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미테란트 공화국은 대륙력 2064년 현재 약 42,560,000명의 인구를 가지고 있으며, 인구밀도는 ㎢당 약 130명이다.광역성비조절마법 자체는 독립전쟁 발발 이후인 대륙력 2038년에 작동이 정지되었으나 그 영향은 아직도 남아 있어, 26년이 흐른 지금까지도 아직 여초상태가 무너질 기미는 보이지 않고 있다. 그나마 신생아의 성비가 완만하게 계속되고 있어서 2064년 현재의 신생아 성비는 1:12 선이며, 2080년을 전후한 시점에는 신생아 성비 1:1, 전체 성비 1:3 ~ 1:4를 회복할 수 있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이와 같은 남성의 부족과 핵가족이 불가피한 사회구조 때문에 미테란트의 여성 출산율은 합계 출산율 기준으로 1인당 1.05~1.1명을 넘지 않아 매우 낮은 편이다. 따라서 현재 인구는 독립전쟁 중에 한 차례 증가세를 보인 이후 지난 20여 년 동안 사실상 변동이 없거나 미세하게 감소세를 보여왔다. 그러나 일단 성비가 정상에 가까워지면 가까워질수록 인구증가율 역시 완만하게나마 상승하리라고 예측되고 있다.
2. 인종구성 및 분포
미테란트 공화국을 포함해서 대륙에는 외견상으로 확실히 구분되는 다수 인종과 유사인류가 존재한다. 이중에서 우리 세계의 코카서스 인종에 해당하는 백인종이 현재 작중 배경이 되는 대륙 동부 인구의 거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그 외에 연합왕국과 구 에쉬르 제국을 거쳐 유입된 소수 황인종이 공존하며, 아울러 네 가지 소수인종이 미테란트 공화국 영내에 상당 규모로 분포하고 있다. 이중 엘프(Elf), 즈베르그(Zwerg), 호빗(Hobbit)의 세 인종은 보통 유사인류로 취급되지만 실은 코카서스 인종의 아종으로 유사인류라고 하기 어렵다.유일하게 오크(Orc)만이 진정한 의미의 유사인류로서, 인간과 유전적으로 혼혈 자체가 되지 않는, 인간과는 속에서부터 갈라지는 유사인류이다. 작중에서는 네안데르탈인같이 생겼다는 이야기가 나왔지만, 실제로는 그보다 오래된 원인, 정확하게는 호모 에렉투스가 더 진화한 것이다. 김한얼이 네안데르탈인으로 착각한 것은 한얼의 고생물학 관련 지식수준이 충분치 않기 때문에 벌어진 일이다.
(미테란트 공화국의 현재 인구 구성)
인종 | 인구 |
인간 | 약 38,000,000 |
엘프 | 약 3,000,000 |
호빗 | 약 1,300,000 |
즈베르그 | 약 400,000 |
오크 | 약 400,000 |
위 표는 미테란트 공화국 전체의 통계이고, 각 지역별 인종의 구성비율로 들어가면 각 주의 지리적 여건에 따라 어느정도 비율이 달라진다. 이는 대부분 각 인종의 고유문화에 따라 각각 선호하는 거주 환경이 달랐던 데 기인하는데, 대체로 숲이 많은 동부와 중부주에는 엘프가, 지하자원이 많고 지형이 험준한 북서부주 일대에 즈베르그와 오크가 상대적으로 많이 거주한다. 그러나 어느 지역이건 보통 백인종의 거주 비율은 거의 90%에 육박하며, 남부 일대는 거의 100%에 달하고 기타 인종은 거의 찾아볼 수 없다.
특이사항으로 소수인종 중 호빗은 거의 북부지역에 집중 거주한다. 이는 원래 아틀리아 지역에 주로 거주하던 호빗 상당수가 아타만 제국의 아틀리아 침공을 피해 고향을 등지고 피신하면서 가능한 한 고향 근처에 살기 위해 미테란트 연합왕국 북부 산악지대에 개척농민으로 정착한 것에서 기인한다.
이후 미테란트 연합왕국 북부지역이 아타만 제국에게 분할 점령당하면서 일부가 호빗 인종의 보호자를 자청한 에쉬르 황제의 보호를 받기 위해 미테란트 서부로 이주했지만 그 수는 그리 많지 않다. 이 시점에선 폭식하는 대신 부지런히 일하고 농업에 천부적인 재능을 가지고 있다고 여겨지는 호빗 인구의 유출을 방치하는 것이 아타만 제국의 국익에 합치되지 않는다는 것이 확실해졌기 때문이다.
3. 프리덴란트(Friendenland)
프리덴란트는 옛 미테란트 연합왕국의 구성 영방국가들 중 이름이 언급된 단 두 개 영방국가[1] 중 하나이다. 프리덴란트는 북서부주와 서부주의 경계선에 걸쳐 있으며, 미테란트 연합왕국 내에서는 가장 큰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던 영방국가이다. 국호는 미테란트 연합왕국 시기 자신들이 미테란트 연합왕국의 자유를 수호하는 방패막이라고 자부하여 자국을 ‘자유의 땅’이라고 일컬으면서 확정된 것이다. 또한 프리덴란트 지역 출신자나 그 후예는 미테란트 국민임과 동시에 프리덴란트 사람을 자처하곤 한다. 이는 프리덴란트가 미테란트 연합왕국에서도 가장 큰 영향력을 가진 영방국가였음과 동시에, 미테란트 연합왕국의 각 구성국들과는 비교적 이질적인 민족에 그 뿌리를 두고 있기 때문이다.프리덴란트는 원래 에쉬르 제국이 성립하기 전 동방에서 유래한 기마민족들이 건국한 국가이다. 말하자면 우리 세계의 헝가리와 비슷하다고 할 수 있는데, 미테란트 연합왕국의 구성국들 중에서는 가장 먼저 국가체제를 갖춘 케이스. 따라서 미테란트 연합왕국 건국 초기에는 상당 기간 맹주국으로서의 지위를 지켰다.
