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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크라이나 그리스 가톨릭의 추기경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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Не існує (사목표어 X)※ | Не існує (사목표어 X)※ | PER ASPERA AD ASTRA (역경을 헤치고 별을 향하여) | Гдѣ. Крѣпость моя (주님은 나의 요새) | НАША НАДІЯ В ГОСПОДІ (우리의 희망은 주님 안에 있도다) | Пресвятая Богородице, спаси нас (지극히 거룩하신 하느님의 어머니시여, 저희를 구하소서) | |
※ 례비츠키 추기경과 셈브라토비치 추기경은 사목 표어 전통 정착 이전인 18-19세기의 인물이므로 공식적인 사목 표어가 존재하지 않는다. | }}}}}} |
제2대 르비우 대주교 및 할리치 관구장주교 | |
<colbgcolor=#005bbb,#005bbb><colcolor=#fff> 제18대 우크라이나 그리스 가톨릭 수장 미하일로 례비츠키 Michael Levytskyi | Миха́йло Леви́цький | |
사제급 추기경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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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774년 2월 17일 |
합스부르크 군주국 갈리치아-로도메리아 왕국 포쿠트야주 란친 | |
사망 | 1858년 1월 14일 (향년 83세) |
오스트리아 제국 갈리치아-로도메리아 왕국 성모안식 대수도원 | |
국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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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제 수품 | 1798년 ??월 ??일 |
주교 임명 | 1813년 9월 20일 프셰미실대교구장 임명 |
1816년 3월 8일 르비우대교구장 임명[1][2] | |
재임기간 | 프셰미실대교구장 |
1813년 9월 20일 ~ 1816년 3월 8일 | |
캄야네츠교구장 및 르비우대교구장 및 할리치관구장 | |
1816년 3월 8일 ~ 1858년 1월 14일 | |
우크라이나 그리스 가톨릭 수장 | |
1816년 3월 8일 ~ 1858년 1월 14일 | |
추기경 | |
1856년 6월 16일 ~ 1858년 1월 14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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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우크라이나 그리스 가톨릭교회의 18대 수장. 2대 르비우 대주교 및 할리치 관구장주교이자 가톨릭교회의 추기경으로, 오스트리아 제국 내 우크라이나 그리스 가톨릭교회의 중심 인물로서 교육, 출판, 민족운동 등 다양한 분야에서 활동하였다.2. 생애
2.1. 초기
미하일로 례비츠키는 포쿠트야 지역의 란친(Lanchyn)에서 태어났으며, 아버지 스테판 례비츠키는 귀족 출신의 그리스 가톨릭 사제였다. 어머니의 이름은 마리야였고, 형제자매는 최소 여덟 명 이상이었다. 미하일로의 형인 흐리호리 례비츠키도 사제가 되어 프리시우치(Prysivtsi) 마을에서 사목하였다.례비츠키는 이바노프란키우스크의 스타니스와브 황립 김나지움을 졸업한 후, 빈에 위치한 성 바르바라 교회 부속 그리스 가톨릭 신학교인 바르바레움(Barbareum)에서 철학과 신학을 수학하고, 1798년 사제품을 받았다. 이어 신학박사 학위를 취득한 뒤 갈리치아로 돌아와, 르비우 신학교의 생활지도 신부, 르비우 대학교의 성서학 및 사목신학 교수로 재직하였다. 1808년에는 르비우 대교구의 참사회원이 되었다.
2.2. 주교 서품 이후
1813년, 례비츠키 신부는 우크라이나 그리스 가톨릭의 17대 수장인 안틴 안젤로비치 대주교에 의해 프셰미실대교구의 교구장으로 서품되었으며, 이듬해 대주교의 신분으로 빈 회의에 참석하였다. 1815년 8월 17일에는 오스트리아 황제 프란츠 2세에 의해 르비우 대주교 및 할리치 관구장주교로 임명되었고, 이는 1816년 3월 8일 교황 비오 7세에 의해 승인되었다. 이로써 례비츠키 대주교는 1816년에 우크라이나 그리스 가톨릭의 18대 수장이 되었다.례비츠키 대주교는 언어학자이자 교육자인 이반 모힐니츠키 신부에게 지시하여 1815년 또는 1816년에『교리문답(Catechism)』과 『슬라브어 초급 교과서(Буквар славенського язика)』를 저술하게 하고, 부다[3]에서 출판하도록 하였으며, 당시 민중이 이해하기 쉽도록 우크라이나어로 저술되었다. 이 새로운『교리문답』은 프셰미실과 르비우 대교구에서 널리 사용되었다.
례비츠키 대주교는 교육과 출판에도 열의를 보였다. 1813년 프셰미실대교구장 시절부터 383개의 교구 학교를 설립하고, 교육을 위한 교과서 출간에도 힘썼다. 1816년에는 프셰미실의 그리스 가톨릭 사제 문화교육회 설립을, 1817년에는 교회서기 겸 교사 양성 기관 설립을 지원하였다. 이반 모힐니츠키 신부와 함께 동갈리치아 지역 학교에서 우크라이나어 수업 도입을 추진하였다. 그는 또한 엄격한 사목 원칙을 세우고, 교육자들과 성직자들에게 높은 수준의 도덕적 책무를 요구하였다.
례비츠키 대주교는 전반적으로 보수적인 성향을 지닌 인물이었다. 그는 대주교직을 수행하며 점차 폴란드 귀족 계층과 정치적으로 가까운 입장을 보였다. 이러한 배경 속에서 그는 루스카 트로이차(Руская Трійця)가 발행한 우크라이나어 알마나크(연감)인 『조랴(Зоря)』와 『드니프로의 인어(Русалка Дністровая)』에 대해 출판 검열을 지지하며, 근대적 사상과 문화운동에 비판적인 입장을 나타냈다. 그러나 1848년 오스트리아 제국 전역에서 혁명운동이 확산되자, 그는 '우크라이나 최고 평의회(Головна Руська Рада)'의 창설을 지지하고, 성직자들이 민중 계몽에 힘쓸 것을 권장하는 등 이전과는 다른 태도를 보이기도 했다. 다만 폴란드 정치 엘리트들과의 관계에서는 마지막까지도 일관된 독립적 태도를 유지하지 못했다는 비판도 존재한다.
례비츠키 대주교는 1839년 러시아 제국이 우크라이나 서부 및 벨라루스 지역에서 동방 가톨릭교회를 폐지한 데 대해 항의 성명을 발표하기도 하였다. 1846년에는 '갈리치아의 수석주교(Примас, Prademate)'라는 칭호를 부여받았는데, 이는 기존에 로마 가톨릭 주교에게만 수여되던 직함이었다. 1856년 6월 16일에는 교황 비오 9세에 의해 사제급 추기경으로 서임되었다.
1858년 1월 14일, 례비츠키 추기경은 리비우의 성모안식 대수도원에서 사망하였으며, 그의 장례는 갈리치아 전역뿐 아니라 빈과 로마 등지에서도 거행되었다. 2008년에는 르비우 대교구 재설정 200주년 기념과 함께 그의 서거 150주년이 기념되었으며, 우크라이나학연구소 주관으로 학술 간담회가 개최되어 추기경의 다양한 공헌이 재조명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