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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2-09 14:27:27

키루스 2세

키루스 대왕에서 넘어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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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샨 제5대 국왕
아케메네스 제국 초대 황제

키루스 2세
𐎤𐎢𐎽𐎢𐏁
파일:cyrus.jpg
<colbgcolor=#941517><colcolor=#fff,#fff> 제호 키루스 2세(Cyrus II)
출생 기원전 600년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125px-Standard_of_Cyrus_the_Great_%28Achaemenid_Empire%29.svg.png 아케메네스 왕조 안샨
사망 기원전 530년 12월 4일 (향년 70세)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125px-Standard_of_Cyrus_the_Great_%28Achaemenid_Empire%29.svg.png 아케메네스 왕조 시르 다르야
재위 기간 안샨 제후왕
기원전 559년 ~ 기원전 550년 (9년)
아케메네스 왕조 샤한샤
기원전 550년 ~ 기원전 530년 12월 4일 (20년)
전임자 캄비세스 1세
후임자 캄비세스 2세
부모 부황: 캄비세스 1세
모후: 만다네
황후 카산다네
종교 조로아스터교
1. 개요2. 언어별 표기3. 생애
3.1. 유년기3.2. 메디아 정복3.3. 리디아 정복과 델포이 신탁의 전설3.4. 신바빌로니아 정복3.5. 마사게타이 원정과 붕어
4. 평가
4.1. 영향력4.2. 《성경》에서의 키루스 2세4.3. 스파르타와 키루스 2세
5. 대중매체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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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파일:cyrus the great.jpg

고대 페르시아의 군주이며, 인류 역사상 최초의 거대 제국을 건설한 군주였다. 페르시아 아케메네스 왕조의 실질적인 창건자로, 일명 키루스 대왕(Cyrus the Great) 혹은 키루스 대제라는 호칭으로 불린다. 일반적으로 아케메네스 제국의 초대 황제(왕중왕, Emperor)를 칭한 제5대 군주로 간주된다.

메디아, 리디아, 신바빌로니아 등을 비롯한 중동 및 소아시아 지역의 강대국들을 차례로 정복하여 페르시아 제국의 기틀을 다진 업적으로 유명하다. 키루스 2세의 등장을 전후로 메디아의 속국에 불과했던 페르시아는 메소포타미아 문명을 통일한 세계적인 대제국으로 거듭났다. 단순히 영토를 넓혔을 뿐 아니라 피지배 민족에 대한 비교적 관대한 통치를 펼쳐 제국의 다민족 통치기법에 있어 하나의 거대한 틀을 마련하기도 했다. 바빌로니아를 정복한 후 유대민족을 해방시키고 성전 재건을 도운 일화 또한 유명해서 그리스도교에도 친숙한 인물이다.[1]

현존하는 기록 중에 키루스의 생애를 묘사한 가장 상세하고 믿을 만한 것은 헤로도토스의 저술인 《히스토리아》로 여겨지고 있기에 본문의 내용도 대체로 이를 기반으로 한다. 마찬가지로 키루스의 일대기를 상세하게 묘사한 크세노폰의 《키로파에디아》는 내용이 보다 상세하고 극적인 부분도 많지만 《히스토리아》에 비해 민속적, 지적 가치는 크더라도 사료적 가치는 낮다는 것이 정설인지라 참고하기 어렵다.

2. 언어별 표기

언어별 표기
고대 페르시아어 𐎤𐎢𐎽𐎢𐏁
Kūruš [2]
페르시아어 کوروش بزرگ
kurosh bozorg
그리스어 Κυρος [3]
히브리어 כורש [4]
라틴어, 영어 Cyrus [5]
이탈리아어 Ciro
중국어 居鲁士二世

그리스에서는 Κυρος(퀴로스)[6]로 표기했다. 개신교성경》에서는 히브리어 표기법으로 כורש(고레스)라고 하며, 고대 페르시아어로는 Kūruš(쿠루쉬)라고 불렸고 키루스 대왕은 Kūrošé Bozorg라고 했다. 아랍 문자로는 کوروش بزرگ와 같이 표기된다.