특히 프리덴란트는 대륙 서부의 대표적인 유사인류인 오크 거주지와 겹치고, 아울러 기마민족이라는 특징이 함께 작용해서, 용병인 오크 보병과 시민 중장기병, 그리고 귀족 기사단의 조합으로 강력한 군사력을 보유한 것으로도 유명했다.[2] 특히 비슷한 시기 건국된 에쉬르 제국에 의한 서쪽으로부터의 침공을 막아내는 든든한 방패로서의 구실을 오랫동안 수행하기도 했다.
그러나 미테란트 연합왕국이 건국 이후 안정기를 맞이하고 우리 세계의 르네상스 시대와 같은 수준의 문화 및 산업이 싹트자 순수 군사국가에 가까웠던 프리덴란트는 자연스레 경제적으로 낙후되기 시작했다. 이 때문에 미테란트 연합왕국의 최대 중흥기였던 대륙력 16세기 무렵에는 사실상 미테란트 연합왕국과 에쉬르 제국 중 어느 편에 설 것인가를 가늠할 정도로 사실상 미테란트 연합왕국 내에서도 이단적인 위치에 서게 되었다. 이에는 프리덴란트가 미테란트 연합왕국 중에서도 유일하게 공화국 체제였다는 것도 어느 정도 작용했다.
그리고 그 결과, 에쉬르 제국의 미테란트 연합왕국 침공에서 프리덴란트는 미테란트 연합왕국을 배신하고 에쉬르 제국 편에 섰다. 이때 에쉬르 제국군의 선두에 섰던 프리덴란트 시민군 및 귀족 기사단과 정면으로 격돌했던 것이 바로 에스칼로프 공작령 기사단이었고, 작중에서 나오는 이오니아와 미하엘 기피에는 이때의 원한도 아주 약간이지만 작용하고 있다.
하지만 미테란트 분할점령 과정에서 프리덴란트는 민족적, 그리고 정치적 이유로 에쉬르 제국에게 배신당했고[3] 오히려 적극적으로 프리덴란트에 맞서 싸웠던 에스칼로프 공작령보다도 나쁜 대우를 받았다. 이 때문에 프리덴란트는 한 차례 에쉬르 제국에 반기를 들었고, 이것이 최초의 미테란트 독립 시도 사례였으나 예전 배신의 앙금 때문에 미테란트 전역에 걸친 호응이 없어 참패하고 말았다. 심지어 프리덴란트 반란 토벌에 재건된 에스칼로프 공작령 기사단이 가장 열성적으로 참여했을 정도다.
이후 프리덴란트는 이중의 배신이라는 멍에를 짊어지게 되어 오랜 기간 동안 미테란트 독립주도세력에게도 에쉬르 제국에게도 백안시되었다. 프리덴란트가 미테란트 독립주도세력과 본격적으로 화해한 것은 광역성비조절마법에 의해 미테란트 전역이 막대한 피해를 입은 뒤의 일이었고, 그 이후에도 오랫동안 프리덴란트 출신은 알게 모르게 따돌림을 받았다. 특히 미테란트 서부에서의 따돌림은 강도가 상당히 심해서, 중부 유럽에서 유대인이 받았던 것과 비슷할 정도였다.
그 때문에 프리덴란트는 집단 차원에선 적극적으로 미테란트와의 화해를 도모했으며, 그러면서도 개인 차원에선 따돌림에 대한 반발로 옛 풍습을 지키는 데 집착하는 경향도 함께 보이게 되었다. 그나마 독립전쟁 발발 직전을 전후해서는 민족주의를 거의 벗어던질 수 있게 되었고[4], 독립전쟁 전후세대에 이르러서는 프리덴란트 사람으로서의 정체성에 집착하는 경우를 찾아보기가 매우 어렵게 되었다.
4. 종교
미테란트 공화국을 비롯한 대륙의 종교는 고유 종교를 가지고 있는 아타만 제국을 제외하고는 원래 에쉬르 신화에 기반을 둔 다신교가 대세였으며 특히 천신숭배가 강했으나, 대륙력 12세기를 전후해서 전반적으로 퇴조하기 시작, 일시적이긴 하지만 엘프들 사이에서 처음 발생했던 유일신 구세주 신앙으로 대체되었다. 그러나 이 유일신 구세주 신앙 역시 미테란트 연합왕국의 멸망을 전후해서 빠르게 기세가 껶여, 현대에 이르러서는 사실상 종교 자체가 사멸한 상태이다. 다만 이 시기에 정의된 종교적 단어 일부가 현대 언어에까지 살아남아있다.특이하게도, 즈베르그와 오크 중 일부는 에쉬르 신화에 근거한 종교적 가치관[5]을 아직 유지하고 있으나, 여기에서도 특별히 종교적인 의미를 찾을수는 없이 그저 전사계급을 중시하는 종족 특성 때문에 관습 수준으로 살아남은 것에 불과하다.
5. 가족 및 성문화
5.1. 기형적 성비에 기인한 가정관의 변화
미테란트 공화국은 약 300년에 걸쳐 강제적으로 여초상태를 유지해온 역사를 가지고 있다. 이는 인류 사회의 일반적인 가정구조랄 수 있는 부계 혈통에 기반을 두는 가부장제를 실행할 수 없는 결정적 원인으로 작용, 현재의 미테란트 공화국에서는 실질적으로 가부장적 가족구조가 성립하지 못한다. 이런 문화는 미테란트 전반에 걸쳐 귀족층을 제외한 평민층의 성씨 사용이 아직 보편화되지 않고 있던 시점에서 국체를 잃은 데 이어, 시민계급의 등장과 성씨 지칭이 본격화되던 시점에 광역성비조절마법의 폐해로 남성 인구의 급감이 발생한 탓에 성립되었다.사실 남성 인구의 급감 이전에도 미테란트 문화권은 전반적으로 모계가 가정내에서 차지하는 입지가 매우 높은 편이었다.[6] 그런 상태에서 남성층이 빠르게 소멸하고 정치, 경제, 사회적 주도권이 부득이하게 완전히 여성의 손에 들어가면서 가부장적 가정구조를 구축할 이유는 물론이고 수단조차 없다시피 하게 되자[7] 자연스레 모계를 중심으로 하는 새로운 가족구조가 형성되었다.
