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color=#fff><colbgcolor=#0047a0> 자 | 국서(國瑞) |
본관 | 여흥 민씨[1] |
출생 | 1922년 5월 19일 |
경상북도 청송군 안덕면 명당리[2] | |
사망 | 2018년 5월 16일 |
일본 오사카 이바라키시 아이노 병원 | |
묘소 |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6묘역-22호 |
상훈 | 건국훈장 애족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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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한국의 독립운동가. 1995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수여받았다.2. 생애
민춘기는 1922년 5월 19일 경상북도 청송군 안덕면 명당리에서 아버지 민병철(閔丙喆, 1899년생)과 어머니 함양 박씨(1897년생) 사이의 3남 2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그는 1939년 4월 일본 오사카로 도항하여 관서공학교(關西工學校)·경도성봉중학교(京都聖峰中學校)에 다니면서 경도한국인유민생회(京都韓國人留民生會)에 입회하여 선배들로부터 민족의식을 계몽받으면서 한국 민족독립운동의 중견 지도자가 되기로 결심했다. 1941년 6월 오사카 북구에서 신문배달원으로 일하던 그는 그해 8월 대판공학교(大阪工學校)에 다니는 정규식이 신문배달원으로 고용되자 그에게 민족의식을 고취시켜 한국민족독립을 위해 헌신할 것을 상호 맹세했다. 또한 <한국근대정치사> <삼민주의> 등 민족운동 관련 서적을 탐독하면서 중국현명의 대부 쑨원의 삼민주의에 착안한 민족운동을 전개하여 한국의 삼천만 민중을 자각·분기시키려는 노력을 하였다.
1942년 8월, 민춘기는 최문전(崔文典)이 신문사에 고용되자 그를 동지로 가담시키고, 9월 앵궁공원에서 회합하여 “한국 민족을 해방시키기 위해서는 (중략) 한국 청년층의 의식 선봉분자를 결집하여 독립혁명의 중핵 모체가 될 비밀결사를 조직해서 내외에서 조국 독립에 정진하고 있는 동지, 그 중에서도 만주지방을 본거지로 활동하고 있는 독립군과 연락하고 일본이 대동아전쟁으로 국력을 소모하고 있는 이 호기를 놓치지 말고 한국 민중으로 하여금 독립혁명투쟁에 궐기시켜 일거에 목적을 완수해야 한다”는 근본 방침을 결정했다. 이러한 방침에 따라 동지 획득과 동포에 대한 지도 계몽을 당면 목표로 설정한 그는 오사카 일대 한인 학생들 중심으로 세계 정세와 한국 통치문제를 설파하여 민족의식을 고취시켰다. 이후 1942년 8월 대구사범학교에 재학 중 독립운동을 전개하다 체포되었던 서산옥제(西山玉濟)와 연락하고 9월 상순 동인과 대판에서 회합하여 비밀리에 독립혁명의 중핵 모체인 비밀결사를 조직하려다 발각되어 10월 15일 경찰에 체포되었다.
민춘기는 이 일로 재판에 회부되었고, 1943년 오사카 지방재판소에서 치안유지법 위반 혐의로 징역 3년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르다가 8.15 해방 직후인 1945년 10월 9일 형집행정지로 출옥했다.
8.15 광복 후 니혼대학 경제학부를 졸업했고, 일본 오사카에서 살다가 1995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수여받았으며, 2018년 5월 16일에 오사카부 이바라키시 아이노 병원에서 숙환으로 별세했다. 그의 유해는 2018년 11월 16일 후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6묘역에 안장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