 습격했다. 이후 모이미르 2세는 901년에 바이에른인들과 평화 협약을 체결했다. 그러나 이를 끝으로, 그에 대한 기록은 더 이상 전해지지 않는다. 907년 바이에른 변경백 루이트폴트가 이끄는 바이에른군과 아르파드가 지휘하는 마자르족이 모라비아 왕국의 영역이었던 프레스부르크(오늘날 브라티슬라바)에서 격돌해 마자르족이 압승을 거뒀는데, 모라비아 왕국과 모이미르 2세는 사료상에서 언급조차 되지 않았다.
슬로바키아 역사가 얀 스테인휴벨(Ján Steinhübel, 1957 ~ )과 두샨 트레슈티크(Dušan Třeštík, 1933 ~ 2007)는 906년을 모이미르 2세가 사망하고 대 모라미아 왕국이 무너진 해로 가정했다. 두 역사가는 907년 바이에른인들이 바이에른에서 망명 중이던 스바토플루크 2세를 새로운 모라비아 통치자로 세우기 위해 공세를 개시했지만 프레스부르크에서 완패했고, 이후 모라비아 전역은 더 작은 지역 통치자들로 파편화되었다고 본다.
반면 체코 역사가 루보미르 에밀 하브릭(Lubomír Emil Havlík, 1925 ~ 2000) 등은 모이마르 2세의 통치가 924년이나 925년까지 지속되었다고 추정한다. 그들은 910년 모라비아 주교 4명이 교황청에 보낸 서신이 전해진다는 점을 들어 모라비아 왕국이 그때까지 유지되고 있었다고 추정하며, 924년 또는 925년 마자르족의 침략으로 왕국이 무너졌을 때 모이미르 2세 또는 스뱌토플루크 2세가 잘츠부르크로 망명했을 거라 추정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