또한 지배국의 식민지배로 형성된 착취구조는 부득이하게 미테란트의 노동생산성이 극대화되는 방향으로 나아갈 수 밖에 없었다. 이는 미테란트 사회 전반을 산업화 구조에 알맞는 형식으로 변화시키는 결과를 가져왔고, 결과적으로 미테란트 문화권은 대륙의 다른 국가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빠르게 농경 중심의 대가족주의에서 벗어나 지역사회 및 인적 커뮤니티 내부에서 제공하는 비교적 충실한 관습적 사회보장 시스템을 바탕으로 유지되는 핵가족 체제를 갖추게 되었다. 또한 청소년의 사회진출연령을 크게 앞당기는 부수적 효과도 불렀다.
이런 환경은 결국 가문 승계 및 이에 수반하는 재산 상속의 문재에서 남성이 절대적으로 취약한 입장에 놓이는 것을 피할 수 없게 만들었다. 그리고 이는 그저 사회적 입지에서만이 아니라 성문화에서 까지도 남성이 소극적인 입장에, 여성이 적극적인 입장에 서게 되는 결과를 불렀다.
이런 상황 하에서 남성의 사회적 지위는 급락하기 십상이었다. 그러나 남성 없이는 국민 자체가 존재할 수 없으므로 기형적 성비, 그리고 식민지배 시점에서 확실하게 발전하기 시작한 각종 정치 · 경제 · 문화적 사상기조들이 복합적으로 작용하여 적어도 여성에 의한 남성의 일방적 비하만은 간신히 피할 수 있었다.
그 결과, 우리 세계의 18세기에 해당하는 대륙력 19세기를 전후한 시점에서 현재의 미테란트 문화권 가족구성방식이 확립되었다. 기본적으로 가문의 승계는 모계를 통해 이루어지며, 일부 귀족가문을 제외하고 성씨는 중시되지 않으며 모친의 이름을 성씨로 사용하거나 아예 성씨를 사용하지 않는 것이 일반적이 되었다.
이 기간동안, 남성이 사회적 지위는 일반적으로 절대강자로서의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여성에게 일단 동등한 수준으로 보장받았다. 그럼에도 상대적인 약자라는 사실만은 변함이 없었다. 특히 재산 문제가 심각하여 최소한 노후 생활에서는, 일부 경우 청 · 장년기에도 상대적으로 숫자가 많고 경제력 역시 우세한 여성 또는 사회보장제도에 의존[8]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이는 대륙력 19세기를 전후해서 남성의 전반적 나약화로 이어지면서 평균연령의 급감까지 이어져서, 한때 심각한 사회문제로 대두되는 지경에 이를 정도였다.
그런데 이런 문제를 극복할 수 있는 수단은 경제적 자립, 아니면 심리적인 차원에서의 정신승리(…)밖에 없었다. 이런 현실 앞에서 미테란트의 남성들은 결국 자포자기 아니면 스스로가 여성들 보기에 부끄럽지 않은 자체 역량을 쌓아야만 한다는 현실 인식에 도달했다. 당연한 말이지만 이중 자포자기를 선택한 남성은 당연히 도태를 피할 수 없었다.
아무리 사회적으로 여성이 독립한 생활을 할 수 있다고 하지만, 배우자는 아니라도 자신의 자녀를 낳기 위해 무능하고 무기력한 남성을 선택하고 부분적으로나마 그 노후까지 책임질 정도는 아니었다. 더구나 식민지배 국가 출신의 남성이라는, 권력 측면에서 절대적인 우위를 점하고 있는 경쟁자까지 존재하는 이상 남성들로서는 생존을 위한 투쟁에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을 수 없었다. 그 결과, 결국 남성들 역시 스스로의 생존을 위해 일정한 수준 이상의 자립도를 항시 유지하게 되었으며, 피나는 노력의 결과 사회의 몇몇 분야[9]에서는 여성을 거의 구축하다시피하는 수준에 이르렀다.
대신 전반적인 남성 유전자 풀의 위축은 더욱 심해져서 처음엔 5%대를 유지하던 성비가 결국 3% 이하로까지 감소했다. 특히 원래 문화적 측면에서 가부장적 요소가 비교적 강하게 남아있던 서부 3개 주 일대는 남성 인구 감소가 특히 심해서, 해당 지역은 현재까지도 성비가 1~2% 수준에 불과하고, 이 지역의 신생아는 주로 외지 남성과 현지 여성 사이에서 태어나고 있을 정도다.
5.2. 기형적 성비 하에서의 성문화
이처럼 남성이 드문 사회적 특성 때문에 성문화, 특히 이성간의 성적 파트너 선정에 대한 기준과 각각의 사회적 구도 역시 일반적인 양상을 크게 벗어난 양상을 보인다. 일단 과도한 성비 문제로 결혼은 사실상 불가능하며, 사회적 일부다처제조차 성립할 수 없다. 결국 생물학적 차원의 난혼성 일부다처제만이 현실에서 성립하는 유일한 시스템이다.[10]그러나 다양한 외부 요소가 작용한 결과 굳어진, 남녀평등이 기본적으로 보장되는 사회적 특성이 부분적으로 작용하여, 생물학적인 난혼성 일부다처제 시스템 하에서의 파트너 선정에서 제한적이지만 사회적 일부다처제 요소가 적용되곤 한다. 특히 남성 한 사람과 관계하는 여성이 같은 조직사회의 구성원으로 서로 일정 수준 이상의 친분을 갖고 있는 경우가 상대적으로 많으며, 이는 자매형 일부다처제(Sororal Polygyny)에서의 결혼대상 선정과 유사한 측면을 갖는다.[11]
또한 성적 결정권, 특히 파트너를 선정하는 과정은 양성의 평등이 비교적 보장되고 있지만, 선택권을 잡는 경우는 소수자인 남성인 경우가 많다. 물론 남성이 내키는 대로 여성과 관계를 갖는다는 것은 아니며, 보통 성적 다수자인 여성의 적극적인 어필을 성적 소수자인 남성이 받아들일지 말지 여부를 결정하는 선에서 그친다.
