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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0-02 15:05:17

몽스 공방전

1. 개요2. 배경3. 양측의 전력
3.1. 네덜란드 반군3.2. 스페인군
4. 전투 경과5. 결과

1. 개요

네덜란드 독립 전쟁 시기인 1572년 6월 23일부터 9월 19일까지 몽스의 지배권을 놓고 로데베이크 판 나소의 네덜란드 반군과 알바 공이 이끄는 스페인군이 맞붙은 전투. 스페인군이 석달 간의 포위 끝에 항복을 받아냈다.

2. 배경

1568년 10월 20일, 알바 공이 이끄는 스페인군은 빌럼 판 오라녀가 이끄는 2만 5천 ~ 3만에 달하는 네덜란드 반군을 조도뉴 전투에서 격파했다. 이후 빌럼은 프랑스로 피신하여 위그노 세력과 함께 했고, 알바 공은 네덜란드에서의 스페인의 패권을 굳히는 듯했다. 그러나 오스만 제국과의 전쟁으로 국고가 바닥난 스페인 궁정은 재정을 충당하기 위해 1570년부터 네덜란드에 더욱 가혹한 과세를 부과했다. 알바 공은 무거운 과세에 항의하는 네덜란드 의회를 무시하고 증세를 강행했고, 납세를 거부하는 이들을 가차없이 처벌했다. 가혹한 세금을 피해 외국으로 도망가는 이들이 늘어났고, 가톨릭과 개신교를 막론하고 모든 네덜란드 민중은 스페인의 압제를 증오했다.

그러던 1572년 4월 1일, 알바 공이 프랑스의 침략 위협을 저지하기 위해 남부 네덜란드에 군대를 집중시키는 틈을 타, '바다의 거지떼'가 브릴레 항구를 기습적으로 점령했다. 민중은 이에 호응하여 홀란트와 제일란트에서 봉기를 일으켰다. 당시 친정인 작센에 있다가 봉기가 일어났다는 소식을 접한 빌럼은 즉시 사신을 파견해 봉기군과 연락했고, 그들로부터 충성 맹세를 받아냈다. 뒤이어 헬데를란트와 프리슬란트, 오베리셀, 위트레흐트의 모든 주요 도시들이 알바 공의 폭정에 맞서기로 결의하고 스페인 수비대를 몰아내고 반기를 들었다. 그들은 민중의 자유를 위해 사투를 벌이는 빌럼에게 충성을 맹세하고, 알바 공을 몰아낼 때까지 투쟁하기로 했다.

한편, 빌럼의 동생인 로데베이크 판 나소는 프랑스의 위그노 지도자들과 국왕으로부터 지원을 약속받은 뒤, '바다의 거지들'의 협조로 해상을 통해 네덜란드 항구로 들어왔다. 이후 독일, 영국, 스코틀랜드, 프랑스 출신 용병대를 고용하여 병력을 구축했다. 5월 21일 발랑시엔을 점거하였고, 뒤이어 5월 23일 상인으로 위장한 채 몽스로 잠입한 뒤 소규모 스페인 수비대를 몰아내고 "우리는 국왕에게 대항하지 않는다. 단지 국왕의 눈을 가리고 시민을 억압하는 알바 공을 몰아내기 위해 떨쳐 일어났을 뿐이다."라며 몽스 시장을 설득해 봉기에 동참하게 하였다.

당시 프랑스-네덜란드 국경 지대에서 프랑스군과 대치하고 있던 알바 공은 사태가 이처럼 급박하게 돌아가자 크게 당황했다. 특히 파리에서 열린 테니스 경기에 참가했다던 로데베이크가 난데없이 몽스 요새를 공략했다는 소식은 그에게 큰 충격을 안겼다. 몽스는 에노 지방의 수도이며, 프랑스-네덜란드 국경과 인접한 곳에 위치하여 스페인군의 보급로를 책임지는 요충지였다. 그런 곳을 잃어버렸다는 건 네덜란드 내 스페인군에게 있어 치명적인 손실이었다.

하지만 알바 공은 곧 정신을 가다듬고 신속하게 대응했다. 그는 아들 파드리케 알바레스 데 톨레도에게 4,000 보병과 기병 1,500명을 줘서 몽스를 포위하라고 명하고, 자신은 병력을 규합하여 몽스를 구하려는 반란군을 저지하기로 했다. 이리하여 몽스 공방전의 막이 올랐다.

3. 양측의 전력

3.1. 네덜란드 반군

3.2. 스페인군

4. 전투 경과

스페인군이 몽스로 몰려오고 있다는 소식을 접한 로데베이크는 즉시 프랑스로 사자를 사자를 보내 약속대로 구원군을 보내달라고 요청했다. 이에 위그노 세력의 일원인 장 드 앙제가 이끄는 10,000명에 달하는 병사들이 에노 방면으로 진격했다. 로데베이크는 형 빌럼이 별도로 군대를 구성하여 몽스로 오고 있으니, 그와 합세하라고 촉구했다. 그러나 앙제는 로데베이크의 충고를 무시하고 독자적으로 몽스로 진격했다.

