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림픽 레슬링 남자 자유형 74kg 금메달 | ||||
케니 먼데이 (1988) | → | 박장순 (1992) | → | 부바이사르 사이티예프 (1996) |
<colbgcolor=#131230><colcolor=#ffffff> 박장순 朴章洵 | Park Jangsoon | |
출생 | 1967년 4월 10일 ([age(1967-04-10)]세) |
충청남도 보령군 (現 충청남도 보령시) | |
국적 | [[대한민국| ]][[틀:국기| ]][[틀:국기| ]] |
학력 | 청웅중학교 (졸업) 대전체육고등학교 (졸업) 한국체육대학교 스포츠과학대학 (체육학 / 학사) 한국체육대학교 사회체육대학원 (체육학 / 석사)[1] |
종목 | 레슬링 |
체급 | 자유형 68kg, 74kg |
신체 | 172cm, 74kg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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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의 前 레슬링 선수이며, 첫 번째로 세계레슬링연맹 명예의 전당에 이름을 올린 한국인이다.[2]2. 선수 경력
1988 서울 올림픽 레슬링 자유형 68kg급에서 은메달, 1992 바르셀로나 올림픽 74kg급에서 금메달, 1996 애틀랜타 올림픽 74kg급에서 은메달을 땄다.1992 바르셀로나 올림픽에서 박장순과 금메달을 놓고 겨룬 선수가 미국의 케니 먼데이였는데, 1988 서울 올림픽 때 74kg급에서 금메달을 차지하였고 박장순에게는 천적이라고 불릴 정도로 매우 강했다. 결승전에서 먼데이와 맞붙은 박장순은 시종일관 치열한 탐색전을 벌이며 호시탐탐 기회를 엿보다가 경기 종료 20초 정도를 남기고 먼데이의 중심을 무너뜨리는 데 성공하여 1점을 선취, 남은 시간 동안 먼데이의 연이은 맹공을 뿌리치며 금메달을 따냈다. 바르셀로나에서 대한민국 레슬링 자유형 대표팀은 최경량급인 48kg급에서 1989년 세계선수권 우승자 김종신에게 기대를 걸었지만 그가 결승에서 북한의 김일[3]에게 패해 은메달을 따서 전망이 어두웠던 것이 사실이었다. 박장순의 경우도 상술한 대로 미국의 먼데이가 이 체급 최강자로 군림하고 있어서 금메달까지 기대하지 않았는데, 박장순이 그 먼데이를 물리치고 정상의 자리에 우뚝 섰다.
3. 은퇴 이후
박장순의 바르셀로나 올림픽 금메달 이후 한국 레슬링 자유형은 이렇다할 간판스타를 배출하지 못해 탈출구가 보이지 않는 기나긴 침체의 늪에 빠져 있다.박장순이 애틀랜타 올림픽을 마지막으로 은퇴한 이후 2000 시드니 올림픽과 2004 아테네 올림픽에서 연속 은메달을 따낸 문의제[4]가 있긴 하지만 판정 논란[5]과 부상 불운[6]으로 인해 우승 문턱에서 잇달아 주저앉았다. 또한 1999년 세계선수권 당시 자유형 남자 -54kg급에서 깜짝 금메달을 따낸 김우용은 이듬해 2000 시드니 올림픽 대표선발전에서 팔이 부러지는 중상을 입어 올림픽에 출전조차 하지 못했다.
문의제의 은퇴 이후 한국 레슬링 자유형은 올림픽 메달은 고사하고[7] 올림픽 출전권을 따내기도[8], 아시안 게임 금메달[9]을 따내기도 힘겨워졌다. 급기야 2020 도쿄 올림픽에는 자유형에서 남녀 모두 올림픽 출전권을 단 1장도 따내지 못했고[10], 2022 항저우 아시안 게임에서는 단 하나의 메달도 따내지 못했다. 2024 파리 올림픽에서도 남녀 모두 1명도 출전하지 못할 뻔했다가 대회 도중 북한 선수의 기권으로 이한빛이 극적으로 출전했다.