이는 미테란트의 남녀관계에서 자매형 일부다처제적 요소가 가장 크게 작용하는 부분이기도 하다. 즉, 남성이 어떤 한 여성과 성적 관계를 갖게 디면서, 주로 사회적으로 같은 조직에 속한 다른 여성들 역시 해당 남성의 잠재적인 성적 파트너로서 부각된다는 것이다. 이에는 해당 조직 내에서 그 남성과 처음으로 성적 관계를 가진 여성에 의해 확산되는 경향이 있는데, 자신보다 위계서열상, 또는 연령상 하위의 동성들에게 자신의 성적 파트너를 소개하는 경향을 띤다.
이런 특성 때문에 미테란트 여성에게는 질투라는 개념 역시 아예 없지는 않아도 자유연애가 전제인 그 어떤 개방적 문화권과 비교해도 크게 옅은 편이다. 특히 남녀관계에서 결혼 개념이 배제됨으로서 남녀간의 연애에서 재산 문제가 차지하는 비중이 급감하고, 또한 남성의 공유 필요성에 대한 인식이 개인의 이성적 차원을 넘어 거의 집단행동원리로까지 비화되어 있기 때문에, 남성이 기존 집단 외부로부터 새로운 여성을 유입시킬 경우 오히려 환영하는 경향마저 엿볼 수 있다.
한편 극단적인 성비 불균형은 그저 난혼성 일부다처제의 정착에서 그치지 않고 양성애의 보편화까지 함께 초래하고 있다. 일단 여성 동성애는 사실상 터부가 없으며, 다만 인구 문제 때문에 사회적 측면에서는 여성 동성애자도 일단 남성과의 관계를 통해 자녀를 두는 것이 일반적인 인식이다. 또한 이성애자인 여성도 성적 욕구를 달래기 위해, 또한 동성이 지나치게 많다는 사실에 역시 자극 요소로 작용해서 대부분 동성애적 심리, 많은 경우 실제 경험까지 갖게 되는 편이다.
이는 이성과의 성적 관계를 갖게 된 뒤에도 이어지는 경향이 크며, 이 때문에 남성 1인과 여성 다수 사이의 집단성교 역시 드물지 않고 이에 대한 터부 역시 딱히 없다. 이에는 앞서 언급된 자매형 일부다처제 시스템과 유사 근친상간 요소가 병행 작용하며, 상당히 높은 빈도로 여성의 성적 판타지로서 의사 자매 내부에서 은연중에 조장되기도 한다. 단, 이와 반대되는 현상, 즉 남성이 수적으로 다수를 점하는 양상의 집단성교는 남성의 부족이라는 명백한 한계 때문에 거의 발생하지 않는다.[12]
한편 남성 동성애는 기본적으로 터부시되지만, 지나치게 많은 여성 때문에 역으로 자극을 받아 남성 동성애에 눈뜨는 경우도 적지 않다. 단 남성 자체가 성적 소수자라는 입장 하에서 그나마도 절대적으로 소수일 수 밖에 없는 동성애자의 특성상 기본적으로는 이성애자로서 생활하며, 전체 남성의 1% 이하인 순수 동성애자 역시 여성 동성애자와 마찬가지로 최소한의 이성관 성관계는 거의 의무적으로 가짐으로서 양성애자로 살아가고 있다.
근친상간 문제에 이르러서는 사전적으로는 분명히 존재하는 단어이나 실질적으로는 거의 의미를 갖지 못하고 있다. 남성 인구가 지나치게 적은 이상 부계에서의 근친상간 가능성은 언제나 매우 높은 편이며, 적어도 부계 혈통상 사촌~팔촌 관계 이내의 근친상간은 사실상 피할 방법이 없는 수준이다. 이 문제에 앞서 언급된 자매형 일부다처제 시스템도 원인으로서 어느정도 영향을 끼치고 있다.
이런 문제로, 혈연관계에서 행해지는 근친상간에 대한 터부는 동성애보다도 훨씬 적다. 오히려 너무 당연한 일이기 때문에 성적 판타지로서의 가치조차 사라질 정도이며, 오히려 의사 자매로서의 관계 성립 쪽이 유사 근친상간으로서 더욱 강력한 성적 판타지로 작용하는 지경이다.
단, 이것은 어디까지나 부계 근친, 특히 사촌 이상 팔촌 이내에서의 근친상간에 한한다. 그 이내의 촌수의 근친상간은 약간 복잡한 양상을 띠는데, 일단 남성 인구가 워낙 적기 때문에 쉽게 발생하지 않고, 그나마도 많은 경우 그런 관계라는 사실 자체를 인식하지 못한 체 근친상간 관계에 들어가는 경우가 많아서 쉽게 두드러지지 않으나 일단 근친상간이라는 인식 자체는 존재한다. 특히 모계 남매 사이의 근친상간은 여성 1인이 자녀 1인 이상을 두는 경우가 드물기 때문에 발생 빈도 자체가 매우 낮다.[13]
물론 모계 남매 사이에서도 근친상간에의 터부가 워낙 적은 이상 서로 연애감정을 품는 경우가 생기기는 한다. 다만 서로에게 성적 욕구를 느끼는 경향은 상대적으로 적으며, 실제 성적 관계를 갖는다 해도 일시적인 흥미에 따라 한두 차례 동침하는 데 그치는 경우가 비교적 많다. 대부분의 모계 남매간 근친상간은 플라토닉한 연애관계에 치중하며, 자녀 출산은 더욱 낮은 빈도로 발생한다. 이런 분위기에는 보통 모계 남매 사이의 나이 차이가 6~7년 이상, 심하면 10년 이상까지 나는 미테란트 문화권의 출산 문화가 크게 작용한다.
반대로 부계 남매는 미테란트 문화권 특유의 가족구조 때문에 서로가 부계로서 남매임을 인식하고 잇는 상태라 하더라도 사회적으로는 남매라고 부르기 애매한 관계라는 점 때문에 서로의 연애감정에 따라 자연스럽게 이루어진다. 그나마 많은 경우가 자신들이 부계 남매임도 모르고 넘어가며, 간혹 서로가 부계 남매임을 뒤늦기 인식하게 되더라도 그냥 자연스럽게 현재 관계를 유지하면서 추가적으로 혈연으로의 유대를 쌓아 나가거나, 그조차 하지 않는 경우가 많다.