3. 생애

3.1. 유년기

헤로도토스의 기록에 보이는 전설에 의하면 키루스의 성장 과정은 아래와 같았다.

이란 고원을 중심지로 발흥한 국가인 메디아의 왕 아스티아게스는 어느 날 자신의 딸인 만다네의 소변으로 온 세상이 잠기는 꿈을 꾸었다. 이에 사제들을 불러 해몽해보니
"만다네의 아이가 왕이 되어 아시아를 지배한다."
라는 내용이었다. 이에 두려움을 느낀 아스티아게스는 페르시아 안샨의 왕자였던 캄비세스[7]에게 시집보냈던 딸을 다시 수도로 불러들여 그녀가 아들을 낳는 즉시 그를 죽이려고 했다. 만다네는 얼마 후 임신했는데, 어느 날 음부에서 포도나무가 자라 온 세상으로 뻗어 나가는 꿈을 꾸었다. 이 또한 사제들이 해몽해보니 마찬가지로
"만다네의 아이가 왕이 되어 아시아를 지배한다."
는 내용이었다. 이에 아스티아게스는 결국 하르파고스라는 신하에게 만다네의 아이를 데려가 죽일 것을 명령했다.

그런데 당시 아스티아게스에게는 아들이 없었고, 외손자가 차기 왕이 되는 것이 순리였다. 이때문인지 하르파고스는 키루스를 직접 죽이지 않은채, 소치기에게 주어 죽이라고 명령했다. 그런데 소치기도 차마 아이를 죽이지 못해 아내의 제안으로 사산한 자신의 아들의 시신과 바꿔치기 해서 키루스를 자신의 아들처럼 길렀다.[8] 이를 미처 몰랐던 하르파고스는 소치기 아이의 시신을 가져가 아스티아게스에게 임무를 끝냈다고 보고했다.

세월이 흘러 키루스는 동네 아이들과 놀이를 하던 중 왕으로 뽑혔다. 그런데 이때 어느 고위 관리의 아들이 고집을 부리면서
"내가 왜 소치기 자식의 말을 들어야 하냐"
라며 키루스의 말을 듣지 않고 훼방을 놓았다. 이에 화가 난 키루스는 그 아이를 흠씬 두들겨팼고, 관리의 아들은 이 사실을 아버지에게 일러 바치며 키루스를 고발하도록 했다. 그렇게 고발당해 아스티아게스 앞으로 불려나간 키루스는
"놀이라지만 왕인 저의 명령을 어긴 것은 죄가 아닙니까."
라며 변론했고, 이 변론을 들은 아스티아게스는 단박에 키루스가 자신의 외손자임을 알아챘다. 그리고는 소치기와 하르파고스를 불러 심문해 아이가 죽지 않았다는 것, 즉 변론하는 아이가 자신의 외손자임을 확신하게 된다. 이에 아스티아게스는 외손자를 죽이려 하기보다는 사제들을 불러와 이를 해석하게 해
"놀이지만 어쨌든 왕이 되었으니 이제 죽이지 않아도 된다."
라는 답을 듣게 되었다. 아무리 예언이 무섭다지만 자신의 외손자를 죽였다는 사실이 늘 마음에 걸렸던 아스티아게스는 그런 사제들의 해석을 수긍하고, 키루스를 자신의 외손자로 인정한 후 페르시아에 있는 친부모에게 돌려보냈다.

그러나 아스티아게스는 임무에 실패한 하르파고스에게 매우 잔혹한 보복을 가했다. 이후 왕은 하르파고스를 연회에 초대하여 맛좋은 고기 요리를 대접했다. 하르파고스가 요리를 다 먹고 나자, 아스티아게스는 남은 고기가 있으니 가져가라며 광주리를 내주었다. 그 광주리 안에는 하르파고스의 13살 된 아들의 머리와 사지가 담겨 있었다. 하르파고스는 임무에 실패한 벌로 어린 아들의 고기를 먹어야 했던 것이다. 그러나 하르파고스는 당황하지 않고 담담하게 "모든 것은 당신의 뜻에 있습니다. 어찌 죄인으로서 무슨 말을 하겠습니까?"라고 아스티아게스의 뜻을 따르겠다며 충성을 다짐하였고 아스티아게스는 크게 만족하며 하르파고스가 아들의 남은 시신을 가지고 집으로 돌아가게 하였다.

