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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5-05-04 22:16:30

모티머스 크로스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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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티머스 크로스 전투
영어: Battle of Mortimer’s Cross
파일:모티머스 크로스 전투.jpg
시기
1461년 2월 2일
장소
잉글랜드 왕국 헤리퍼드셔 캥스랜드
원인
런던으로 진군하려는 마치 백작 에드워드와 이를 저지하려는 랭커스터군의 대결.
교전 세력
요크 가문 파일:요크 왕조 휘장.svg 랭커스터 가문 파일:랭커스터 왕조 휘장.svg
지휘관
파일:Earldom_of_March.svg.png 마치 백작 에드워드
파일:Coat_of_Arms_of_Sir_William_Herbert,_1st_Baron_Herbert,_KG.png 허버트 남작 윌리엄 허버트
파일:Coat_of_Arms_of_Sir_Walter_Devereux,_7th_Baron_Ferrers_of_Chartley,_KG.png 샤틀레의 페러스 남작 월터 드버룩스
파일:Arms_of_Owen_Tudor.svg.png 오웬 튜더
파일:Coat_of_arms_of_Jasper_Tudor.svg.png 재스퍼 튜더
파일:Coat_of_Arms_of_Sir_James_Butler,_1st_Earl_of_Wiltshire,_KG.png 윌트셔 백작 제임스 버틀러
병력
5,000명 6,000명
피해
미상 2,000명
결과
요크군의 승리
영향
마치 백작 에드워드의 런던 진군과 에드워드 4세 등극.
1. 개요2. 배경3. 경과4. 결과

1. 개요

장미 전쟁 시기인 1461년 2월 3일, 요크파의 지도자 마치 백작 에드워드런던으로 진군하던 중 이를 저지하려는 랭커스터군을 격파한 전투.

2. 배경

1460년 12월 30일 웨이크필드 전투에서 아버지인 제3대 요크 공작 리처드와 동생인 리치먼드 백작 에드먼드가 전사했다는 소식을 접한 마치 백작 에드워드는 일단 러들로로 이동한 뒤 런던으로 진군하기 위해 병력을 끌어모았다. 랭커스터파은 그런 그마저 제압해 내전을 끝내기 위해 사방에서 움직였다. 펨브로크 백작 제스퍼 튜더가 웨스트 웨일스에서 아버지 오웬 튜더와 함께 군대를 이끌고 동진했고, 윌트셔 백작 제임스 버틀러가 브르타뉴아일랜드에서 차출한 용병대를 이끌고 밀포드 헤이븐의 웨일스 항구에서 진군했다.

마치 백작은 적군이 두 갈래로 러들로에 진군하고 있다는 소식을 접하자, 러들로에서 남서쪽으로 약 8마일 떨어진 러그 강에 있는 모티머스 크로스에서 적을 요격하기 위해 5,000명을 이끌고 진군했다. 이곳은 러들로에서 오는 도로가 강을 건너는 지점이었다. 그러던 1461년 2월 2일, 요크군 장병들은 하늘에 태양이 하나가 아니라 세 개 떠오른 걸 보고 경악했다. 이는 극심한 추위와 대기 광학 현상으로 발생한 것이었지만, 장병들은 불길한 조짐이라며 공포에 떨었다. 그러자 마치 백작은 장병들에게 삼위일체가 실현된 것이며, 랭커스터 가문에 대한 승리를 예고하는 징조라고 선언했고, 장병들은 이에 고무되어 전투 의지를 굳건히 했다. 이후 랭커스터군이 현장에 도착하면서 전투가 임박했다.

3. 경과

마치 백작은 요크군을 동서 도로 남쪽, 러그 강과 강과 평행하게 이어지는 강둑 사이의 1/4마일 폭의 평야에 집결했다. 요크군 궁수들은 주요 방어선 앞쪽의 숲이 우거진 언덕에 주둔했고, 랭커스터군 좌익을 매복 공격할 준비에 착수했다. 또한 궁수들 너머의 버저드 계곡에 기병대가 숨어 있었다. 이윽고 현장에 도착한 랭커스터군은 전투 대형을 편성했다. 윌트셔 백작 버틀러가 좌익을, 펨브로크 백작 제스퍼 튜더가 중앙 부대를 이끌었고, 오웬 튜더가 우익 부대를 이끌었다. 이윽고 랭커스터군은 정오가 되었을 때 공세를 개시했다. 윌트셔 백작 제임스 버틀러가 좌익 부대를 이끌고 공세를 개시해, 마치 백작의 우익 부대가 물러나도록 강요했고, 오웬 튜더가 우익 부대를 이끌고 좌익 부대를 몰아붙이려 했다.

이때, 숲이 우거진 언덕에 숨어있던 요크 궁수들이 일제히 나타나 적 좌익 부대를 향해 화살을 쐈다. 랭커스터군 좌익군은 갑작스러운 화살비를 측면에서 얻어맞고 화들짝 놀라 아군 중앙부대 쪽으로 물러났고, 이 때문에 랭커스터군이 혼란에 빠졌다. 적이 혼란에 빠지는 걸 목격한 마치 백작은 전군에 돌격 명령을 내렸고, 버저드 계곡에 숨어있던 기병대도 출격해서 랭커스터군의 좌측 후방을 요격했다. 랭커스터군은 러그 강둑으로 밀려났고, 그곳에서 요크군의 돌격에 의해 궤멸했다. 랭커스터 장병 중 다수는 다리나 여울이 없는 지점에서 러그 강을 건너 탈출하려 했지만, 무거운 갑옷 때문에 익사했다. 랭커스터군 상당수는 반 마일 떨어진 베틀 에이커로 후퇴했다가 추격대에게 다시 한 번 격파되어 웨스트 웨일스로 도주했다. 이리하여 전투는 요크군의 압도적인 승리로 막을 내렸다.

4. 결과

요크군의 사상자는 알려진 바 없지만 미미한 것으로 추정되며, 랭커스터군 사상자는 2,000명에 달했다. 오웬 튜더는 17마일 떨어진 헤리퍼드로 도주했다가 그곳에서 체포된 뒤 웨이크필드 전투에서 살해당한 아버지의 복수를 하고 싶었던 마치 백작의 특명으로 처형되었다. 그 후 마치 백작은 런던으로 서둘러 이동했고, 3월 2일 런던에 입성한 뒤 잉글랜드 국왕 에드워드 4세로 등극했다. 그 후 그는 랭커스터파와 최종 결전을 벌이기 위해 잉글랜드 북부에 자리잡은 랭커스터파를 향해 진군했고, 양자는 중세 잉글랜드 역사상 최대 규모의 전투인 토우턴 전투를 치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