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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5-04-19 12:32:33

몽토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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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정
<colbgcolor=#2b5df2><colcolor=#fcef3c> 국가 프랑스
행정단위 코뮌
레지옹 옥시타니
데파르트망 타른에가론
아롱디스망 몽토방
INSEE 코드 82121
인문지리
시장 브리짓 바레드
면적 135.17㎢
인구 62,487명(2022년)
인구밀도 460명/㎢


1. 개요2. 역사3. 관광4. 여담

1. 개요

프랑스 남서부 미디피레네에 위치한 지역으로 타른에가론의 주도이다.

2. 역사

몽토방은 프랑스 남부에서 몽드마르상 다음으로 오래된 요새로 툴루즈 백작인 알포스 주르댕이 자유헌장을 승인한 1144년에 도시의 역사가 시작되었다. 13세기에는 알비 십자군이 이단인 카타리파를 토벌하는 전쟁과 이에 기반한 종교재판으로 참혹한 피해를 입었다. 또한 백년전쟁 초반에 대패한 프랑스군이 브레티니 조약에 의거해 몽토방을 잉글랜드에 넘겼다. 하지만 최종적으로 백년전쟁에서 승리한 프랑스군이 다시 몽토방을 되찾았다.

15세기부터 전 유럽에 개신교의 바람이 불기 시작할 때 몽토방은 개신교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그래서 주민들과 치안판사들은 수도사를 추방하고 성당을 철거하였다. 그래서 위그노 전쟁에 적극적으로 가담하였으며 가톨릭 왕에게 충성을 받치기 거부했다. 그래서 이에 분노한 루이 13세는 몽토방을 포위하였지만 86일 간의 포위를 성공적으로 견뎌내었다. 그러나 1629년 같은 위그노 도시인 라로셸리슐리외 추기경에 의해 함락되자 루이 13세에 복종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위그노들은 탄압당했고 이는 루이 14세낭트 칙령을 파기하면서 더욱더 심해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몽토방은 18세기에 밀가루, 실크와 모직물 직조로 경제적으로 정점을 찍었다. 그러나 영국과 벨기에, 노르파드칼레에서 섬유를 생산하자 경쟁에서 밀린 몽토방의 섬유 산업은 점차 쇠퇴하였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북유럽과 벨기에의 난민이 몽토방으로 대피하였다. 몽토방은 교차로로서 제2차 세계대전 의 독일의 공포와 잔혹 행위를 다시 겪지 않기 위해 모든 것을 뒤에 남겨둔 수천 명의 망명자들의 종착지가 되었다. 그러나 프랑스가 독일에 항복하자 이 곳에 대피했던 난민들은 레지스탕스에 가담하였고 독일군과 친독 극우 민병대 '밀리스'는 몽토방 주민들을 학살하기도 했다.

3. 관광

4. 여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