3.2. 메디아 정복

아스티아게스는 만족하며 하르파고스를 돌려보냈으나 이는 그의 큰 실책이었다. 이 사건으로 아들을 잃은 하르파고스는 겉으로는 얼굴 색도 바꾸지 않고 충성을 맹세하였지만, 집에 돌아오자마자 엄청나게 구토한 뒤 속으로는 아스티아게스를 피어리게 증오하게 되었고, 소년을 죽여 요리로 만든 후 그 아비에게 먹인 건 너무나도 심한 악행이었기에 이 일로 메디아 전역의 국민들도 분노하면서 아스티아게스로부터 마음을 돌리게 되었다. 한편 페르시아 지역은 반란을 계획했다. 아들을 잃은 슬픔 속에서 하르파고스는 때를 기다려 키루스에게 여러 조언과 계략을 알려주었고, 겉으로는 아스티아게스에게 충성하는 척하여 왕의 의심을 피했다.

하르파고스는 겉으로는 의심을 피하면서 뒤로는 키루스를 계속해서 충동질해 반란을 모의하게 했고, 키루스가 성인이 되자 자신의 부하를 사냥꾼으로 변장시킨 후 죽은 토끼의 뱃속에 밀약서를 넣어 몰래 키루스에게 전했다. 이를 받아들인 키루스는 안샨의 페르시아인들을 소집시켜 첫 날에는 미개간지를 개간하게 하고, 다음 날이 되자 고기와 술을 푸짐하게 준비해서 사람들을 접대한 후 "어제와 오늘 중 어떤 날이 좋습니까?"라고 질문하자 대표자가 "아따! 말해 무엇하겠소? 당연히 오늘처럼 먹고 마시는 거지요!"라고 답하자 "그렇지요. 전자는 메디아에서 일하는 우리와 같은 타민족이고 후자는 우리의 피와 땀, 눈물을 먹고 노는 메디아의 지배자들입니다! 이제 우리의 힘을 보여줄 때가 왔습니다. 무기를 들고 일어섭시다!!"라 외치며 페르시아인들과 타민족들을 규합해 군대를 일으켜 북진했고, 외손자의 배신에 격노한 아스티아게스는 안샨군을 진압하라며 하르파고스에게 메디아군을 맡겼으나 이미 돌아선 하르파고스는 메디아군을 통째로 키루스에게 헌납하면서 아스티아게스를 배신했다. 이후 폐위된 아스티아게스는 키루스에 의해 참수되었다.[9] 판본에 따라 하르파고스는 아스티아게스의 가슴을 창자루로 찌르며 "그 옛날, 내 아들에게 행한 짓은 잊지 않았나? 난 그 시간동안 피눈물을 흘리며 지내왔어."라고 준엄하게 꾸짖고 아스티아게스는 이 말에 미친듯이 울고 웃으며 "어리석은 놈! 차라리 같은 종실인 네가 왕이 되면 오히려 더 나았겠다! 너의 그 작은 원한으로 아무 죄 없는 메디아인들은 이제 미개한 페르시아놈들의 노예가 되었구나!"라고 반성을 하지 않는 모습을 보인다.

이 이야기는 헤로도토스의 《역사》에 나온 것이며, 일본 만화히스토리에》에서도 자세하게 다루고 있다.

