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벤저민 프랭클린 Benjamin Franklin | |
외교 위주 | 과학 중심 | |
특유 능력 | |
최초의 미국인 (The First American) | |
특유 안건 | |
시민의 미덕 (Civic Virtue) | |
1. 개요
벤저민 프랭클린
미국 식민지 시대에 벤저민 프랭클린은 최고의 위인이었습니다. 평범한 인쇄공이던 그는 곧 저명한 신문 발행인으로서 명성을 떨치게 되었습니다. 1747년에는 정계로 진출하여 독립선언서 초안 작성과 서명에 참여하면서 미국 건국의 아버지들 중 한 명이 되었습니다. 다재다능한 인물답게, 프랭클린은 전기부터 해양학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과학 분야에 기여했습니다.
미국 식민지 시대에 벤저민 프랭클린은 최고의 위인이었습니다. 평범한 인쇄공이던 그는 곧 저명한 신문 발행인으로서 명성을 떨치게 되었습니다. 1747년에는 정계로 진출하여 독립선언서 초안 작성과 서명에 참여하면서 미국 건국의 아버지들 중 한 명이 되었습니다. 다재다능한 인물답게, 프랭클린은 전기부터 해양학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과학 분야에 기여했습니다.
2. 역사적 배경
- 역사적 배경 [ 펼치기 · 접기 ]
- 미합중국이라는 개념은 오랜 시간 동안 모순된 형태를 취했습니다. 그 예로는 종교에 대한 반체제 인사를 위한 안식처, 노예화를 중심으로 한 플랜테이션 기반 경제, 계몽주의 이상에 대한 실험, 대륙을 지배하려는 팽창주의자 공화국 추구, 심지어는 세계 자본주의의 중심지 등이 있습니다.
벤저민 프랭클린은 미국을 세속화된 개신교와 자본주의, 자유의 개념이 혼재된 존재로 보았습니다. 사회학자 막스 베버의 글에 따르면, 프랭클린은 칼뱅주의에서 금욕적인 생산적 기풍(노동을 선으로 여기고 부지런한 사람은 좋은 사람으로 여기는)으로의 전환을 상징하는 인물이었습니다. 따라서 노동은 구원을 향한 길이었습니다. 즉, 더 세속적인 사고를 지닌 건국의 아버지들에게 있어 절약과 노동은 그 자체로 목적이 되었습니다. 이러한 관점은 기하급수적으로 노동을 합리화하고, 효율성에 초점을 맞추는 일종의 체계를 형성하며, 막스 베버는 이를 '철장'이라는 유명한 표현으로 묘사했습니다. 프랭클린이 저술한 것처럼 '왕관을 파괴하는 자는(예: 생산적이지 않은 것에 돈을 낭비하는 행위) 그 왕관이 생산할 수 있는 모든 것, 어쩌면 수십 파운드를 파괴한 것과 마찬가지다.'와 같은 맥락입니다.
자유에 대한 프랭클린의 생각 역시 실용적이었습니다. 그는 미국인들이 생산한 제품을 스페인 식민지에 직접 판매할 수 있는데도 영국으로 보내 영국 중개인이 재판매하게 하는 것은 비합리적인 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는 과학에도 관심이 많았습니다. 그의 연을 활용한 실험이 피뢰침 발명으로 이어진 것은 유명한 일입니다. 이중 초점 안경, 수영용 오리발, 더 효율적인 벽난로, 카테터, 아르모니카(물잔을 이용한 악기)를 발명하기도 했습니다. 아르모니카 외의 이러한 발명품들을 보면 실용적인 물건을 만드는 데 프랭클린이 호기심과 관심을 가졌음을 알 수 있습니다.
프랭클린은 다른 많은 '건국의 아버지들'과 달리 비교적 출신이 평범했기에 절약과 근면의 개념에 많이 의존했던 것 같습니다. 1706년 보스턴에서 태어나 정규 교육을 제대로 받지 못한 프랭클린은 1723년 필라델피아로 이주한 후 인쇄 사업을 시작하여 부를 축적했습니다. 교육을 많이 받지 못했음에도 불구하고 글을 잘 썼기 때문에 보스턴에 있는 형의 신문에 에세이를 실었으며, 펜실베니아 가제트를 발행하여 필라델피아에서 그 전통을 이어갔습니다. 그의 초기 삶에서 가장 유명한 작품이자 건전한 조언과 더불어 자신의 트레이드마크인 영리한 산문이 특징인 가난한 리처드의 연감을 출판했습니다.
프랭클린은 필라델피아의 자원 봉사 소방대, 경찰 순찰대, 철학 학회, 펜실베니아 대학교 등을 설립하는 등 개인 생활도 소홀히 하지 않았습니다. 1737년에는 필라델피아의 우체국장이 되었고, 1753년에는 모든 식민지의 우체국장이 되었습니다.
영국은 결국 프랭클린의 반항적인 성격을 의심하게 되었는데, 여기에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습니다. 1734년 초, 프랭클린은 13개 식민지 간의 통합 정부를 제안하는 올버니 플랜을 만들었는데, 이는 나중에 등장하는 연합규약과 유사한 형태였습니다. 프랭클린은 결국 런던에서 펜실베이니아를 대표하여, 식민지 혁명의 원인이 된 인지조례와 같은 악명 높은 경제법에 반대하는 집회를 열었습니다.
프랭클린은 현학적이고 까다로운 사람이었지만, 항상 청중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습니다. 밤에 창문을 열어 둘 것인지에 대해 존 애담스와 몇 시간 동안 긴 논쟁을 벌이며 싸웠다는 이야기는 아직도 유명합니다. 프랭클린의 유머가 돋보이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영국이 죄수를 미국에 정착민으로 보내는 것에 대한 논쟁을 하자, 프랭클린은 그저 그 대신 미국 죄수를 영국으로 보내겠다고 제안한 것입니다.
프랭클린의 공헌 중 가장 위대한 것을 꼽자면 독립선언문 초안 작성을 도운 일이 있습니다. 독립 전쟁 중에 그는 프랑스에서 미국을 대표하여 프랑스의 참전을 독려하는 로비를 벌였는데, 사실 프랑스가 참전한 건 프랭클린의 외교술이 빛을 봤다기보다는 영-불 경쟁 관계와 더 관련이 있었을 것으로 보입니다.
결국 프랭클린은 미국 통치 철학의 창시자로 잘 알려져 있으며, 본인의 유머 감각과 지칠 줄 모르는 헌신을 통해 임무를 수행했습니다. 그는 새로운 미국의 정부 형태를 '유지될 수만 있다면 공화국'이라고 묘사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그 공화국이 유지될지는 두고 볼 일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