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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유네스코에는 이스라엘의 세계유산으로 등재되어 있지 않다. 요르단이 등재 신청을 했고, 유네스코는 별다른 국가 분류 없이 '예루살렘'이라고만 표기한다. | }}}}}}}}} |
1. 개요
히브리어: בְּאֵר שֶׁבַע(베에르 셰바)아랍어: بئر السبع(비르 앗사바으)
오스만 터키어: بلدية بءرالسبع(비뤼세브)
한국어 성경: 브엘세바(공동번역, 개역), 브에르 세바(가톨릭)
이스라엘 남부 관구의 최대 도시로, 네게브 사막에 있다. 구약성경 창세기에 이 도시의 유래가 등장할 만큼 유서 깊은 도시이기도 하다.
주민들은 유대인과 아랍인이 혼재되어 있다. 주로 도심부에 전자, 외곽에 후자가 거주한다.
2. 지리
베르셰바는 매우 황량한 네게브 사막의 한가운데에 자리잡은 도시다. 텔아비브에서 남동쪽으로 115km정도 가면 베르셰바 시내로 들어갈 수가 있고, 거기서 북동쪽으로 120km를 또 가면 예루살렘에 도착한다. 황량한 네게브 사막 한가운데에 위치해 있는 이유는 마실 수가 있는 물이 흐르기 때문이다.네게브 벤 구리온 대학교가 시내에 있으며, 인구가 20만 명을 초과할 만큼 이스라엘 본토에서 8위의 대도시다. 베르셰바 시청의 웹사이트는 히브리어와 영어와 아랍어로 쓰여져 있다.
3. 지명 유래
브엘세바(באר שבע)라는 이름은 히브리어 기원에 흥미로운 중복된 의미를 가지고 있다. 족장이자 성서상에서 원로인 아브라함은 그의 긴 삶 동안 단 한번도 한 장소에 정착해서 머물지 않았는데 양치기로써 변화하는 계절에 따라 그는 도시에서 도시로 몇 달마다 이동하며 방랑했다. 아브라함이 집이라고 지칭한 장소 중 하나는 브엘세바라고 불리는 사막 오아시스였다. 창세기 21장 28절부터, 아브라함은 자신이 남쪽지역에서 가장 강력한 왕인 아비멜렉과 갈등을 겪고 있었다. 아비멜렉의 종들은 아브라함이 양떼를 위해 파놓은 우물을 장악했고, 두 사람은 평화 조약을 맺어서 문제를 해결하는데, 아브라함은 왕에게 일곱 마리의 양을 주었고, 왕은 그 대가로 아브라함을 다시 괴롭히지 않겠다고 맹세했다.오직 히브리어로 이 이야기를 읽을 때에만 왜 그들이 이 우물의 이름을 브엘세바라고 지었는지 말이 된다. 브엘세바에는 두 가지 의미가 있는데 바로 "맹세"(셰부아)와 "일곱개(쉐바)"의 우물(베에르), 즉 앞의 이야기를 요약한 합성어이다. 요약하면 우물을 일곱 마리의 양으로 되찾아 평화를 맹세한 곳이다.
4. 역사
텔 셰바 유적지와 시가지
황무지 한 가운데의 언덕에 우물[1]이 있었기에 기원전 4000년대부터 사람이 살았다. 당시 시가지가 있던 텔 셰바는 도심의 동쪽 외곽에 위치한다. 기원전 1000년 경부터 격자형 도시가 있었고, 행정/상업/군사/주거 구역이 구분되었다. 상고대 시기 유적 중에선 언덕 하단에 암반을 파서 만든 저수조가 두드러진다. 구약에서 이스라엘 왕국은 전성기 시절 베르셰바 ~ 단까지를 지배핬다고 나온다. 신바빌로니아의 침공 당시 파괴된 도시는 기원전 6세기 아케메네스 제국 페르시아 지배 하에 복원되었고, 헬레니즘 시기를 지나 하스몬 왕조 시기에 주요 도시 중 하나였다.