어쨌든, 이와 같이 남매간 근친상간 관계에 있는 남녀는 서로가 남매임을 인식한 상태라면 유전병 가능성 때문에 자녀를 얻기 전에 자신의 유전병 병력에 대해 어느 정도 가계 조사를 하는 것이 통례이다. 그러나 2대만 거슬러 올라가도 부계 혈통의 추적이 매우 가다로워지는 미테란트 문화권의 가족 특성상 실질적으로 가계 조사의 의미는 없다시피 하다.
한편, 남매간 근친상간에 비해 부녀 및 모자상간은 상대적으로 터부시되는 편이다. 이유는 주로 연령 차이에 기인하며, 통산 패륜에 가까운 아동성범죄로 간주되고 있다. 단 이것은 자녀가 미성년자[14]인 경우에 한하며 만약 자녀가 성인일 경우 성인의 성적 결정권이 보장되기 때문에 남매간 근친상간과 마찬가지로 실질적인 규제는 없다. 그에 비해 모자상간은 발생 빈도에 비해 사회적 터부가 상대적으로 큰 편인데, 이는 보통 과도한 나이 차이 때문에 자녀의 출산에 문제가 생길 수 있어서 생긴 터부지 근친상간이라는 행위 자체가 원인은 아니라고 보인다.
또한 근친상간에서의 동성애는 여성 동성애의 경우 모녀간이든 자매간이든 큰 터부는 없고 적어도 자매간 동성애는 모계에서든 부계에서든 상당히 흔한 편이다. 그러나 남성 동성애는 기본적으로 터부시되고 있는데다가 남성 형제가 존재할 가능성도 적다는 점 때문에 형제상간은 사실상 존재하지 않으며 관계 자체도 비교적 터부시된다. 또한 부자상간은 부녀상간과 마찬가지로 자식이 미성년자라면 아동성범죄로 간주되고, 성인인 경우 실질적 규제는 없으나 역시 터부는 존재한다.
그리고 중요한 것은, 이와 같은 미테란트의 개방적인 성문화는 대부분 자녀의 출산, 즉 미테란트인이라는 민족[15]의 유지 자체를 목표로 한다는 점이다. 즉 미테란트 문화권에서 성적 쾌락 추구는 무시되지는 않아도 그리 중시되지도 않고, 출산과 육아가 크게 중시되는 편이다. 따라서 실제 성적 쾌락 추구라는 측면에서는 동 시기의 외국과 비교해서 오히려 보수적인 경향을 띤다.
또한 이런 특성 때문에 피임은 상대적으로 경시되고 낙태는 아예 금기시되고 있다. 다만 핵가족화를 위해 많은 여성이 자녀를 한 명만 두려는 경향이 크기 때문에 피임 자체가 이뤄지지 않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역시 도구를 사용한 피임은 드물고, 주기조절법을 활용한 피임이 가장 일반적인 피임법으로 사용되고 있다. 그리고 이는 개방적인 성문화에도 불구하고 실제 성적 접촉 자체는 비교적 보수적으로 이뤄지는 데에도 중요한 이유로 작용한다.
그리고 이 모든 것과는 별개로, 여성의 성적 결정권이 비교적 강하고 남성이 매우 희귀한 문제가 모두 겹쳐서, 의외로 많은 여성이 생물학적으로 독신주의를 고수하고 있다. 그저 출산 문제에서만이 아니라 성적 쾌락 추구에서조차 무관심한 경우인데, 이는 미테란트의 기대출산율을 일정 수준 이하로 억제하는 가장 큰 원인이 되고 있다.
이에 대해 국가나 사회 차원에서 가해지는 차별은 전혀 없으며, 개인의 선택으로서 엄격하게 존중된다. 일정 수준 이상의 출산율을 유지하지 않으면 머지않아 국가가 소멸할 수도 있는 상황임에도 이에 대한 특별한 조치가 없는 것은 사회 전반에 걸쳐 전체주의적 성격이 매우 강함에도 불구하고 개인의 자유 역시 대등하게 인정되는 미테란트 문화권 특유의 복잡한 민권의식에 기인한다.
5.3. 미테란트 공화국 독립 이후의 성문화 변동
미테란트 공화국 독립 이전에 정립된 위의 미테란트 문화권 성문화는 독립 이후에도 기본적으로 크게 변화하지는 않았으나, 독립 이후 발생한 새로운 외부 요인으로 인해 작은 변동은 몇 가지 발생했다. 그중 가장 큰 것이 독립전쟁과 전시 베이비붐, 그리고 전쟁고아의 대량 발생 및 영아의 해외 유출 문제에 대한 대책으로 실행에 옮겨진 병역 미이행자의 성적 결정권 제한이다.성적 결정원 제한은 실질적으로는 단순한 사회적 터부, 특히 정부 차원에서 실시하는 일종의 육아정책 캠페인에 불과하다. 그러나 오랜 식민 지배를 거치고 수년에 걸쳐 전 국민의 10% 이상이 희생되는 처절한 전쟁을 치르고 나서야 자신들의 정부를 갖게 된 국가 특성상 국민들의 정부에 대한 충성도가 과도하게 높은 것이 문제가 되어, 그 단순한 육아정책 캠페인의 실제 효과는 예상 이상으로 높은 편이다.
그러나 이성적인 이유로 캠페인에 따른다고 해서 그것에 대해 아무런 불만도 없는 것은 아니어서, 이는 결국 사회적인 성적 억압으로 작용하게 되었다. 특히 성적 호기심이 가장 왕성한 연령대에 이와 같은 비정상적 억압이 가해짐에 따라 독립전쟁 전시 · 전후세대는 성적 호기심 및 성적 접촉에 대한 적극성이 상대적으로 높아졌다.
이에 억압을 피하면서 성적 호기심을 만족하기 위해, 전시 · 전후 세대는 이전 세대보다 높은 동성애 선호도를 보이게 되었다. 아울러 전후세대 전반에 걸쳐 처음 성적 관계를 갖게 되는 평균 연령이 하락하고, 이전의 피임 관련 금기가 제한적으로나마 무너지는 역효과를 부르고 있다.
