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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3-09-01 17:12:26

번민

1. 인물2. 용어

1. 인물


(119 ~ 203)

후한 말의 인물로 자는 승달(昇達).

사례 하남군 양현 사람으로 어릴 때부터 배우기를 좋아해 유학을 공부하고 춘추엄씨경을 공부해 많은 책을 읽었으며, 155년에 양왕 유성이 예를 갖춰 초빙하자 벼슬에 나아갔다. 양왕부에서 고결하고 스스로 조심하면서 충성스럽고 정직했으며, 일처리가 신중하고 조리가 있었다.

160년에 효렴으로 추천받지 못하자 양왕부를 떠나 수양에서 고향으로 돌아갔으며, 161년에는 효렴으로 낭중에 임명되었고 162년에는 영창군승이 되었다가 탕거현령으로 옮겼다. 165년에 탕거현에서 근무하다가 모친상을 당하자 고향으로 돌아가 3년상을 치렀으며, 상을 마치고 돌아왔다가 167년에 환제가 죽고 168년에 영제가 즉위하자 두무의 부름을 받아 문희후에 봉해졌고 대장군부의 연사가 되었다.

168년에 두무 등이 환관을 숙청하려다가 실패하고 죽자 당고의 금으로 대장군부에 속한 관리들은 모두 금고되어 관직을 할 수 없었기에 고향으로 돌아갔으며, 184년에 황건적의 난이 일어나고 천하가 어지럽자 가족들을 데리고 파촉으로 이주했으며, 189년에는 주군에서 부르자 병을 칭하고 가지 않았다.

190년에 헌제의 부름에 응하지 않았고 유언 휘하에서 치중종사를 지냈으며, 주에서 정치가 두드러져 주와 리에서는 모두 스승이 될 만한 관리라 했고 이전에 여러 군에서 연사로 벽소했다.

191년에 한가군의 제조종사가 되었고 왕윤이 막료로 불렀지만 장로가 파촉을 오가는 길을 끊고 유언이 스스로 주를 보존하면서 수도로 갈 수 없게 되자 그만뒀으며, 194년에 유언이 죽고 유장이 익주목이 되었고 감녕 등이 반란을 일으켰다가 패하자 유장이 감녕의 잔당을 제어하기 위해 번민의 정치를 중히 여겨 파군태수에 임명했다.

200년에 조위가 반란을 일으켰다가 진압되었고 번민은 반란을 막지 못한 것을 자책해 벼슬에서 물러나 한가현 번가파로 돌아갔으며, 201년에는 조의도위가 되어 병력을 기르다가 포의교위가 되어 마을의 치안을 바로잡는 것에 참가했다. 203년에 85세의 나이로 번가파에서 사망하자 205년에 아들인 번포술이 비석의 글을 지었고 석공인 유성이 새겨 묘비를 세웠다.

2. 용어

번민() 번만(煩懣)이랑 동일한 의미이며, 마음이 번거롭고 답답하여 괴로워하는 것이다. 예문을 들자면, "현실 인식에 대한 나의 번민 = 현실 인식에 대한 나의 답답함" 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