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ablealign=center><tablebordercolor=#0e1d32,#e0e0e0><bgcolor=#0e1d32><tablebgcolor=#0e1d32>
}}}}}}}}}||
{{{#!wiki style="margin:0 -10px -5px; min-height:2em; color:#fff; max-width:840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5px -1px -11px; color:#000; letter-spacing:-1px"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라파예트 Lafayette | |
문화 중심 | 외교 위주 | |
특유 능력 | |
두 세계의 영웅 (Hero of Two Worlds) | |
특유 안건 | |
프렌치 쿼터스 (French Quarters) | |
1. 개요
라파예트
라파예트 질베르 뒤 모티에는 유럽 및 미국 대륙에 자신의 이름을 남겼습니다. 그는 미국 독립 혁명에서 군대를 이끌었으며, 프랑스에서는 전제주의와 혁명의 보복이라는 양극단 사이에서 합리적인 목소리를 내며 활약했습니다. 그의 행보가 인상적이지만, 사실 그의 가장 놀라운 업적은 당대 최고의 격변기 속에서 살아남은 것일지도 모릅니다.
라파예트 질베르 뒤 모티에는 유럽 및 미국 대륙에 자신의 이름을 남겼습니다. 그는 미국 독립 혁명에서 군대를 이끌었으며, 프랑스에서는 전제주의와 혁명의 보복이라는 양극단 사이에서 합리적인 목소리를 내며 활약했습니다. 그의 행보가 인상적이지만, 사실 그의 가장 놀라운 업적은 당대 최고의 격변기 속에서 살아남은 것일지도 모릅니다.
2. 역사적 배경
- 역사적 배경 [ 펼치기 · 접기 ]
- > 라파예트는 세상이 혼란스러워 보이던 시기에 탄생한, 혁명과 관련된 인물입니다. '귀족의 역할은 무엇인가?' '남성(및 여성)에게 속하는 권리는 무엇이며, 남성과 여성에게 어떤 권리가 있는가?' 이러한 모든 문제는 18세기 중반에 전면에 드러났습니다. 제국이 번성하자, 제국은 부유한 특정 계층을 장려했습니다. 상인과 사업가의 영향력과 권력은 더욱 강력해졌고, 귀족도 더 강력해졌습니다. 그러나 이들 집단은 서로 정부에 바라는 바가 달랐습니다. 이 갈등으로 인해 미국 혁명과... 프랑스가 개입할 무대가 마련되었습니다.
프랑스는 오랫동안 영국의 라이벌이었습니다. 따라서 프랑스 왕가가 미국 혁명가들에게 원조를 제공했다고 해서 이데올로기 면에서 지지했다고 해석하는 건 곤란합니다. 프랑스는 프렌치 인디언 전쟁에서 캐나다의 지배를 놓고 영국과 전쟁을 벌여 패배했지만, 그 전쟁은 거의 모든 세계 열강이 참전한 대규모 식민지 전쟁인 7년 전쟁의 작은 서막에 불과했습니다. 프랑스의 관점에서 볼 때, 아메리카 식민지의 독립 선언은 몇 년 후 발생할 더 큰 영국과 프랑스 갈등의 촌극에 불과했습니다.
라파예트는 이 모든 갈등에 관여했습니다.
라파예트는 이름이 아닌 칭호입니다. 그는 본질적으로 공작 바로 아래의 작위인 라 파예트의 후작이며, 그의 성명은 마리조제프 폴 이브 로크 질베르 뒤 모티에입니다. 그의 가문은 잔 다르크 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오래된 귀족이었습니다. 그는 혁명가가 될 권리가 없었고, 그럴 필요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를 움직인 것은 양심과 복수심이었을 것입니다.
라파예트의 아버지는 영국의 포탄에 맞아 사망했습니다. 그는 아주 젊었을 때 영국의 야망을 흔들려는 프랑스를 돕기 위해 미국으로 떠났습니다. 미국에서 그는 해군 사령관으로서 영향력을 행사했으며, 특히 프랑스 포병이 영국 해군 사단을 함정에 빠뜨리고 영국 사령관을 생포하여 미국의 승리를 이끈 결정적 전투인 요크타운 전투에서 활약했습니다.
미국 혁명이 끝난 뒤 라파예트는 파리로 돌아와 여전히 끓어오르기 직전의 상황에 놓인 프랑스를 보게 되었습니다. 평민은 개혁을 요구했고, 종국에는 군주제의 폐지를 요구하면서 프랑스 혁명이 무르익고 있었습니다. 이는 아이러니하게도 프랑스 군주제에서 지원했던, 바로 그 미국 혁명에서 영감을 받은 움직임이었습니다. 그러나 프랑스 혁명은 시민 통치를 위해 왕의 머리를 베어낸 한 번의 혁명이 아니라, 공화정에서 군주제, 독재 제국으로 갔다가 다시 돌아오는 순환이었습니다. 옛 왕은 왕좌를 되찾았고... 장군들은 스스로 새 왕으로 즉위했습니다.
라파예트는 이 모든 이데올로기적이면서도 매우 현실적인 혼돈 속에서 그 가운데에 인본주의를 유지하려 노력했습니다. 그는 특정 종류의 자유주의 정치가의 전형을 보여줍니다. '자유주의'라는 말은 개인의 권리와 개인의 근본적인 독립성을 인정한다는 뜻입니다. 원칙에 따라 움직이는 것으로 유명한 그는 친구들과 의견이 맞지 않을 경우 주저하지 않고 반대했습니다. 그는 고귀한 혈통 출신이었지만, 절제된 혁명을 지지했습니다. 그는 미국 혁명가이자 대규모 플랜테이션 소유주인 조지 워싱턴과 토머스 제퍼슨의 절친한 친구였지만, 평생 노예제에 반대했습니다. 그는 프랑스 혁명의 바로 중심에 서서 주변 인물들이 단두대의 이슬로 사라질 때도 어떻게든 죽음을 피하고 살아남았습니다.