또한 독립전쟁에 참전한 서부공화국연방 장병들이 미테란트 여성과의 사이에서 얻은 자녀들에 대해 적극적으로 아버지로서의 영향력을 행사하려 하면서 전시세대부터 부계 혈통에 의한 혈연관계 개념이 부분적으로 재조명받는 현상도 함께 발생했다. 이 문제로 부계 자매가 서로를 자매로 인식하는 경향이 두드러지게 늘었으며, 이는 가부장적 개념이 제한적으로 도입은 되어 있으되 실질적으로는 일체의 서열이 없이 상호 대등한 관계인 새로운 가족 개념의 대두로 이어지고 있다.
그런데 이런 새로운 가족 개념의 대두는 근친상간의 사회적 터부가 거의 없던 미테란트 문화권 전체에 걸쳐 가부장적 사회의 근친상간 관련 문호의 유입을 초래했다. 근친상간에 대한 호기심과 성적 판타지가 전시세대를 중심으로 제한적으로 유입되는 현상이 발생한 것이다.
특히 가부장 사회 남성의 성적 환상 영역에 속하는, 근친상간에 대한 금기를 기반으로 발생하는 남매상간 및 부녀상간에 대한 판타지가 미테란트 문화건에 유입되고 미테란트 문화권 특유의, 여성이 자신의 성적 결정권을 적극적으로 행사하는 성문화와 결합하면서 최종적으로는 아버지건 오빠건 남동생이건 가리지 않고 마음에 들면 일단 성적 접촉을 제안하고 보는 경향의 발생으로 이어지기조차 한다.[16]
아울러 미테란트의 개방적인 성문화가 독립전쟁 이후 한층 개방적이 되면서 주변국들에도 한층 과장되어 알려지게 되었다. 이에 주변국 남성 사이에서 미테란트의 여성은 매우 매력적이고 외국인에게 친절하며 성교에 이르러서는 미친 듯이 적극적이기까지 하기 때문에 언제라도 즉흥적인 성교가 가능하며, 그 어떤 변태행위도 기쁘게 받아들인다는 착각으로도 이어졌다.
이는 외국인 여행객의 유입 증가와 함께 각종 변태행위의 유입으로도 이어졌다. 원래 미테란트의 성적 개방성은 앞서 언급했듯 성비의 기형화로 불안해진 인구유동성 문제에 기인하기 때문에 개방성이 곧 성적 쾌락 추구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었고 따라서 변태적 성행위의 빈도 역시 동성외를 제외하면 도리어 낮은 편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이야기가 상당히 달라진 상태다.(…)
또한 위에 열거된 이유들 때문에 성적 쾌락 추구의 빈도가 올라가면서 피임에 대한 관심 역시 늘어서, 특히 안전한 피임방법 개발 소요가 이미 자녀를 양육하고 있는 20대 초 · 중반~30대 초반 여성들 사이에서 제기되고 있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사용되는 각종 피임법 및 피임도구에 대한 거부감은 피임에 대한 관심에 비해 크게 줄지 않았기 때문에, 새로운 개념의 피임법이 요구되고 있다.
이와 같은 요구에 호응하여 몇몇 제약업체에서 합성호르몬을 이용한 경구피임약의 개발에 착수했는데, 이는 군사적 · 사회적 측면에서도 상당한 효용성이 기대되고 있어서[17] 국가차원에서도 상당한 지원이 이뤄지고 있다. 경구피임약의 실용화는 임신 문제로 인한 성적 접촉의 연령제한이 무의미해지는 결과를 부를 것이므로, 아마도 피임약이 등장하고 나면 성문화의 개방성은 한층 더욱 높아질 것이다. 하지만 "이상하잖아요, 그런 거. 서로 사랑해서 하는데 왜 피임도구 따위를 쓰는 거죠?"라는 게 기본 가치관인 동네라는 작가 발언으로 볼때 변화가 생길 때 까지 오래 걸릴 것으로 보인다.
6. 기타 문화
6.1. 식문화
미테란트의 식문화는 기본적으로 오랜 식민지배 기간 동안 유입된 타국의 식문화를 아무 제한 없이 받아들였기 때문에 매우 다채롭다. 이는 실용적인 것, 좋은 것이라면 일단 큰 거부감 없이 받아들이고 보는 미테란트 문화권의 문화적 특성에 기인[18]하며, 이 때문에 기후가 허락하는 범위 내에서는 농업구조까지 상당부분 재편되었을 정도다.물론 식민지배 시기 지배국의 영향을 특히 강하게 받은 경향이 있으므로 주에 따른 지역편차도 있으며, 여기에 연합왕국을 통해 교류를 주고받은 연합왕국 가맹국들의 이국적 식문화도 포함되어있다. 그 결과 현재 식문화는 매우 다양한 식문화가 뒤섞여 혼란스러울 정도이며, 오히려 미테란트 문화권의 고유 식문화는 소수 지역을 제외하면 거의 사멸되었을 정도다.
미테란트 전역에서 일관되게 살아남은 고유 식문화는 대식 문화다. 미테란트 문화권의 전통적인 식사 횟수는 1일 4~5회로, 일일 섭취하는 열량은 평균 2500~3000kcal정도, 육체노동자의 경우 4000kcal 이상이었다. 보통 1800~2500kcal 정도가 적정선이라는 것을 생각하면 과도한 대식이다. 비슷한 수준의 대식문화를 가졌던 조선의 경우 주로 부족한 필수영양소를 쌀의 대량섭취로 커버하던 경향 때문에 발생한 션상이지만, 미테란트 문화권의 그것은 전혀 다른 양상이다. 이쪽은 말 그대로 많은 식사와 다양한 음식의 맛을 즐기는 것이었다. 타 국가의 기록중 "미테란트인들은 대식가다"라는 기록이 상당수 보인다고 한다. 실제로 정찬은 다양한 건 둘째 치고 양부터 무지 푸짐한 것이 딱 남자 군바리 먹성에 맞게 생긴 데다 다 합치면 1인당 한 4천 킬로칼로리를 넘어 보이는 레벨이다.[19]
고유 식문화의 붕괴와 대식 문화 대문에 일부 국수주의적 미테란트 문화사학자들은 "미친 듯한 대식을 제외하고 우리에게 주체적인 식문화는 없다."며 개탄하기도 했다. 그러나 전통적인 대식 문화는 독립 이후 본격적으로 갖춰진 국방체계가 배출한 대량의 예비역들을 중심으로 점차 약화되어, 현대에 이르러서는 적어도 식사 횟수는 다른 나라들과 별반 차이가 없는 수준으로 줄었다.
