벨파스트 셀틱 FC | |
Belfast Celtic F.C. | |
정식 명칭 | Belfast Celtic Football Club |
창단 | 1891년 |
해체 | 1949년 |
소속 리그 | 아이리시 리그 (Irish League) |
연고지 | 벨파스트 (Belfast) |
홈 구장 | 벨파스트 셀틱 파크 (Belfast Celtic Park) (약 5,000명 수용)[1] |
라이벌 | 린필드 FC - 벨파스트 올드 펌 |
우승 기록 | |
아이리시 리그 (1부) (14회) | 1899-00, 1914-15, 1919-20, 1925-26, 1926-27, 1927-28, 1928-29, 1932-33, 1935-36, 1936-37 1937-38, 1938-39, 1939-40, 1947-48 |
아이리시 컵 (8회) | 1917-18, 1925-26, 1936-37, 1937-38, 1940-41, 1942-43, 1943-44, 1946-47 |
카운티 앤트림 실드 (7회) | 1894-95, 1926-27, 1935-36, 1936-37, 1938-39, 1942-43, 1944-45 |
1. 개요
벨파스트 셀틱은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셀틱과 형제 구단이다. 셀틱과 마찬가지로 벨파스트에 거주하는 아일랜드 이주민을 중심으로 만든 구단이고 가톨릭 신자들이 주가 되었다. 그렇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개신교 기반의 같은 지역 구단인 린필드와 라이벌 구도가 형성되었다. 이 둘의 경기는 글래스고의 올드펌 더비와 비슷하게 "벨파스트 올드펌"이라고 불렸으며, 실제로 셀틱 지지자들은 벨파스트 셀틱을, 레인저스 지지자들은 린필드를 지지하기도 했다.2. 역사
1891년에 창단되어 1949년까지 존속했던 클럽이고, 린필드와 함께 북아일랜드 최강의 클럽이었다. 전성기였던 1935년 이후엔 형님 구단인 셀틱보다 낫다는 소리를 들을 정도로 위력이 굉장했으며, 영국 최강의 팀 중 하나였다. 만약 현재까지 구단의 명맥을 이어가고 있었다면 린필드와 라이벌 구도를 형성하여 지금보다 북아일랜드 축구가 발전했을 것이라고 전망을 하곤 한다.이 구단이 해체되게 된 원인은 다른 여타 구단들이 해체하는 이유처럼 재정난 등의 이유가 아닌 북아일랜드 내에 존재했던 차별 때문이었다. 1948-49 시즌에 열린 린필드와의 경기에서 벨파스트 셀틱이 동점골을 넣자 흥분한 린필드 팬들이 경기장에 난입해 벨파스트 셀틱 선수 7명을 구타하는 사건이 벌어졌다. 이 중 셀틱의 에이스였던 지미 존스의 다리가 부러져 의식을 잃기도 했다. 이 시기는 아일랜드와 영국의 갈등이 극에 달하던 시기였다. 사건 당시 경찰들은 셀틱 선수들이 맞고 있음에도 미적지근한 대응을 하였고, 린필드 구단 역시 성명서를 통해 셀틱에게 책임을 돌렸다. 이에 벨파스트 셀틱은 이러한 차별적인 모습을 보고 자신들은 이런 환경 속에서 축구를 할 수 없다며 해산을 하겠다고 하였다. 이 당시 벨파스트 셀틱은 린필드와 양강 구도를 형성하고 있었기 때문에 영국 내에서도 떠들썩했다. 그리고 시즌 막바지 리그컵 준결승에 올라있는 상태였으나, 동시에 잡힌 미국 투어에 가기 위해 대회에 불참했다. 자신들의 자존심에 상처를 남긴 영국 정부에 대한 항의의 표시였다. 해당 미국 투어에서 만난 팀은 당시 영국 최고의 국가대표팀이었던 스코틀랜드 A팀[2]을 만났는데 2:0으로 제압하여 엄청난 충격을 주었다.
스코틀랜드와의 경기를 마지막으로 구단을 해체했는데, 아일랜드인들을 항상 차별하고 무시했던 영국이었지만 벨파스트 셀틱이 해체하자 "Grand Old Team"이라는 찬사를 보냈으며 현재까지 이 단어는 벨파스트 셀틱을 지칭하는 단어로 쓰이고 있다. 최강자의 모습을 보여주고 축구판을 떠났기 때문에 당시의 임팩트는 엄청났다.
현재까지 "벨파스트 셀틱 소사이어티"라는 이름으로 아일랜드계 축구팬들은 이 팀을 그리워하고 있는데, 최근 여러 아일랜드 사업가들을 통해 부활의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