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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9-29 21:55:43

헤로데 왕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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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브리어 הוֹרְדוֹס
고전 그리스어 Ἡρῴδης
한국어 공동번역 성서 헤로데
가톨릭
개신교 헤롯

1. 개요2. 이름3. 역사
3.1. 헤로데 대왕(헤로데 1세) 치세3.2. 헤로데 사두정치3.3. 헤로데 아그리파스 2세 치세
4. 역대 국왕

1. 개요

오늘날 팔레스타인 지역에 세워진 고대 로마의 속국이다. 에돔 혈통의 왕가가 다스렸다.

2. 이름

신약 성경이나 역사 기록에 남은 '헤로데'라는 이름은 그리스어로는 'Ἡρῴδης(헤로데스)', 히브리어로는 'הוֹרְדוֹס(호르도스)'이다. 가문명을 비롯하여 인명에도 사용된다.

보통 아기 예수를 죽이기 위해 나라의 아기들을 학살한 헤로데왕이 유명하지만, 사실은 대가 이어진 동명의 임금이 많다. 성경에서만 따져도 무려 4명, 실제로는 6~7명이라서 착각하기 쉽다. 그나마 성경에서는 구분한다.

영어로는 'Herod'. 뜻은 '영웅의 아들'로서 'Hero'(히어로)와 어원이 같다.

3.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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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 헤로데 대왕(헤로데 1세) 치세

파일:상세 내용 아이콘.svg   자세한 내용은 헤로데 대왕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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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대인들에 흡수된 에돔의 유력가문 출신인 안티파테르(안티파텔)와 나바테아 왕국의 페트라(요르단강 동쪽)의 공주 키프로스의 둘째 아들, 이 사람이 그 유명한 유아대학살[1]을 했다고 알려진 헤로데왕이다.

다만 일반적으로 신구약 중간사가 대단히 잘 알려져 있지 않은 나머지 에돔계 유대인인 그가 외국인으로 이스라엘 임금이 되었다는 오해가 한국에 널리 퍼져 있으나 이는 잘못된 관념이다. 에돔보다 유대와 약간 더 거리가 있었던 모압과 암몬조차도 헤로데 왕조 이전 하스몬 왕조 때 유대인으로 동화되어 정체성을 완전히 잃어버린 마당에 그보다 더 거리가 가까운 에돔이 정체성이 있었다는 얘기는 역사적으로 성립하지 않는다. 헤로데 왕조가 충성심을 얻지 못했다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성직자 계급 중 일부에 불과했으며, 헤로데 대왕 사후 일어난 반란은 헤로데 왕조 자체가 아닌 로마에게 반항하는 반란이었지 헤로데 왕조의 에돔 정체성과는 전혀 무관하다. 하스몬 왕조조차도 다윗 왕가 후손이 아니라는 점 및 제사장과 왕을 겸하는 근거 없는 참칭[2]을 한다는 이유로 성직자 계급에게 백안시당했고 내내 욕을 먹었었다.

현재 이스라엘에서 대왕으로 칭송하는 이유는 어디까지나 헤로데가 유대인이라는 점이 크다. 이미 느헤미야 때부터 모압, 암몬, 에돔계 민족들과 혼혈이 이뤄진 유대인들이 혈통적 순수성에 대해 공개적으로 따질 이유는 없었다. 헤로데가 에돔계로 추적가능한 계보가 있었기에 반왕정 세력인 유대교 주류 지식인에게 비판받을 가능성이 있었던 것과 이는 별도였다. 또다른 사유는 성서에서 서술되어 있듯이 성전을 재건축했기 때문이다.[3] 그래서 내셔널 지오그래픽지에서 현지 취재를 할 때 이스라엘 고고학자들이 "기독교 국가에서 신약 성경을 근거로 헤로데 대왕을 비하하는 일을 좀 그만뒀으면 좋겠다"는 반응을 보였을 정도로 지지 받고 있다. 사실 유대교는 로마 황제를 위해 제물을 바치는 것을 제외하고는 로마 내에서 가장 높은 종교적 자치권을 누리고 있었고, 헤로데왕은 이를 보호하는 대표적 인물이었으니 존경받을만 했다.

다만 헤로데 대왕에게 반대하는 세력이 있었던 것도 분명한 사실이다. 그러나 이는 역설적으로 헤로데 대왕 당시 부흥한 이스라엘의 경제 상황과 관련이 있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경제부흥이 일어나면 기득권인 상류층에게 먼저 부가 집중된다. 당대 이스라엘도 마찬가지로 헤로데 대왕 당시 빈부격차가 더 심해졌다. 기회를 잡은 부유층 및 중류층은 별 불만 없었겠지만 그렇지 못한 빈민층의 불만은 쌓여갔다. 이 사실은 성경 및 성경 외 문헌에서 교차검증된다. 또한 헤로데 왕조는 이전 하스몬 왕조의 헬라화 정책을 계승했는데 이 또한 기존 종교성이 강한 중류 지식인층에게 반감을 사는 정책이었다.[4]

헤로데에 대한 현대 이스라엘의 고평가는 영토 확장 등 국익을 증진하고 경제를 부흥시키고, 토목 인프라를 건설하는 등 정치인으로서의 면모가 부각되었기 때문이다. 어차피 헤로데의 왕위 비정통성 문제는 현대에 들어서 중요하지 않게 되었고, 잔혹성 또한 기독교에서 부각했던 것과는 별개로 그렇게 심하지도 않았다.