이렇게 키루스는 광활한 메디아를 정복했다.[10] 사실 이 이야기 자체가 그리스 신화오이디푸스 이야기와 거의 같다. 또한 인도의 전설적인 영웅 크리슈나도 이와 동일한 내용의 탄생 설화를 가지고 있다. 즉 여기저기 퍼져 있었던 설화를 키루스에게 갖다붙였을 가능성이 높다. 이런 식으로 누군가를 고전 영웅이나 위인과 같이 묘사하고자 그 행적을 베끼는 행위는 고대에 빈번했다. 단, 오이디푸스 신화는 키루스 사후 약 50년 뒤에 창작되었기 때문에 적어도 이러한 일대기가 오이디푸스 신화를 참조하여 창작되었을 가능성은 없다.오히려 키루스의 설화가 어떻게든 그리스에 전해져서 오이디푸스 신화가 탄생했을 가능성도 잇다.

3.3. 리디아 정복과 델포이 신탁의 전설

키루스의 활약이 본격화된 건 서쪽에 위치한 리디아 정복전이었다. 메디아의 이웃 나라이자 우호국이었던 리디아의 국왕 크로이소스에게 있어 키루스의 쿠데타는 좋은 침공 구실이었다.[11] 이후 벌어진 일들에 대해 헤로도토스는 저서인 《히스토리아》에 다음과 같이 서술했다.
크로이소스는 페르시아를 공격했을 때 그 결과가 어떻게 될까 궁금하여 델포이에 있는 아폴론 신전에서 신탁을 받았다. 여제관 피티아가 답신을 주었다. "(크로이소스가 페르시아를 치면) 강력한 제국이 무너질 것"이라는 내용이었다. '강력한 제국'이라면 누가 봐도 페르시아가 아니겠는가? 크로이소스는 바로 전쟁을 선포했고,[12] 낙타 부대를 동원한 키루스의 우회 기동 전술[13]에 보기 좋게 패배했다. 리디아도 페르시아 못지않은 강국이었음을 그는 잊고 있었던 것이다.[14][15]

다행히 크로이소스 본인은 키루스의 아량으로 목숨을 건지고 왕의 조언자로 살 수 있었다.[16][17]
이 이야기는 래리 고닉의 《세상에서 가장 재미있는 세계사》 1권에서도 소개되며, 김광수의 《논리와 비판적 사고》에서도 주어의 모호함을 지적하면서 언급되는, 즉 델포이 신탁의 모호함이 나타나는 대표적인 이야기이다. 'Delphic'이라는 단어의 뜻은 '애매모호'가 되었으며, 델파이 기법 역시 여기에서 이름을 따왔다.

헤로도토스에 따르면 양군은 캅파도키아의 프테리아에서 처음 맞붙었는데, 치열한 전투에도 불구하고 승부가 나지 않았지만 크로이소스는 자신의 군대가 숫적으로 불리해 승리하기 어렵다고 생각하고 수도인 사르데스로의 퇴각을 결정했다. 그리고 리디아의 동맹인 이집트와 스파르타, 신바빌로니아의 지원을 받아 4개월 뒤에 다시 페르시아를 공격하려 했다고 한다. 그러나 키루스는 리디아군이 물러난 것을 알게 되자 바로 사르데스로 군대를 진격시켰고, 크로이소스는 페르시아 역시 프테리아에서 유의미한 승리를 거두지 못했기에 키루스가 자신을 쫓아올 거라고는 생각도 못하고 있다가 적이 코앞까지 진격해오자 어쩔 수 없이 전투에 임하게 되었다고 한다.

페르시아와 리디아 사이에 벌어진 전투의 상세한 내용은 다음과 같다. 키루스는 군대를 모은 후, 고지대에서 크로이소스의 리디아 군대를 맞이했다. 리디아와 페르시아 군대에는 모두 기병이 있었으며, 그들은 병거 앞에 도열해 있었다. 크로이소스는 밀집 대형으로 유명한 이집트군을 거느리고 있었고, 키루스도 비밀 병기를 준비하고 있었다. 페르시아군의 사령관을 맡은 하르파고스는 키루스에게 조언하기를
"리디아의 말들은 낙타에 대한 지식이 부족하니, 낙타 향기가 적의 말들을 혼란에 빠뜨릴 수 있습니다."
라고 조언했다. 이에 키루스의 허락하에 새로운 낙타 군대가 조직되었다. 낙타 군대가 뛰어 나오고, 리디아군의 보병과 기병이 혼란에 빠진 사이, 키루스의 궁병이 진지와 방어 탑에서 쉴새 없이 화살을 쏘아댔다. 페르시아군 사령관 히르파고스의 예측대로 리디아 군대는 큰 혼란에 빠졌다. 어떤 기병은 놀라서 떨어지기도 했고, 말을 버린채 도망가기도 했다. 양군 사이의 치열한 결전은 키루스의 승리였다. 참패한 크로이소스는 사르데스 안에서 농성을 하면서 각국의 지원군이 올 때까지 버틸 생각이었으나 도시는 고작 14일 만에 함락당했다.[18][19]

