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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2-26 12:16:14

병자일기

1. 개요2. 내용3. 특징4. 외부 링크

1. 개요

丙子日記. 조선 인조 14년, 1636년부터 인조 18년, 1640년까지 3년 10개월간 정경부인(貞敬夫人) 남평 조씨(南平曺氏)가 한글로 쓴 일기. 원본이 충청남도 공주시 반포면 공암리(성강마을)에 있는 남산영당(南山影堂)에 소장되어 있다.

2. 내용

춘성부원군(春城府院君) 시북(市北) 남이웅(南以雄, 1575년 ~ 1648년)[1]의 부인인 남평 조씨(1574년 ~ 1645년)가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1636년 12월 15일에 황급히 피난길에 올라, 후에 서울 본집으로 돌아오는 1640년 8월 9일까지 매일의 생활상이 담긴 일기이다.

시작은 남한산성에 머물러 있는 남편으로부터 "일이 급하게 되었으니 짐붙이는 생각도 말고 낮밤을 가리지 말고 빨리 청풍으로 가라"는 화급한 편지를 받고 양식을 담은 쌀궤 하나만을 가진 채 피난길에 올랐으나 사방팔방에서 난리가 나 가지고 온 상자마저 땅에 묻어야 하는 긴박한 상황으로 기술되고 있다. 이 당시 남평 조씨는 이미 63세의 나이였다.

1636년 12월부터 계속 남쪽으로 이동한 후 서해안의 무인도죽도(竹島)에 도착하여 정월 달 눈보라 속에서 연장도 없이 대나무를 베어 가까스로 두 간 집을 얽었다. 그 집 아닌 집에서 14명이 생 댓잎으로 바닥을 깔고 은신하였고, 찬밥 몇 숟가락씩 나누어 먹고 내리는 눈을 긁어모아 녹여서 먹으며 버텼다. 이 당시 일기를 보면 피난지에서의 궁핍과 알수 없는 남편의 생사, 언제 끝날지 모르는 전란에 대한 불안함으로 넋을 잃고 눈물을 흘리거나, 가슴 속에 늘 불이 있는 듯하고 정신이 아득해서 더 이상 기록할 수 없다는 등의 내용이 나온다.

이 당시 남평 조씨가 떠돈 지역은 고족골(화성) → 평택 → 신창 → 긴마루(당진) → 서산홍성죽도(보령) → 대흥(예산) → 청양 → 여산(익산) → 유성 → 청안(괴산) → 충주 → 월탄 등이다.

서울로 돌아온 후에는 남편 남이웅이 세자를 시종하며 1년 반동안 심양에 볼모로 끌려가게 되고, 슬하의 4남 1녀를 모두 잃어 적자가 아닌 서자임에도 이목처럼 아꼈던 첩의 아들 두림(斗臨)마저 볼모로 끌려가게 되자 가슴속 응어리와 한을 여과없이 표현하기도 했다.

3. 특징

작자와 창작 연대가 분명한 최초의 여성실기문학으로 병자호란에 대한 민간의 체험을 소상히 알려준다는 데 국문학사적 의의가 있으며, 민속학적으로나 국어학상으로도 중요한 자료로 평가된다.

정치하고 섬세한 여성 정감의 문학적 필치, 난을 만나 버릴 것은 미련없이 버리고 취할 것은 취하는 담대함, 수십여명에 이르는 일행들을 이끌어나가며 보이는 이타적 인간경영의 모습, 빈틈 없이 가산을 일구고 운영하는 리더로서의 모습 등 당대 여성들의 창조적 인생경영 철학을 읽어낼 수 있는 중요한 자료로 여겨진다.

가정에서 가장 중요하게 여기던 제사의 경우 일기 내내 남평 조씨가 이를 주도한다. 난리통에도 친지들이 모두 무사한 것은 조상님의 덕이라 여기는 서술이 일기 곳곳에 있으며, 13세와 25세 때 죽은 두 아들과 창골 며느리, 여주 며느리의 생일과 기일을 철저히 챙겼다. 피난을 마치고 집에 돌아왔을 때도 집안의 신주를 직접 모시고 들어갔으며 일기 내내 시부모와 친정 부모님의 제사를 직접 관할했다.

또한 피난기에는 친인척이나 노비, 관료들로부터 물자를 지원받았고, 귀환 후에는 중앙 관료들과 빈객들이 왕래하는데 이러한 손님치레와 관리를 남평 조씨가 모두 주체자로 나서서 맡는다. 당시 가정운영을 전담하는 리더로서의 모습을 보인다.

농사의 경우 3년 10개월 동안 철저히 농사 운영을 직접 전담했는데, 피난기에는 충주에서, 귀환기에는 서울에 있는 농토의 농사 상황을 관장하였다. 병자일기는 농사일기라 할만큼 농사 상황에 대해 자세히 기록하고 있는데 작업 일자, 농지 이름, 농사 내용, 동원된 인물과 물력, 소출 내용 등을 상세히 기록하였다. 예를 들어 농지명은 충주의 경우 이안 밭, ㅎㆍㄺ당 논, 벗고개 논, 거리실 논 등이고 서울은 동막논, 삼개, 뚝섬 밭 등이었다. 김매기에 동원한 사람의 수는 72명이었고 함경도, 경기도, 서울, 강원도, 충청도, 전라도, 경상도에 있는 남평 조씨 소유 토지를 운영하였다.

전체적으로 병자호란이라는 국가 위란의 시기에 한 여인의 피난 생활을 생생히 기록하고 있으며 당대 삶을 영위했던 수많은 사람들의 생활상을 생생하게 반영하고 있다. 또한 당대 여성이 토지와 노비 등의 물적 자원을 토대로 가정을 운영해나가는 모습을 보여주고, 그 시대 여성들의 인적 네트워크[2]와 인간경영의 모습을 보여주는 자료 중 하나다.

4. 외부 링크



[1] 소북의 영수로 정묘호란 때 순국한 남이흥과 6촌 형제지간이였다.[2] 남평 조씨가 호서 지방으로 피난을 간 이유 중 하나가 여산 지역에 형님 의주댁과 같은 알고 지내는 여성들이 많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