풀네임 | 발터 라테나우 (Walther Rathenau) |
생몰년 | 1867년 9월 29일, 베를린 - 1922년 6월 24일, 베를린 |
1. 개요
발터 라테나우는 독일 바이마르 공화국을 이끌었던 주요 정치인이자 사업가다.2. 생애
전력산업에 종사하던 유대 집안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에밀 라테나우는 "일반 전자 회사" (Allgemeine Elektricitäts-Gesellschaft)의 창업자였다. 베를린과 뮌헨에서 공부한 이후, 1915년에 아버지의 사업을 물려받는다. 가정사 탓인지 라테나우는 경제적 자유주의자였고, 독일 제국,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과 프랑스 사이에 관세장벽을 없애는 정책을 주장했다.제1차 세계 대전 시절 연합국들에게 항복하는데 반대했으나 그의 의견은 수용되지 않았다. 바이마르 공화국이 들어서고 1918년부터 횡행하던 아나키즘을 저지하기 위해서는 경제 재건이 시급했다고 생각했다. 자유주의자였음에도 바이마르의 의원내각제를 비판했고, 유대인임에도 나치 독일의 기반이 되는 게르만 민족주의를 지지하는 독특한 행보를 보인다.
1920년 총선에서 낙선하고, 1921년에 외무부 장관으로 임명되어 소련과 관계를 재개하기 위한 라팔로 조약을 맺는다. 하지만 오래지 않아 유대 혈통과 공산주의자들과 외교를 맺었다는 이유로 우파들의 미움을 샀고, 마티아스 에르츠베르거와 비슷한 시기에 극우 민족주의자들에 의해 암살되었다. 안타깝게도(?) 라팔로 조약은 오히려 독일에게 이득이 되면 이득이 되지 손해가 되는 조약이 아니었는데 독일의 기술과 군사 교리가 필요했던 레닌은 상호에 영향을 주는 경제적 조약을 타국과 맺지 않겠다는 내용을 골자로 10만명으로 제한된 독일군 장교들에게 군사 고문단이라는 명목으로 입국하도록 허용해주었다. 이때 러시아로 파견된 독일군 장교들은 기갑 기술과 관련된 훈련을 협상국이 감시망을 피해 효과적으로 할 수 있었고 독일군 재건에 매우 큰 도움이 되었다.
음악과 철학에 뛰어난 재능이 있었고, 시오니즘을 지지하는 글을 신문사에 기고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