최근 들어서 이세계, 정확하게는 한국의 식문화도 제한적으로나마 전파되고 있다. 하지만 유독 김치는 아예 전파되지 않고 있다.[20]
6.2. 의복문화
의복 문화는 우리 세계의 유럽과 유사하며, 이는 기후가 비교적 유사한 탓이다. 다만 지역적 특성이 있어서, 온화한 기후, 특히 20℃ 남짓한 연교차와 더불어 여름에도 25℃ 이상으로 잘 올라가지 않는 기후가 의복의 디자인과 구성에 어느 정도 영향을 끼치고 있다.일단 기본적으로 서부의 전통 의복문화는 우리 세계의 슬라브 문화권과 유사하고, 나머지 지역은 중부와 서부 유럽의 것과 유사하다. 이는 각각의 지배국 의복 문화의 영향인데, 서부 지역은 에쉬르 제국의 것이 그대로 전파되었고, 중부와 동부, 남부는 라스니아의 의복 문화가 전파된 것이다. 특히 연합왕국 지배 지역도 의복문화만은 대륙에 소재하고 있다는 특성상 부득이하게 라스니아로부터의 영향을 크게 받았다.
참고로 공화국군 제식 수영복은 연합왕국식 학교수영복, 하계 체육복은 부르마다(…).
6.3. 주거문화
미테란트 공화국의 주거는 대륙 전체와 공통적으로 우리 세계의 중부 유럽의 것과 유사한 기원을 가지고 있다. 단, 미테란트 공화국은 산업화 및 인구의 과밀 집중 현상이 상당히 일찍부터 시작된 관계로 대륙의 다른 나라들에 비해 공동주택이 비교적 발달한 경향이 보이는 것이 특징이다. 일단 각 주의 옛 지배국에 따라 건축양식상 영향 역시 많이 받은 편이어서 지역에 따라 건축물의 외견에는 현격한 차이가 있는 경우가 많지만 건축물의 내장 및 거주 여건은 대체로 공통적이다.또한 대륙 전반에 걸쳐 그나지 춥지 않은 기후 때문에 난방이 크게 중시되지 않아서, 이것이 공동주택의 활성화 경향과 겹쳐서 짧은 혹한기 시점에만 이용하는 급탕 중시의 중앙난방이 일찍부터 발달한 편이다.
이런 중앙난방의 보급은 가정에서의 목욕문화 발달로도 이어졌다. 그 결과 오래 전부터 미테란트 거의 전역에서 목욕문화의 기본이 되었던 온천을 기반으로 하는 공동 목욕문화와, 북부지역에 한정하여 발달했던 한증목욕문화가 공동주택 활성화 과정에서 기세를 크게 잃었다.
특히 공중목욕탕은 이제는 일부 관광지에서만 찾아볼 수 있게 되었다. 남부주와 남서부주 일대에서는 이것의 왜곡된 흔적으로 남녀혼탕이 기본인 대중목욕탕을 간혹 볼 수 있다. 그에 비해 한증 목욕은 지역에 따라 아직도 중요한 목욕 양식으로 남아 있는 곳도 있다.
[1] 나머지 하나는 이오니아의 가문명인 에스칼로프 공작령이다. 차후 작중에서 작위를 가진 귀족의 가문명이 작중에 언급된다면, 그 이름의 영방국가가 미테란트 연합왕국에 속해 있었다는 의미로 받아들이면 된다.[2] 현대 미테란트 육군 기갑부대가 자신들의 직계 조상으로 일컫는 것이 바로 프리덴란트 기병대이고, 미테란트 공군 강하엽병은 프리덴란트 경보병을 직계 조상이라고 일컫는다.[3] 프리덴란트인은 인종적으로는 에쉬르 제국 황실과 같은 동방에서 전래된 유목민족이나, 서로 오랫동안 적대적 경쟁관계에 있었다. 경쟁에서의 패배로 프리덴란트인이 미테란트에 정착했던 것이다. 또한 프리덴란트인들은 에쉬르 제국이 내세웠던 절대왕정제도에 대해서도 부정적이었다. 프리덴란트인들이 그럼에도 에쉬르 제국 편에 섰던 것은 주로 경제적 이유에서였다.[4] 이와 같은 따돌림의 해소에는 프리덴란트인 스스로의 노력과 더불어 미테란트 내부의 분위기 전환도 함께 작용했다. 대륙력 20세기 초반 민족 단위의 차별에 대해 자성하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대륙력 21세기에 접어들어서는 오히려 차별 속에서도 고유문화를 지켜온 프리덴란트 사람들을 경외시하는 경향까지 생겼던 탓이다. 또한 미테란트가 다민족국가임에도 민족 대립이 사실상 없어진 데는 이 프리덴란트 차별에 대한 자성이 크게 작용했다.[5] 주로 천신 우란과 사신 플루토의 관계에 기반을 둔, 죽음을 새로운 탄생의 기반으로서 찬미하는 사생관이다.[6] 미테란트 문화권은 비록 수적으로는 소수지만 문화 및 정치적 영향력에서는 상대적으로 강대한 소수인종인 엘프의 영향을 크게 받아, 가족 내에서의 일방적인 지배구조가 성립하지 않는 경향이 컸고 가사뿐만 아니라 경제활동을 포함한 대외활동에서도 성별에 의한 차별이 비교적 적은 편이었다. 물론 그럼에도 기본적인 가족구조는 가부장제에 가까웠고, 성씨 역시 부계와 모계의 것이 병행 사용되었으며, 업무 부담도 존재하여 전사 계급은 관습적으로 남성이 맡아 왔다.[7] 기본적으로 혈통에 의한 가문 구성은 재산의 세습과 직결되어 있다. 많은 문화권에서 성씨가 귀족의 전유물이었던 것 역시 여기에서 기인한다. 특히 부계 혈통이 재산 세급의 근거로 작용해 왔던 데에는 이런 저런 요인이 공존하기 대문에 딱히 무엇이 현대적인 가부장제의 등장 원인이라고 지목할 수는 없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상속할 재산이 잇는 계급'에서나 중요한 것이었고, 그 이외에는 사실 그리 중요한 문제도 아니었다.