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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7-03 18:21:02

배세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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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1897년 4월 11일
전라남도 여수시
사망 1942년 10월 30일
묘소
본관
가족
학력
서훈 애족장

1. 개요2. 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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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

2. 생애

1897년 4월 11일 전라남도 여수군(麗水郡) 남면(南面) 심장리(心長里)에서 태어났다. 1919년 3월 당시에는 전라북도 김제군(金堤郡) 수류면(水流面) 구월리(九月里)에 살면서 농업에 종사하고 있었다. 전주군(全州郡) 전주면(全州面) 읍내 만세시위에 참여하였고, 김제군 수류면 원평리(院坪里) 원평시장에서 일어난 만세시위를 주도하였다.

1919년 3월 2일 김제면 읍내 천도교 교구실을 통해 독립선언서가 전달되었다. 이후 읍내의 많은 주민들이 이를 스스로 배포하고 돌려 읽었는데, 평소 한국의 독립을 희망하고 있다가 만세운동에 참가할 뜻을 가지게 되었다.

3월 13일 전주 읍내 시장에 갔다가 그곳에서 일어난 만세시위에 참여하였다. 이 만세시위에 크게 자극을 받고 수류면으로 돌아와서, 전도명(田道明)·전도근(田道根)·전부명(田富明)·이병섭(李秉燮)·김성수(金成守) 등과 함께 3월 20일 원평리(院坪里) 장날을 이용하여 만세시위를 일으키기로 계획하였다.

3월 20일 오후 6시 무렵 다른 마을 사람들과 함께 원평시장에 나아가 ‘독립만세’를 외치며 시위를 시작하였다. 이때 전날 밤 직접 만든 큰 태극기를 9척 높이의 장대에 달아 들고 만세시위를 주도하였다. 다른 이들은 장터에 모인 군중들에게 독립선언서와 태극기 등을 나누어 주었다. 이에 수백여 명의 군중이 호응해 시위대의 수가 크게 불어났다. 그러나 일제 군경이 출동해 시위대를 강제로 진압하면서 시위 군중은 뿔뿔이 흩어졌고 결국 일제 경찰에 붙잡혔다.

1919년 4월 4일 광주지방법원 전주지청에서 이른바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1년을 받았다. 이에 불복하여 항소하였으나, 같은 해 4월 28일 대구복심법원에서 형이 확정되어 경성감옥에서 옥고를 겪었다. 1920년 4월 26일 영친왕(英親王) 이은(李垠)의 결혼으로 ‘은사(恩赦)’가 이루어져 풀려났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