프랑스로 돌아온 라파예트는 '두 세계의 영웅'으로 환호받았습니다. 프랑스에서 그는 노예제 폐지와 호데노소니족(이로쿼이족)과의 평화 협상을 강력히 주장했지만, 미국과 프랑스 관계 강화에 핵심적인 역할을 했습니다. 또한, 미국 헌법의 초안 작성도 도왔고 그 과정에서 헌법이 프랑스에 생기기도 전에 미국 시민이 되었습니다!
몇 년 후, 프랑스는 위기를 향해 치닫고 있었습니다. 국왕은 라파예트를 귀족 회의의 대표로 임명했지만, 라파예트는 더 많은 대중의 참여와 왕권의 축소를 요구하며 프랑스 국민의회를 만들었습니다. 라파예트는 제퍼슨의 도움을 받아 전 세계 민주주의의 성장에 광범위한 영향을 미친 문서인 프랑스 인권 선언문(인간과 시민의 권리 선언)을 작성했습니다.
여담이지만 라파예트는 프랑스 국기가 될 빨간색, 흰색, 파란색으로 방위군의 휘장을 디자인했는데, 빨간색과 파란색은 파리의 색, 흰색은 군주제의 색이었습니다(라파예트 자신은 흰색이 부르봉 왕조가 아닌 프랑스 국가를 상징한다고 주장했지만요).
라파예트는 이 선언문을 의회에 제출하여 큰 성공을 거두었지만, 곧 상황은 걷잡을 수 없이 빠르게 돌아가며 그의 손을 떠났습니다. 의회는 헌법을 원했지만, 왕은 이를 거부했습니다. 군주제가 축소되고 제3신분인 농민이 봉기하여 특정 장소, 특히 악명 높은 감옥인 바스티유를 장악하기 시작했습니다.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 의회는 귀족 라파예트가 지휘하는 프랑스 국민위병을 창설했습니다. 이로 인해 불안한 휴전이 이루어졌지만, 라파예트는 유능했습니다. 국민위병이 왕에게 선언문을 전달하기 위해 궁전으로 행진했을 때, 시민들은 베르사유 궁전으로 침입했고, 라파예트는 군중을 내려다 볼 수 있는 발코니로 왕족을 안내했습니다. 사람들이 마리 앙투아네트를 향해 '그녀를 쏴라'라고 외치면 라파예트는 그녀의 손에 키스하여, 대학살(나중에 일어남)을 왕당파의 신심을 보여주는 공개 쇼로 전환시켰습니다.
간단히 말하자면 이게 라파예트의 정치적 역할이었습니다. 그는 자유를 위한 계몽주의의 지지자이며 개인의 이익과 자연권, 국가를 최우선으로 하는 당시의 혁명 사상을 받아들였지만, 입헌 군주제의 지지자이기도 했습니다. 라파예트는 왕이 지상의 신이 아니라, 본인과 같은 규칙을 준수하며 살기를 원했습니다. 그는 유능한 외교관이었습니다.
하지만 여기서 끝난 게 아니었습니다. 라파예트의 감시 아래 궁전에 갇혔던 왕이 탈출을 시도했고, 라파예트는 모든 책임을 뒤집어썼습니다. 왕당파의 혁명가 학살 사건 이후, 라파예트의 명성에는 치명적인 금이 갔습니다. 중도를 유지하기 위한 마지막 시도에서 라파예트는 급진적인 자코뱅에게 대항했지만, 혁명가들의 권력과 영향력이 커지면서 그의 명성은 더욱 추락했습니다. 왕족은 투옥되어 단두대에 오를 준비를 마쳤고, 라파예트는 도주했습니다.
시간이 흘렀습니다. 혁명이 일어난 프랑스에서는 나폴레옹이 궐기했고, 결국에는 군주제가 복권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군주제는 저만의 속셈을 숨기고 있었습니다. 샤를 10세는 절대 권력을 원했고 라파예트가 협상의 자리로 소환되었습니다. 샤를이 부르주아(자산을 소유한 평민과 장인)의 투표권을 없애자 또 다른 혁명이 일어났습니다. 이 혁명은 새로운 공화국으로 이어지지는 않았지만, 라파예트의 제안에 따라 또 다른 왕이 프랑스 왕좌에 앉게 되었습니다. 이 군주 역시 독재자로 밝혀지면서 '레 미제라블'의 영감이 된, 실패한 6월 봉기가 일어나게 됩니다. 라파예트는 얼마 지나지 않아 명을 달리했습니다.
라파예트는 여러 유산을 남겼습니다. 미국에서 라파예트는 그의 매력과 어린 나이 때문에 영웅으로 예견되어 있었습니다. 워싱턴은 어린 라파예트를 양아들처럼 생각했고, 다른 혁명가들은 대의에 헌신하는 라파예트에게 깊은 감명을 받았습니다.
프랑스의 경우에는 그의 유산을 한 마디로 해석하기 힘듭니다. 그는 입헌 군주제와 인간의 권리에 대한 계몽주의 사상을 결합하여 온건한 목소리를 내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했습니다. 라파예트의 프랑스에 대한 꿈은 당대에 온전히 실현되지는 못했지만, 미국에서는(라파예트가 반대했던 노예제 유지를 제외하고) 실현되었습니다.
라파예트가 주창했던 인간과 시민의 권리 선언은 미국의 여성 참정권 운동, 18세기 초의 라틴 아메리카 혁명, 그리고 1945년 호찌민의 베트남 혁명에 이르기까지 영감을 주었고 깊은 영향을 미쳤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