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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907년 8월 7일 경상남도 동래군 기장면 서부리 182 (현 부산광역시 기장군 기장읍 서부리) |
사망 | 1935년 8월 12일 교토시 후시미구 쓰치바시초 373 |
서훈 | 건국훈장 애족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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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일제강점기 부산과 일본에서 활동한 독립운동가.2. 생애
1907년 8월 7일 경상남도 동래군東萊郡 기장면機長面 서부리西部里에서 태어났다.[1]1925년 「우리도 술 담배 끊고서 잘 살아 보자」는 벽보를 만들어 기장 읍내에서 배포하여 동래경찰서에 구금되었다.[2]
1928년 9월 1일 「국제청년의날」을 맞아 동래청년동맹기장지부東萊靑年同盟機張支部의 지부원으로써 동료 김규엽金圭燁과 함께 일본 총독부 통치와 교육에 대한 포스터를 배포했다. 이로 인해 치안방해혐의로 동래경찰서에 검거되어 부산지방검사국으로 이첩되었다. 40여일의 예심을 거쳐 10월 16일 결심공판에서 치와타千綿 검사는 보안법 위반을 구실로 징역 6개월을 구형하였고, 10월 23일 법원은 집행유예 2년을 선고했다.[3][4]
1929~1930년 무렵 일본으로 건너가 도야마시富山市에서 노동운동에 종사하면서 항일투쟁을 전개했다. 일본 전국노동조합협의회 도야마토목건축노조富山土木建築勞組 등에서 활동했다. 당시 일본의 사회주의 노동운동은 한국인과 대만인 등과 연대했다. 그러나 전국노동조합협의회에 대한 일제의 대대적인 탄압으로 인하여 도야마토목건축노동조합도 심각한 타격을 입었다.[5]
1931년 7월 박세용은 동지들과 세 차례 회합하여 호쿠리쿠지부준비회北陸支部準備會를 열어 조합 활동의 정상화를 도모하였고, 같은 해 8월 26일 일본공산당에 입당했다. 전국노동조합협의회 도야마토목건축노조 집행위원으로 라미도야마방적노조ラミ富山紡績勞組 · 호쿠리조선노조北陸朝鮮勞組를 全協勞組로 재조직하면서 동포의 권익을 위해 활동했다.[6][7]
1931년 11월 30일 일경의 일제 검거로 노동조합원 43명이 붙잡힐 때 박세용도 동료 15명과 함께 체포되어 이듬해 2월 10일 기소되었다.[8][9]
1933년 치안유지법 위반 혐의로 징역 3년형을 선고 받고 가나자와金澤형무소에 수감된 박세용은 2년 후 나라奈良형무소로 이감되었다.[10][11][12][13][14]
1935년 6월 늑막염과 폐결핵으로 건강이 악화되어 형집행정지로 출옥했다. 그러나 옥중에 겪은 고초로 후유증을 앓다가 같은해 8월 12일 교토시 후시미구伏見区 쓰치바시초津知橋町에 위치한 박연朴然의 집에서 오후 5시경에 사망했다.[15]
3. 사후
유가족은 노모와 두 여동생이 남아 있었다.[16]2006년 광복 61주년을 맞아 대한민국 정부는 총313명의 독립운동가에 훈.포장을 수여한다고 밝혔다. 이에 따라 박세용 등 99명에게 건국훈장 애족장이 서훈되었다.[17]
4. 기타
- 사촌 형 박세현朴世鉉은 민족학교 명정의숙明貞義塾의 교장이었으며 비밀결사 '기장광복회'의 총무로서 군자금을 모아 국외 독립운동 단체들에게 제공하던 중 1917~1918년 무렵 일본 헌병대에 체포되어 부산형무소에서 옥사했다.[21][22][23]
- 수감생활을 하면서 가족들에게 40여 통의 편지를 보냈고, 편지의 일부를 기장향토문화연구소에 보관하고 있으며 1998년 번역본을 공개했다.[24]
- 2011년 부산광역시 기장군 기장읍 서부리에 박세용의 집터를 확인했다.[25]
- 2017년 박세용을 비롯한 독립운동가들이 고초를 겪었던 나라형무소가 폐쇄되었다. 일본 정부는 해당 건물을 국가 중요문화재로 지정하고 이듬해 2월 관광호텔로 개발하는 사업을 승인했다.[26]
[1]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정보시스템, '박세용'[2] 한국학중앙연구원: 부산역사문화대전, '박세용'[3] '國際靑年日貼紙로 懲役六個月求刑', 조선일보, 1928.10.19[4] '東萊靑年同盟員 執行猶豫', 조선일보, 1928.10.26[5]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정보시스템, '박세용'; 재인용[6]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정보시스템, '박세용'; 재인용[7] 공훈전사사료관, '박세용'[8]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정보시스템, '박세용'; 재인용[9] 한국학중앙연구원: 부산역사문화대전, '박세용'; 재인용[10]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정보시스템, '박세용'; 재인용[11] 한국학중앙연구원: 부산역사문화대전, '박세용'; 재인용[12] 공훈전사사료관, 박세용, 재일조선인관계자료집성, '治安維持法違反に依り起訴せられたる朝鮮人に關する調査'[13] '日共事件의 朴世用永眠', 조선일보, 1935.08.15[14] 당시 박세용 의사의 형량에 대하여 공훈전사사료관과 한국학중앙연구원의 자료는 3년, 독립기념관과 기장문화원의 자료는 6년, 당시 언론은 5년으로 기술했다. 다만 당시 기사에 만기 3개월을 남기고 출옥했다는 내용이 있다. 선고가 내려진 1933년 당시 5년 이상의 형량을 받았다면 출옥한 1935년 기준으로 잔여 형기가 3개월 남았다는 내용에는 모순이 있다.[15] '日本共產黨 朴世用永眠', 동아일보, 1935.08.14[16] '日本共產黨 朴世用永眠', 동아일보, 1935.08.14, 재인용[17] '독립운동 포상자 명단', 동아일보, 2006.08.09[18] 공훈전사사료관, 박세용, 재일조선인관계자료집성, '在留朝鮮人運動'[19] 朴世用(南條, 廣瀨, 磯山, 朴輝一/慶尙南道/富山土木建築勞組合/28)[20] 한국학중앙연구원: 부산역사문화대전, '박세용', 재인용[21]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정보시스템, '박세용'; 재인용[22] 한국학중앙연구원: 부산역사문화대전, '박세용'; 재인용[23] 한국학중앙연구원: 부산역사문화대전, '기장광복회'[24] 한국학중앙연구원: 부산역사문화대전, '박세용'; 재인용[25] 한국학중앙연구원: 부산역사문화대전, '박세용 집터'[26] '독립운동가 숨진 감옥 ‘고급호텔’로…日 교도소, 리조트 재개장', 세계일보, 2023.11.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