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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0-22 00:39:57

적계여랑

부여적계에서 넘어옴
<colbgcolor=#00A6A9> 백제국 귀족
이름 적계(適稽)?[1]
별명 이케츠히메(池津媛)[2]
직급 우네메(采女)[3]
생몰연도 ? ~ 458년 음력 7월
가족관계 어머니 모니부인

1. 개요2. 관련 기록3. 관련 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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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백제의 인물. 국내기록에는 없고 《일본서기》에만 등장한다.

기록을 종합해보면 개로왕 즉위 이후 일본으로 파견되어 유라쿠 덴노의 궁녀가 되었는데, 이시카와노 타테(石川楯)라는 남자와 불륜을 저지르다 발각되어 458년 7월 화형에 처해져서 사망했다. 이를 소위 우네메(采女) 사건이라 하는데, 이리 불리게 된 것은 그녀에게 우네메의 직급이 주어졌기 때문.

백제 측이 이 사실을 언제 파악했는지는 불명. 다만 일본서기 기록에 의하면 461년 4월 개로왕부여곤지의 대화 기록이 실려있는데, 개로왕은 적계여랑이 화형당했다는 소식을 듣고 일본에 여자를 보내는 걸 금지하고 대신 부여곤지를 일본에 파견해 천황을 섬기게 했다고 서술했다. 아무튼 적계여랑 이후로는 사절로는 남성만 파견하게 된 것이 된다. 적계여랑이 사망하고 3년 뒤, 461년 개로왕은 아우인 부여곤지를 일본에 파견하게 된다.

실제 개로왕의 즉위는 455년의 일인 점을 감안하면, 적계여랑의 도왜 시기는 429년경이 아닌 455년 ~ 458년 사이로 보거나. 삼국사기에서 428년 백제를 방문한 일본 사신의 기록에 주목해 429년에 도왜한 것으로 보기도 한다.[출처]

2. 관련 기록

2년 가을 7월 백제의 이케츠히메(池津媛)는 천황이 장차 동침(同寢)하려는 것을 거스르고, 이시카와노 타테(石川楯)[옛 책에서는 이시카와노 코무라노 오비토(石河股合首)의 조상 타테(楯)라고 한다][5]와 몰래 정을 통하였다. 천황이 크게 노하여 오오토모노 무라야노오오무라지(大伴室屋大連)[6]에게 명하여 쿠메베(來目部)를 시켜 부부의 사지(四支)를 나무에 펼쳐 임시로 만든 시렁 위에 올려 놓고 불에 태워 죽였다.《백제신찬》(百濟新撰)은 “기사년(己巳年: 429년)[7]에 개로왕(蓋鹵王)이 즉위하였다. 천황이 아레나코(阿禮奴跪)를 보내와 여자를 물색하게 하였으므로 백제에서 모니부인(慕尼夫人)의 딸을 꾸며 적계여랑(適稽女郞)이라 하고 천황에게 바쳤다”라고 하였다.
일본서기》 권14 <유랴쿠 덴노>

3. 관련 연구


[1] '적계여랑'(適稽女郞)에는 '챠쿠케이 에하시토'라는 훈이 달려있는데 '챠쿠케이'는 '적계'를 그냥 그대로 음독한 것이고 '에하시토'는 일본어가 아닌 고대 한국어 훈으로 아가씨와 관련있는 단어로 추정된다. 즉 이는 '적계 에하시토'가 되는데 현대어로 바꾸면 '적계(適稽) 아가씨'란 뜻이 된다. 여기서 '에하시토'야 당연히 존칭이고 '적계'는 본명이거나 별명 혹은 존칭을 나타낸 것이 된다.[2] 못(池)의(津, 연결 조사) 여인/공주(媛)라는 뜻이다. '히메'는 딱히 공주에게 한정해서 쓰이던 말이 아닌 여성 귀족에게 일반적으로 주어지던 존칭으로 이케츠히메 또한 당연히 본명은 아니고 일본측에 의해 주어진 별명.[3] '우네메'란 일본 궁중에서 천황과 황후의 식사 등 자잘한 가사를 가까이서 도맡던 궁녀의 직급이다.[출처] 정재윤, 가와치 지역의백제계 도왜인(渡倭人), 동북아역사논총, 2016, p198-200[5] '이시카와'가 성씨에 해당하는 우지, '오비토'는 성씨의 등급을 나타내는 가바네, '코무라'는 이름.[6] '오오토모'가 우지, '오오무라지'가 가바네, '무라야'가 이름.[7] 실제 개로왕의 즉위는 429년이 아닌 455년이다. 《백제신찬》의 기록 오류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