기원전 64년경 로마 장군 폼페이우스는 베르셰바를 유대 주의 남부 거점으로 삼았고, 로마 시기에는 비로사바 (Birosaba)로 불렸다. 헤롯 왕국 시기 북쪽 하르카펫에 유대인 마을이 있었고, 로마 제국기 도시는 나바테아를 견디하는 국경 방어선 (리메스)의 일부였다. 3세기를 전후로 시가지 및 묘지가 확장되는 등 번영했고, 주민들은 아랍계 나바테아인 및 유대인으로 구성되었다. 다만 주요 언어는 그리스어였고, 올리브 기름 및 포도 생산 등이 주요 산업이었다. 4세기 들어 일대는 팔레스키나 테리아 주에 편성되었고, 6세기 기준 약 60 헥타르의 면적에 달했다. 마다바 지도에서 베르셰바는 로마 주둔군이 있는 큰 도시로 묘사되었다. 당시 유적으로 목욕탕 및 주거 유구가 있다.
동로마 제국기 베르셰바에난 최소 6개의 교회가 세워졌고, 그중 중심 성당은 네게브 최대 규모 종교 시설이었다. 그러다 7세기 이슬람 정복 후 도시는 서서히 버려졌고, 교회만이 활용되다가 8세기 이후로는 잊혀졌다. 그렇게 5세기 이상 버려져 있다가 15세기 맘루크 왕조 시기에 베두인 마을이 들어섰다. 당시 유럽인 순례객 파브리는 성지의 최남단 '도시'로 기록했다.[출처]
4.1. 근대
1906년에 오스만 당국의 관청 (사라야) 건물. 1930년대 아랍 여학교를 거쳐 현재는 네게브 미술 박물관으로 활용되고 있다.
그러다가 19세기 말 팔레스타인에 유대인 정착지를 건설하려는 유대인 자본과 영국의 시나이 반도 합병으로 위협받게 된 네게브 일대의 영유권을 확고히 하려는 오스만 제국의 이해관계가 맞아 떨어지면서 현재의 베르셰바의 건설이 시작되었다. 1899년 오스만 정부가 베르셰바의 건설을 지시했지만, 제1차 세계대전 후반인 1917년 호주를 비롯한 영연방군이 베르셰바 전투에 승리하였고, 여세를 몰아 예루살렘을 함락시켜 전후 팔레스타인이 영국의 보호령이 되는 결과로 이어졌다.[3]
오스만 제국과 영국령 팔레스타인을 거치면서 베르셰바는 인구 수천 명 규모의 도시로 성장하였지만 제1차 중동전쟁 이전까지 베르셰바의 인구는 절대 다수가 무슬림이었으며 유대인은 수십 명에 불과했다.
제2차 세계대전 종전 이후 팔레스타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설치된 UN 팔레스타인 특별위원회에서 처음에는 베르셰바를 유대인 지역에 할당하였으나 무슬림이 절대 다수라는 이유로 곧 번복하고 아랍인 지역에 할당시켰다. 제1차 중동전쟁에선 이집트군이 점령하였으나 이스라엘군의 공세로 철수한 이후 이스라엘군이 점령하였고 전쟁 이후 이스라엘에 합병되었다. 세계 각지에서 이스라엘로 이주해오는 유대인들을 대거 이주시키면서 현재의 유대인 도시 베르셰바가 자리잡게 되었다.
5. 기후
전형적인 지중해성 기후다. 여름에는 무려 46도까지 올라간 적이 있다.6. 기타
이 도시를 연고로 하는 축구팀은 하포엘 베르셰바 FC이다.[1] 유대 전승에 따르면 아브라함과 이삭이 팠다고[출처] Fabri, 1893, pp. 489, 493[3] 호주는 지금도 1차대전 당시 베르셰바에서 거둔 승리를 매우 자랑스럽게 기념하고 있다. 2년 전 갈리폴리 전투에서 겪었던 수많은 사상자, 패배를 설욕하는 의미도 있었던 것이다. 지난 2017년에는 당시 참전했던 호주군 병사들의 자손들이 대거 참석한 가운데 베르셰바 전투 100주년 기념식이 거행되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