이로써 아케메네스 왕조 페르시아는 지중해 동부와 오리엔트 전역의 신흥 패자로 떠올랐고, 그 공세는 걷잡을 수 없이 커졌으며, 주변 국가들은 벌벌 떨면서 이 무적의 정복자가 펼치는 위세를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BCE 540년까지, 키루스는 아나톨리아 반도의 남부 킬리키아와 이란 남부 엘람의 수도였던 수사를 정복했다. 그러나 아직도 서아시아에는 큰 힘이 남아 있었으니 바로 셈계 칼데아인의 제국 신바빌로니아였다.

3.4. 신바빌로니아 정복

신바빌로니아 말기, 바빌론 성벽에 누군가
'메네 메네 테켈 우파르신'
이라는 기묘한 문구를 적어뒀는데, 유대인 예언자였던 다니엘은 이 낙서를 신바빌로니아에 대한 심판의 내용으로 해석했다. 그에 의하면 '메네'는 '수를 셌다', '테켈'은 '저울에 달았다', '파르신'은 '나눠진다'라는 뜻이었다.[20] 다니엘은 이를
'하느님이 날짜를 세보니 바빌론의 통치기간이 끝나가고 있으며, 왕을 하느님의 저울에 매달아보니 기준에 미치지 않아, 이 나라를 쪼개서 다른 나라에 나누어준다.'
라는 말로 해석한 것이었다. 그리고 이 내용과 관련이 있는지는 몰라도 오래잖아 기원전 539년, 오피스 전투에서 대승을 거둔 키루스가 유프라테스 강의 물줄기를 막고 우회해 바빌론 침공에 나섰다. 《성경》의 내용에 의하면 저녁의 어둠 속에서 페르시아군의 특공대가 그 유명한 이슈타르의 문을 통과했고, 페르시아가 쳐들어오고 있는 것도 모른채 연회를 벌이고 있었던 벨사자르의 만찬이 끝남과 동시에 바빌론은 페르시아에게 함락당했다고 한다.

바빌론을 정복한 뒤, 키루스 2세는 자신을 아래와 같이 선포했다.
나는 키루스.
I am Cyrus.
𐎤𐎢𐎽𐎢𐏁
세상의 왕이요,
king of the universe,
šarru kiššat māti/šar-kiššati/šar kiššatim
위대한 왕이며,
the great king,
χyaθiya Vazrka/χyaθiya χyaθiynm
강력한 왕이고,
the powerful king,
바빌론의 왕이면서,
king of Babylon,
šakkanakki Bābili
수메르와 아카드의 왕이자,
king of Sumer and Akkad,
šar māt Šumeri u Akkadi
세계 사면의 왕이다.
king of the four quarters of the world.
šarru kibrat 'arbaim/šar kibrāti arba'i/šar kibrāt erbetti

참고로 자신을 여러 나라의 왕, 위대한 왕 등의 다양한 수식어로 소개하는 것은 아케메네스 왕조의 다른 황제들도 했다. 다리우스 1세 문서에 가보면 거의 비슷한 형식의 자기 소개가 보인다. 수메르아카드는 이전 시대 오리엔트를 지배했던 문명들로, 키루스 자신이 오리엔트의 지배자가 되었다고 선포한 것이었다.