7월 19일, 앙제의 군대는 몽스 근교의 숲으로 둘러싸인 평원에 야영하면서, 정찰대를 파견해 적의 상황을 살펴봤다. 그들은 곧 "톨레도의 돈 파드리케가 1만에 달하는 병력을 이끌고 다가오고 있다"는 소식을 전했다. 실제로 파드리케가 이끄는 병력은 보병 4,000에 기병 1,500명뿐이었지만, 첩자들은 3천 명의 반무장 시민들이 스페인군과 함께 하는 걸 보고 규모를 오판해버린 것이다. 이에 위그노들은 전의를 상실했고, 뒤이은 스페인군의 공세에 제대로 대항하지 못하고 대패했다. 앙제는 전투 후 체포되어 안드베르펜 성에 수감되었다가 16개월 후 알바 공의 명령으로 목이 졸려 죽었다.

한편, 빌럼은 보병 14,000명, 기병 3,000명에 달하는 대규모 용병대를 작센에서 규합한 뒤 라인 강을 건너 몽스를 향해 진격했다. 그는 프랑스의 위그노 수장 가스파르 드 콜리니 제독이 샤를 9세의 승인을 받아 곧 네덜란드로 진격할 거라는 편지를 받았기에, 몽스에서 포위된 동생을 구할 수 있으리라 여겼다. 그러나 얼마 후 충격적인 사태가 벌어졌다. 1572년 8월 24일 성 바르톨로메오 축일의 학살이 발발하면서 콜리니 제독을 포함한 위그노 지도자들이 파리에서 학살당한 것이다.

이 소식은 스페인 진영에 큰 기쁨을 안겨줬다. 그들은 성 미셸 성당에서 프랑스의 가톨릭 국왕의 '업적'에 경의를 표하는 노래를 불렀다. 반면 네덜란드 반군은 엄청난 충격을 받았고, 앞으로 프랑스의 지원을 받지 못한다는 걸 깨달았다. 알바 공 본인은 성 바르톨로메오 축일의 학살에 대해 "너무 잔혹한 짓이었다"고 비판했지만, 이 기회를 놓치지 않기로 하고 9월 10일 몽스 근방에 본대를 배치하고 빌럼의 네덜란드 반군의 공세에 대비했다. 그날 빌럼이 파견한 기병대가 스페인군의 측면을 공격했지만, 스페인 화승총병대의 집중 사격으로 격퇴되었다.

빌럼은 군대를 수습한 뒤 몽스로부터 1 리그[1][2] 떨어진 아르밍니스 마을로 후퇴했다. 다음날인 9월 11일 밤, 줄리안 드 로메로 라는 이름의 스페인 장교가 이끄는 600명의 스페인군이 야음을 틈타 네덜란드 반군 진영을 급습해 보초병들을 죽이고 빌럼이 숙면을 취하고 있던 막사까지 쳐들어갔다. 이때 빌럼이 기르던 개인 스패니얼이 침입자의 낌새를 채고 사납게 짖었고, 빌럼은 이 소리에 잠에서 깬 뒤 이변을 눈치채고 도주했다. 스페인 병사들은 막사에 불을 지른 뒤, 반군이 달려들기 전에 진영을 벗어났다. 반란군 600명이 이 습격으로 살해되거나 불에 타 죽은 반면, 스페인군은 60명만 목숨을 잃었다.

이 사건으로 빌럼이 이끄는 반군의 사기는 땅바닥에 떨어졌고, 용병들은 급료를 받지 못한 것에 격노하여 거의 반란 직전까지 갔다. 이제 더는 어찌할 도리가 없다고 판단한 빌럼은 로데베이크에게 편지를 보내 구원할 수 없게 되었으니 적에게 항복하라고 권고했다. 이후 그는 라인 강을 도로 건넌 후 용병대를 해산시키고 홀란트로 쓸쓸히 귀환했다. 한편 로데베이크는 전세가 기울어진 데다 그 자신도 고열로 침대에 온종일 누워 있는 신세여서 전의를 상실했다. 그는 형으로부터 항복을 권고하는 편지를 받자 알바 공에게 사절을 보내 명예롭게 항복하게 해달라고 청했다.

알바 공은 그 요청을 기꺼이 받아들였고, 1572년 9월 19일 몽스 요새가 개방되었다. 몽스 수비대와 무기를 소지한 주민들은 재산을 가지고 도시를 떠나는 게 허용되었고, 루데베이크는 친정인 딜렌부르크로 호송되었다. 이리하여 몽스 공방전은 스페인군의 승리로 종결되었다.

5. 결과

석 달에 걸친 몽스 공방전이 스페인군의 승리로 귀결되면서, 빌럼에게 충성을 맹세했던 네덜란드 남부 도시들은 재빨리 태도를 바꿔 알바 공에게 충성을 서약했다. 알바 공은 빌럼을 지원했던 도시들에 무거운 벌금을 매겼고, 빌럼이 수비대를 남겨둔 도시인 메헬렌을 철저히 약탈하여 병사들에게 밀린 봉급을 지급했다. 그러나 그가 네덜란드 남부를 재장악하는 데 골몰하는 사이, 홀란트와 제일란트 등 네덜란드 북부 2개 주는 독립 기반을 마련할 수 있었다. 빌럼은 이들과 재합류한 뒤 스페인군과 항쟁한다.


[1] league. 영미권에서 쓰이는 길이 단위로 약 4828m, 대략 3마일 정도이다.[2] 5km 조금 안 되는 거리이니 적의 추격에 노출된 것이나 다름이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