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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8-01 20:57:46

무티미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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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티미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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Мутимир}}}
파일:무티미르.png
출생 미상
사망 850년
재위 세르비아 크냐지
850년 ~ 891년
아버지 블라스티미르
형제 스트로지미르, 고이니크
아들 프리비슬라프, 브란, 스테판
가문 블라스티미로비치 가문

1. 개요2. 행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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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기록상에 등장하는 세르비아 공국 5대 크냐지(Knyaz). 불가리아 제1제국의 침략을 격퇴했으며, 정교회를 수용했다.

2. 행적

제4대 크냐지 블라스티미르의 장남이다. 형제로 스트로지미르, 고이니크가 있었다. 850년경 아버지가 사망한 뒤 두 형제와 함께 크냐지에 선임되었고, 영지를 셋으로 나누었다. 다만 그가 주권자로서 활동했고, 두 형제는 가신이 되었다. 치세 초기, 불가리아군이 세르비아를 침공했다. 동로마 제국 황제 콘스탄티노스 7세는 <제국의 통치에 관하여>(De Administrando Imperio)에서 불가리아 칸 보리스 1세가 아버지 프레시안 1세의 패배를 복수하기 위해 세르비아를 침공했다고 밝혔다.

불가리아군이 쳐들어오자, 무티미르는 형제 스트로지미르, 고이니크와 함께 힘을 합쳐 침략군을 격퇴했고, 보리스의 장남 블라디미르와 12명의 보야르들을 생포했다. 이후 양자간의 평화 협상 끝에, 세르비아 동부 국경의 라사에서 포로들을 보리스 1세에게 넘겨주고 선물을 교환했다. 기록에 따르면, 보리스 1세는 노예 2명, 사냥개 2마리, 매 2마리, 모피 코트 80벌 등의 여러 귀중품을 선물로 줬다고 한다.

불가리아와 평화를 맺은 직후, 세 형제간에 갈등이 벌어졌다. 콘스탄티노스 7세는 갈등의 원인이 무티미르가 모든 권력과 영지를 독차지하려는 열망 때문이라고 밝혔다. 그러나 세르비아 역사학자 타보르 지브코비치(Tibor Živković, 1966 ~ 2013)는 가신을 맡은 왕자들이 반란을 꾀하는 게 일반적이지, 최고 권력을 짊어진 그가 그렇게 한 사례는 매우 드물다며, 동로마 제국과 불가리아가 세르비아에 영향력을 행사하는 가운데 벌어진 갈등일 거라고 추정한다. 그는 불가리아와 평화 협약을 맺었을 때, 무티미르가 불가리아와 협력하기로 했을 것이며, 동로마 제국은 이에 불만을 품고 그의 동생들을 통해 세르비아의 국가 정책을 바꾸려 했을 거라고 본다.

아무튼 무티미르는 860년 무렵에 두 형제를 제압한 뒤 불가리아로 넘겼고, 고이니크의 아들 페타르를 인질로 잡았다. 하지만 페타르는 나중에 탈출해 크로아티아로 피신했다. 스트로지미르에게는 아들 클로미니르가 있었지만, 그는 인질이 되지 않았다. 학자들은 이에 대해 클로미니르는 이때 태어나지 않고 나중에 불가리아에서 망명생활을 하던 아버지가 머무는 집에서 출생했을 거라고 추정한다. 클로미니르는 나중에 블라스티미로비치 가문의 마지막 통치자 차슬라프를 낳았다.

870년대, 세르비아인들은 정교회로 개종했다. 콘스탄티노스 7세는 바실리오스 1세가 파견한 선교사들에 의해 세례를 받았다고 밝혔지만, 현대의 여러 학자는 콘스탄티노스 7세가 세르비아의 개종을 조부의 공적으로 윤색했을 뿐, 실제로는 7세기부터 시작된 세르비아인들의 기독교화가 이즈음에 완료되었을 거라고 본다. 무티미르는 873년 5월 교황 요한 8세로부터 세르비아 교구를 시르미움 주교단의 관할권으로 돌아가는 데 협력해달라고 요청하는 서신을 받았다. 하지만 그는 이를 따르지 않고 콘스탄티노폴리스 대주교구의 관할에 그대로 남기로 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무티미르에게는 장남 프리비슬라프, 차남 브란, 삼남 스테판이 있었다. 장남 프리비슬라프는 891년경 아버지가 사망한 뒤 새 크냐지가 되었지만 892년 페타르의 정변으로 폐위되어 크로아티아로 망명했다. 브란은 형과 함께 망명했다가 895년경 세르비아로 돌아와 페타르와 대결했으나 패배하고 생포된 뒤 실명형에 처해졌다. 다만 브란의 아들 파블레는 페타르가 917년 불가리아 차르 시메온 1세의 지원에 힘입어 세르비아 크냐지가 되었다. 삼남 스테판은 불가리아 칸 보리스 1세의 장남 블라디미르와 12명의 보야르들을 보란과 함께 국경 지대로 데려갔다는 것 외엔 전해지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