유대인에게 있어 네부카드네자르 2세의 바빌론 제10왕조 신바빌로니아 제국은 사르곤 왕조 신아시리아 제국을 계승한 공포의 압제자였기 때문에, 신바빌로니아를 멸망시킨 키루스는 해방자로 보였을 것이다. 더구나 바빌로니아에 잡혀 있었던 유대인들을 모두 풀어주는 것은 물론 본 고향인 예루살렘으로 돌아갈 수 있도록 해주었으며 심지어 성전을 재건하는 것을 돕기까지 했으니 당시 유대인들의 감격은 말할 것도 없었다. 그래서 키루스는 유대인계 인물이 아닌데도 불구하고, 《성경》에서 유일하게 구원자로 크게 칭송받았으며, 메시아가 와서 구원해줄 것이라는 유대인들의 신앙이 더욱 확고해지는 결과를 낳았다.

3.5. 마사게타이 원정과 붕어

이후 키루스 2세는 신하들의 조언을 무시하고, 마사게타이[21] 정복 전쟁에 나섰는데, 초반에 선전을 하여 마사게타이 여왕 토미리스[22]의 아들을 포로로 잡게 되었다. 이에 분노에 찬 여왕이
"피에 굶주린 키루스여! 내 아들을 돌려보내지 않는다면 태양신의 이름으로 그대가 좋아하는 피를 실컷 맛보도록 해주겠다!"
라고 절규했으나[23] 키루스는 끝끝내 풀어주지 않았고 결국 왕자는 자살하고 말았다.[24] 키루스로 인해 아들을 비참하게 잃은 마사게타이의 여왕은 분노했고, 그 다음 전투에서 매복 끝에 키루스를 상대로 대승을 거두었다. 그리고 이 전투에서 난세의 영웅이었던 키루스가 전사했다. 이에 토미리스 여왕은 키루스의 시체를 난도질하고, 베어낸 키루스의 머리를 핏물에 담가두었다고 한다.루벤스의 그림

이상은 헤로도토스의 기록에 따른 것인데, 헤로도토스 자신도 이 일화를 키루스 2세의 죽음에 관한 3가지 설 중 '그나마 믿을 만한 것'으로 소개하고 있을 뿐이라 의문의 여지가 많다. 만일 키루스가 정말로 헤로도토스의 기록처럼 마사게타이 원정 중에 대패하여 군대는 거의 궤멸당하고 그 자신까지 전사했다면 그 여파가 아케메네스 제국 전체에 미쳤을 것이 자명한데, 기록에서는 그런 모습이 보이지 않을 뿐더러 키루스의 뒤를 이어 즉위한 아들 캄비세스 2세는 부친의 원수를 갚기는커녕 도리어 대군을 동원해 서남쪽의 이집트에 대한 정복 전쟁을 개시하는 등 앞뒤가 맞지 않는 부분이 있다.

키루스 2세의 말년과 죽음에 대한 기록은 헤로도토스의 서술 외에도 다양한 이야기가 전해진다. 예컨대 크테시아스[25]는 키루스가 데르비케스라는 종족과 싸우던 중 코끼리 부대의 급습을 받고 낙마하여 허벅지를 창으로 찔리는 등의 치명상을 입었고, 결국 데르비케스의 왕을 패사시켰으나 부상이 악화되어 3일 만에 죽었다고 했다. 한편 크세노폰은 키루스가 수도인 페르세폴리스에서 노년기를 보내며 아들인 캄비세스 2세에게 통치에 대한 가르침을 전수한 후 평화롭게 자연사했다고 기록했다. 마지막으로 헬레니즘 시대 바빌론 출신의 역사가였던 베로수스는 키루스가 북동쪽 국경지대에 사는 유목민족인 다하이(Dahae)족의 세력에 대해 근심하다가 죽었다고 기록했다. 이렇게 이설이 난무하는 이유는 가장 정확할 아케메네스 왕조의 기록이 알렉산드로스 3세가 페르시아의 수도 페르세폴리스를 불태우면서 대부분 소실되었기 때문으로 추측된다. 헤로도토스의 《역사》에서는 크로이소스가 멋진 작전을 설명하는데, 진수성찬을 미끼로 마사게타이인들을 제압하자고 제안하여 키루스는 자신의 직속 참모였던 그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그러나 무언가 예감이 좋지 않음을 느낀 키루스는 아들 캄비세스 2세에게 크로이소스의 남은 여생을 잘 보필해달라 당부한 뒤 두 사람을 페르시아로 돌려보냈다.

