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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5-03-16 04:34:23

6.25 전쟁 학살/인민군과 좌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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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민간인 학살 사망자 수 추산3. 학살 건수 추산4. 목록5. 관련 문서

1. 개요

6.25 전쟁 시기 북한군중공군, 남로당 좌익 세력들은 우익 세력, 정치인, 군인, 경찰, 공무원, 지주, 교사, 자본가, 기독교인[1], 지역 토호 혹은 그들의 가족 및 민간인들을 학살하였다.

진실화해위원회에서는 "적대세력 사건"이라고 지칭한다. 여기서 '적대세력'이라 함은 비단 북한군 외에도 중공군, 남로당, 빨치산, 지방 좌익, 민병대 등 한국전쟁 당시 대한민국이 적대한 공산권 세력 전반을 아우른다. 가령 퇴각하던 북한군이 약 500명의 희생자들을 집단 살해했던 전주형무소 2차 학살 사건의 경우, 진화위에서 지칭하는 공식 명칭은 전주형무소 적대세력사건이다.

2. 민간인 학살 사망자 수 추산

3. 학살 건수 추산

4. 목록

5. 관련 문서


[1] 북한군과 좌익세력은 인천상륙작전 이후 퇴각하면서 집중적으로 기독교인을 학살했다.#[2] 1952년 대한민국 공보처 통계국 「6.25 사변 피살자 명부」에는 59,964명, 같은 해 내무부 『대한민국 통계 연감』에는 122,799명, 1977년 국방부 『한국전쟁사』와 1996년, 2003년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자료에는 128,936명(남자 97,680명, 여자 31,256명)이라고 기재했다(김광동 「6·25 당시 민간인 학살은 대한민국 엘리트 집단 말살 정책」; 『월간조선』 2003. 2.; 김성동·이상흔 「피 묻은 명부가 대한민국에 던지는 질문」, 『월간조선』 2003. 9.; 김진우 「[한국전쟁 60년] (3) 민간인 학살 - 미완의 진실 규명과 해원」, 『경향신문』 2010. 6. 18.; 전경웅 「"국군과 유엔군만 민간인 학살했다"…이런 내용의 文 정부 '6.25 추모 사업'」, 『뉴데일리』 2020. 12. 23.).[3] 사회학자이자 진실화해위원회 상임위원[4] 김동춘 『이것은 기억과의 전쟁이다』, 사계절 2013., 334쪽[5] 미국과 한국의 조사를 토대로 계산한다면, 북한군과 남한의 공산주의 협력자들이 학살한 사람의 수는 대략 20,000~30,000명 사이라고 하지만, 그런 수치의 조사 방법은 의문이라고 보았다.[6] 이 수치에는 1950년 여름 한국에서 인민군과 좌익에 의해 자행된 몇몇 잔학 행위가 포함되었다고 한다(브루스 커밍스 『브루스 커밍스의 한국전쟁』, 현실문화 2017., 261~262쪽). 물론 이와 더불어 브루스 커밍스는 6.25 전쟁 당시 좌익에 의한 학살은 경찰과 우익 청년 단체들을 노린 학살이었음을 강조하지만, 북한군과 좌익이 죽인 수가 10만 명이 아니라 3만 명에 그쳤다 해도 위안이 되지 않는다고 언급했다.[7] 중공군의 학살만 거론할 시[8] 브루스 커밍스는, 2010년에 낸 저서『브루스 커밍스의 한국전쟁』에서 진실화해위원회 조사 자료를 바탕으로 좌익에 의한 학살은 1,100건이었던 반면, 우익이 저지른 학살은 그 보다 더 많았고, 학살 비율로 따졌을때, 좌익의 학살 비율이 우익들의 학살 비율에 1/6 수준이라고 주장했다.[9] 한국 전쟁 시기 지주와 기독교인이 많았던 전남 지역에 좌익의 학살이 집중됐는데 그 중에서도 영광군에서 최대 피해가 났다.#[10] 좌우익의 대립으로 인한 상호 학살. 빨치산과 좌익이 학살을 하고 보복으로 군경이 좌익 시민들을 학살했다.[11] 좌우익의 대립으로 인한 상호 학살. 빨치산의 준동과 저항이 극심했으며 기독교인과 우익시민들이 학살 당하자(이 기사에 따르면 1954명이라고 한다.) 11사단을 중심으로 좌익 시민들을 보복 학살했다.[12] 좌우익의 대립으로 인한 상호 학살이었다.[13] 중공군에게 학살당한 포로들은 2만 9815명 정도로 추정되고 있다.#[14] 6.25 전쟁 시기에만 최대 120,000명에 달한다.# 또한 전쟁 이후에도 이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