4. 평가
격투기 종목(복싱, 레슬링, 유도, 태권도, 펜싱) 역사상 유일무이하게 올림픽 3개 대회 연속으로 결승전에 진출한 대한민국 선수다.[11] 그것도 서양 선수들이 초강세를 보이는 레슬링 자유형에서 올림픽 3번 연속 결승 진출은 심권호의 그레코로만형 최경량급 2체급 그랜드슬램 못지 않는 한국 레슬링 역사에 길이 남을 대단한 기록이다.5. 수상 기록
올림픽 | ||
메달 | 대회 | 체급 |
금메달 | 1992 바르셀로나 | 자유형 -74kg |
은메달 | 1988 서울 | 자유형 -68kg |
은메달 | 1996 애틀랜타 | 자유형 -74kg |
세계선수권 | ||
메달 | 대회 | 체급 |
금메달 | 1993 토론토 | 자유형 -74kg |
아시안 게임 | ||
메달 | 대회 | 체급 |
금메달 | 1990 베이징 | 자유형 -74kg |
[1] 석사 학위 논문: 레슬링 선수의 체중감량이 전문체력 및 심폐 기능에 미치는 영향(1998. 2)[2] 2016년 '명예의 전당' 구성원 15명 중에 박장순 감독이 아시아인으로는 유일하게 포함되었다.[3] 물론 너무나 당연하게도 대한민국의 프로레슬러 김일과는 동명이인이다. 바르셀로나에서 금메달을 딴 김일은 다음 1996 애틀랜타 올림픽에서도 같은 체급에서 금메달을 획득하며, 북한 스포츠 최초로 올림픽 2연패를 달성했다. 애틀랜타에서 그레코로만형 같은 체급 금메달을 딴 선수가 바로 심권호이다. 즉 애틀랜타 올림픽에서는 남북한이 레슬링 스타일별 최경량급을 석권한 셈이다. 공교롭게도 48kg급은 애틀랜타 올림픽을 마지막으로 폐지되었다.[4] 박장순 은퇴 이후 그가 활약했던 체급에서 바로 세계 정상급으로 성장했다. 1998 방콕 아시안 게임에서 금메달을 따낸 직후 아버지가 이미 며칠 전에 돌아가셨다는 비보를 접하고 대성통곡하며 귀국했던 선수로 유명하다.[5] 2000 시드니 올림픽 당시 준결승에서 독일의 알렉산더 레이폴트와 대결했는데, 1대 0으로 앞서있던 종료 10초 전 멋진 허리 태클을 시도하다가 역습을 당해 3점을 내줬다. 한국 선수단이 이의 제기를 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앞서 그레코로만형 -58kg급에 출전한 김인섭의 경우는 상대의 이의제기가 두 번 모두 받아들여져 두 번이나 재경기를 치러야 했다.) 이후 동메달 결정전에서 폴승을 거둬 동메달을 땄다. 그런데 준결승에서 문의제를 이기고 금메달을 딴 레이폴트가 도핑에 적발되어, 금메달을 박탈당해 문의제는 최종적으로 은메달을 받게 되었다.[6] 아테네 올림픽에서 체급을 올려 -84kg급에 도전했지만 무릎이 좋지 않아 결승에서 미국의 '카엘 샌더슨'에게 패했다. 만약 금메달을 땄다면 1988 서울 올림픽에서의 한명우보다 무거운 체급에서 금메달을 차지한 대한민국 선수가 될 수 있었다.[7] 상술한 아테네 올림픽에서의 문의제의 은메달이 현재까지 한국 레슬링 자유형이 올림픽에서 따낸 마지막 메달이다.[8] 2008 베이징 올림픽에 남자 5명, 여자 1명이 출전하였지만 2012 런던 올림픽에서는 남자 2명과 여자 2명, 2016 리우데자네이루 올림픽에서는 남자만 2명이 출전하는 데 그쳤다.[9] 2006 도하 아시안 게임에서 백진국이 금메달을 따낸 것이 현재까지 한국 레슬링 자유형이 아시안 게임에서 따낸 마지막 금메달이다. 특히 2018 자카르타·팔렘방 아시안 게임에서는 레슬링 자유형에서 단 1명도 결승에 진출하지 못했다.[10] 그레코로만형도 김현우가 올림픽 출전권이 걸린 마지막 대회 직전 코로나에 감염되는 바람에 참가하지 못했다. 이로써 그레코로만형에서만 단 2장의 올림픽 출전권을 따내는 데 그쳤다. 이는 6.25 전쟁 와중에 힘겹게 선수단을 꾸렸던 1952 헬싱키 올림픽과 같은 규모이다.[11] 태권도의 경우 올림픽에 3회 연속으로 출전한 대한민국 선수가 황경선(2004, 2008, 2012), 차동민(2008, 2012, 2016), 이대훈(2012, 2016, 2020)이 있다. 황경선은 2004 아테네 올림픽에서 동메달을 받았고, 차동민은 2012 런던 올림픽에서 메달권 입상에 실패했지만 2016 리우데자네이루 올림픽에서 동메달을 받았다. 이대훈도 리우데자네이루 올림픽에서 동메달을 받았다. 유도의 경우 장성호도 올림픽에 3회 연속(2000, 2004, 2008) 출전하였지만 결승 진출은 아테네 올림픽(은메달)이 유일하고, 김원진과 안바울도 올림픽에 3회 연속(2016, 2020, 2024) 출전하였지만 결승 진출은 안바울의 리우데자네이루 올림픽(은메달)이 유일하다. 그 외에 3번은 고사하고 2번 연속으로 결승에 진출한 격투기 종목 선수를 꼽아 보면 유도의 김재엽(1984, 1988), 김재범(2008, 2012), 레슬링의 심권호(1996, 2000), 태권도의 황경선(2008, 2012) 정도다.(2000 시드니 올림픽과 2004 아테네 올림픽 레슬링에서 연속 은메달을 따낸 문의제는 시드니 올림픽에서 당초 동메달을 받았다가 금메달리스트의 도핑 적발로 인해 은메달로 격상된 경우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