4. 평가

비길 자가 없는 가장 위대한 세계 정복자
크세노폰
세계 역사상 최초로 대왕이라는 칭호를 받은 군주로서 그 칭호에 걸맞은 대업을 이루었다. 세상을 하나의 국가로 통일하면 더 이상의 전쟁은 없다는 이념 아래, 메디아, 리디아, 신바빌로니아 등 페르시아보다 강대한 왕국들을 정복하여 당시 서아시아 세계를 통일했다. 또한 모든 종교들을 존중하고 노예제를 폐지했으며, 군인이 점령지 백성을 약탈하는 걸 금지하고, 빚 때문에 남자든 여자든 종이 되는 것에 반대했으며, 인간들을 억압하지 말고 노동자들에게 적절한 급여를 지불하라고 명령했다. 그리고 현재 뉴욕 UN 본부 청사에 복사본으로 전시되어 있는 키루스 원통[26]을 만들어 자신의 업적을 과시했다. 전문 한국어 번역 한편 키루스 전후로 페르시아에서는 장례를 치르고, 상이군인[27]에게 의족을 다는 등 피통치인의 복지에도 많은 신경을 썼다.

이는 페르시아 이전에 번성했던 대국인 신아시리아가 잔혹한 피정복민 정책 때문에 틈만 나면 반란이 일어나 결국은 피지배인들에 의해 멸망해버린 것에 대한 반면교사였던 것으로 보인다.[28]

4.1. 영향력

키루스 2세의 일대기는 전설이 되어 그리스인로마인 지배 계층의 모범서가 되었다. 헤로도토스나 크세노폰 등 당대 페르시아와 적대하던 그리스의 기록자들도 키루스를 강력하고 모범적인 영웅으로 묘사했다. 사실 아케메네스 왕조의 영역은 키루스 2세의 후계자인 캄비세스 2세가 정복한 이집트[29] 다리우스 1세가 정복한 트라키아, 마케도니아, 펀자브, 인더스 강 유역 등을 제외하면 전부 키루스 2세가 정복한 것이었다. 그것도 조그마한 파르스 일대를 기반으로 봉기하여 서아시아의 4대 왕국[30] 중 3개를 잇달아 무너뜨린 것이었다. 물론 정복이 너무 빨랐기 때문에 전반적으로 제국이 어수선했고, 이는 키루스 2세와 캄비세스 2세가 붕어한 뒤 각지에서 반란이 빈발하는 결과를 초래했다. 이 반란들을 모두 진압하고 본격적인 교통 정리를 시작하며 대제국의 기틀을 다진 것은 다리우스 1세의 공이었다. 다리우스 1세는 캄비세스 2세의 6촌으로 키루스 2세의 5촌 조카였지만 키루스 2세의 딸 아토사가 다리우스 1세와 결혼하여 사위이기도 했고, 이에 따라 뒤를 이은 크세르크세스 1세는 키루스 2세의 외손자가 되었다.
한편 키루스 2세때부터 아케메네스 왕조의 역대 왕중왕들은 관용과 자비를 통치의 으뜸 덕목으로 삼게 되었다. 이전 왕조들에 비하면 통치 이데올로기가 한 단계 발전했다는 데 의의를 찾을 수 있다. 실제로 이전의 아카드, 고바빌로니아, 신아시리아, 신바빌로니아의 경우 영토는 거대했으나 얼마 안 가 멸망한 반면, 아케메네스 왕조 페르시아는 이들보다도 더 넓은 영토를 가진채, 기원전임에도 불구하고 몇백 년이나 버텼다.