[8] 특히 식민지배자 입장에서는 전통적인 전사 계급인 남성의 사회적 약체화를 반길만한 이유가 많았기에 적극적으로 이런 상황을 조장했다.[9] 의학과 예술 분야에서는 남성이 절대적으로 강력한 세력을 구축했다. 특히 의학의 경우 인간 남성이 주축이되는 바람에 부작용으로 마법의학이 크게 위축되는 악영향이 발생하기도 했다. 또한 음악(성악 제외. 성악은 전통적으로 여성이 강세였고 이는 지금까지도 계속되고 있다.)과 미술은 거의 전적으로 남성의 영역이 되었다.[10] 사실 이 부분은 실제 현실에서도 가능한 지는 의문. 물론 소설 설정이야 작가의 마음이니 뭐라 할 수 없겠지만 현실 세계에서 남녀성비가 1:30일 경우 오히려 남성을 차지한 여성은 별다른 걱정 없이 데리고 살 수 있다. 이런 사회에서 경제 주도권은 대개 여성이 쥐고 있는데다 절대다수의 여성들은 역설적이지만 남성에게 관심을 끊게 되기 때문이다.[11] 자매형 일부다처제는 남성이 어느 여성과 혼인하게 되면 그 여성의 다른 자매들에게도 청혼할 수 있는 권리를 얻는 방식이다. 엄밀하게 말하자면 미테란트의 일부다처 구조는 유전적인 측면에선 비자매형이라고 보아야 하나, 사회문화적 측면에서는 자매형이라고 볼 수 있는 여지가 없지 않다.[12] 물론 거의 발생하지 않는다고 해서 아예 없다는 것은 아니며, 다수 여성과의 단일 또는 소수 남성 사이의 집단성교와 마찬가지로 딱히 사회적 터부는 없다. 경우에 따라서는 권력의 상징 또는 자신의 성적 매력이 뛰어나다는 반증으로 여겨져서, 소수 여성에 한해서긴 하지만 다수 남성과의 집단성교가 강력한 성적 판타지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13] 물론 모계 남매 사이에서도 근친상간이 없는 것은 아니다. 특히 주로 서부주 일부 지역에 한한 풍습이긴 하지만 서로 성별이 다른 이란성 쌍생아의 경우 전생에서 사랑을 이루지 못한 연인이 영원히 함께 있기 위해 환생한 것이라는 속설 때문에 성비 기형화 이전부터 근친상간이 사회적으로 보장되었으며 결혼조차 허용되었다. 이런 풍습은 현재까지도 이어지고 있다. 참고로 이 설정은 고대 일본에서 존재했던 것으로 일본판 위키피디아 근친상간 항목에 "내세에서 다시 태어나 부부가 되기로 맹세한 두 사람이라고 여겨, 한 쪽을 양자로 내보내 성인이 되면 타인으로서 결혼시키곤 하였다"는 내용이 있다고.[14] 여기에서의 미성년자는 미테란트의 법적 성년인 16세 미만을 의미한다.[15] 같은 언어와 문화를 공유함에도 미테란트 문화권은 소수 예외를 제외하면 민족을 자처하지 않는데, 이는 미테란트 국민들이 민족이라는 개념 자체에 대해 상당히 부정적인 감정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대륙, 특히 구세계에서의 민족주의는 많은 경우 인종 및 혈연이 중요한 요소로 받아들여지는데, 미테란트 국민은 그 성비 문제 때문이라도 부계 혈통에서의 외부 유입을 무시할 수 없기 때문이다. 단, 오해해서는 안 될 것이, 미테란트 국민들이 부정적으로 여기는 이유는 자신들의 혈통에 외부인의 피가 섞인 것을 부끄러워하는 게 아니라 외부인들이 자신들을 혈통에 따라 분열시켜 각자의 민족에 끌어들이려 드는 것을 우려한 것이다. 이는 노르트란트 전쟁 및 독립전쟁 발발 직전에 각각 현실화될 뻔했다. 단 해당 항목에서만 편의상 민족이라는 표현을 썼다.[16] 물론 이런 경향은 일반적인 것이 아니며, 작중의 혈연히로인들은 이런 이상심리와는 직접적인 연관이 없다. 단, 저런 심리를 자극하는 각종 문화코드와의 접촉이 감정 표출의 원인이 된 경우는 존재할 수 있다.[17] 경구피임약은 여성의 월경을 조정하는 기능도 함께 갖도록 만들어지게 되므로, 월경으로 인한 컨디션 약화에 기인한 능력 저하를 최소화할 수 있게 된다. 이는 군사적 분야만이 아니라 거의 모든 사회분야에서 여성 활동의 제약을 급격히 감소시킨다.[18] 이런 특성은 미테란트가 당시 알려진 대륙의 중앙부에 위치하고 있고 자원 또한 많아서 주변국과의 교류가 매우 활발했던데 기인한다.[19] 한얼의 감상에 따르면 "솔직히 이걸 우리 세계 프랑스인들이 보면 한바탕 뒤집어엎을 것 같다. 이렇게 무식하게 많은 음식을 만들어서 식탁에 내놓는 것이야말로 음식에 대한 모독이라고 말이지. 그리고 몸매에 신경 쓰는 아가씨들은 보기만 해도 기절할 것 같고.(…)"[20] 이는 작가가 김치를 싫어하기 때문이다. 참고로 한얼이 역시 김치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고 한다. 뭐, 이계 생활을 오래 하다 보면 못 견디게 그리워질지도 모르겠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