3.2. 헤로데 사두정치

기원전 4년 헤로데 대왕은 적자를 남기지 못한 채 사망하고, 그의 영토는 아들(서자) 셋과 여동생에게 분할된다. 하지만 로마 황제 아우구스투스의 허락을 받은 게 아니었다. 이를 탐탁지 않게 여긴 아우구스투스가 이들의 왕의 지위를 인정하나 통치권을 박탈한다.
파일:Herodian_tetrachy.png 파일:map-back-11.png
헤로데 사두정치
헤로데 아르켈라오스 헤로데 아르켈라오스
헤로데 안티파스 헤로데 안티파스
헤로데 필립보 2세 헤로데 필립보 2세
살로메 1세 데카폴리스
|| 헤로데 아르켈라오스(Ἀρχέλαος) ||사실상의 적자. 유대·사마리아·이두메아 상속. ||
헤로데 안티파스 아르켈라오스의 동복 동생. 갈릴래아·페레아 상속.
헤로데 필립보 2세 아르켈라오스의 이복 동생. 이투레아(골란 고원과 바타네아)·트라코니티스 상속.
살로메 1세 헤로데 대왕의 여동생. 얌니아 등 상속.

아르켈라오스는 유대사마리아, 이두메아를 아우르는 가장 넓은 땅을 물려받았으나 강압통치 때문에 기원후 6년에 아우구스투스 황제에게 폐위되어 갈리아에서 죽었다. 그의 영토는 사마리아와 이두메아를 포함하여 그대로 로마 제국의 유다이아 속주가 된다.

다섯째 부인(측실)인 클레오파트라의 아들로 헤로데의 사망 때 갓난아기였던 헤로데 필립보 2세는 바타네아를 물려받는다. 34년 헤로데 필립보 2세는 자식 없이 38세에 죽어 대가 끊기게 되고, 바타네아는 시리아 속주에 편입된다. 그러다가 37년 헤로데 아그리파스 1세가 바타네아 왕위에 오른다.

갈릴래아와 페레아는 헤로데 안티파스가 통치하고 있다가 39년 그가 칼리굴라 황제에게 폐위당한 뒤 40년 그의 조카이자 바타네아의 왕인 아그리파스 1세의 손에 들어간다. 41년 아그리파스 1세가 유대 왕위에 오르면서 유다이아 속주는 그의 치하에 자치권을 누렸는데, 44년 그의 사망 이후 유다이아 속주가 다시 로마 제국의 직할령이 되면서 그가 가지고 있던 갈릴래아와 페레아가 유다이아 속주에 편입된다.

3.3. 헤로데 아그리파스 2세 치세

파일:상세 내용 아이콘.svg   자세한 내용은 헤로데 아그리파스 2세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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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역대 국왕

파일:상세 내용 아이콘.svg   자세한 내용은 헤로데 왕조/역대 국왕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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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당시 해당지역 인구를 토대로 추정하면 2살 이하의 사내아이 약 20여 명이 학살되었을 거라고 추정한다. 가톨릭 교회에서는 이를 근거로 12월 28일을 '무죄한 어린이들의 순교 축일'로 기념한다. 다만 실제 이런 사건이 일어났다는 역사적 기록은 없어서 이 일이 정말로 있었는지에 대해서는 회의적인 역사가들이 많다. 복음주의 역사가이자 신학자 제임스 던도 이 일화가 루카스 복음의 엘리샤밧 일화와 마찬가지로 역사성을 별로 담보할 수 없는 건으로 볼 정도다. 헤로데의 잔인성 또한 대단히 과장된 것으로, 친척 척결하는 수준이 오늘날 기준 및 당대 로마 기준으로는 좀 잔인했다지만 당대 오리엔트 군주들보다 딱히 더 나갔던 건 아니었다.[2] 하스몬 왕조가 바로 이 비난을 무마하기 위해 요즘 한국 개신교에서는 친숙할 '왕 같은 제사장' 개념 및 다윗 왕조와 레위 가계의 마쉬아흐를 통합계승하는 마쉬아흐 예언을 발명했었다. 비록 동화되었다고는 할망정 다윗은커녕 레위하고도 무관한 헤로데 왕조는 그런 말을 떠들었다간 공개적 웃음거리가 될 게 뻔하여 이런 개념을 전혀 활용하지 않고 유야무야 묻어버렸으나, 아이러니하게도 이러한 발상을 예수 추종 집단이 교리로 차용하게 된다.[3] 비슷한 이유로 키루스 대왕도 유대인이 아니지만 이스라엘에서 칭송받는다. 그는 유대인들에게 바빌론 유수를 끝내고 이스라엘로 귀향하고, 성전의 재건을 할 수 있도록 허락했다.[4] 물론 헤로데는 정통성 보강을 위해 이미 아내와 아들까지 두었음에도 이전 왕가인 하스몬 왕조의 공주 마리암과 혼인했었다. 다만 이후 마리암과 마리암의 자식들을 처형시켰기에 사실상 하스몬 왕가의 혈통은 단절되었다. 이 일로 인해 헤로데 왕조는 유대인들에게 엄청난 비난을 사게 되었고, 아우구스투스를 비롯한 국제 사회에서도 좋은 소리를 듣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