한편, 키루스 2세의 왕릉은 이란 남부 파사르가다에에 남아 있다. 키루스가 무덤을 검소하게 만들라고 유언해서였는지 당대 여러 왕들의 무덤에 견주면 정말 작다. 오죽하면 키루스가 죽고 약 200년 뒤에 쳐들어온 마케도니아 제국알렉산드로스 3세
"이게 그 전설의 키루스 2세의 무덤이란 말인가? 이리도 초라한 무덤이?"
라며 믿지 못할 정도였다고 한다. 그런데 전해오는 이야기에 의하면 키루스 2세가 무덤에 글을 새기게 했는데, 다음과 같았다.
O man, whoever you are and wherever you come from, for I know you will come, I am Cyrus who won the Persians their empire. Do not therefore begrudge me this bit of earth that covers my bones.
이보게, 자네가 누구든 그리고 자네가 어디서 왔든, 나는 자네가 올 것을 알고 있었다네, 나는 페르시아인의 제국을 건국한 키루스라네. 나의 뼈를 감싸고 있는 이 한 줌의 흙을 비웃지 말게나.
이 글귀를 본 알렉산드로스 3세는 일절 무덤을 건드리지 않은채 그냥 가버렸다고 한다. 하지만 기록에 의하면 무덤은 작았지만 내부에는 많은 보물들과 사치품으로 치장되어 있었다고 하며, 알렉산드로스 3세가 멀리 원정을 간 사이에 도굴을 당했다고 전해진다.

키루스 2세의 영향력은 아직도 현재진행형인데 파사르가다에 항목 참조.

4.2. 《성경》에서의 키루스 2세

나는 고레스에게 명령한다. '너는 내 양을 쳐라.' 그는 내 뜻을 받들어 이루리라. '너는 예루살렘을 재건하여라. 성전의 기초를 놓아라.'
<이사야서> 44장 28절(공동번역)

개신교와 《공동번역 성경》 속 고레스는 이 문서의 주인공인 키루스 2세를 가리킨다. <이사야서>는 전통적으로 기원전 8세기경의 저작으로 이해되어 왔다. 때문에 기원전 6세기경에 태어난 키루스를 이미 기원전 8세기에 이사야가 히브리어로 쿠루쉬, 즉 고레스로 예언한 것은 《성경》 속 예언의 성취로 받아들여졌다.

그러나 성서비평학의 발흥 이후 독일신학자였던 베른하르트 둠은 이른바 <3구분설>을 제시했는데, 40장에서 55장까지를 <제2 이사야>, 56장 이후를 <제3 이사야>로 구분하여 무명의 다른 저자가 이사야의 이름을 빌려 후대, 즉 키루스 2세의 등극 이후인 기원전 5세기 이후에 저술했을 가능성을 제기했다. 둠은 사용된 어휘와, 심판 이후의 회복의 메시지가 <제2, 제3 이사야>에서 명확하게 드러난다는 점을 제시했다. 이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이사야 문서 참조.

물론 <이사야서>의 예언이 사후 예언이냐 아니냐는 것과는 별개로, 전반적으로 <이사야서>는 키루스 2세에 대해서 매우 호의적이다.
<이사야서>에 의하면, 하느님께서는 키루스를 일으키시고(이사 41,2.25) 부르셨다(42,6 등). 그는 목자(44,28), 기름부음 받은 이(45,1), 하느님께서 오른손을 붙잡아 주신 이(42,6; 45,1)라고 일컬어진다. 고대 근동에서 이러한 표현들은 신이 선택한 임금에게 적용되는데, 페르시아의 임금을 이스라엘의 하느님께서 선택하셨다는 점이 보통의 경우와 다르다.
도미니코회 안소근 실비아 수녀, 《거룩한 독서를 위한 구약성경 주해 29-2: 이사야서 40-66장》, 바오로딸, 2017, 145쪽

이스라엘의 유대인들에겐 신바빌로니아로부터 민족을 구해준 영웅 중의 영웅이었으며, 유대인들의 성지인 예루살렘 성전의 재건을 도와준 것 등으로 인해 키루스 2세를 일컬어 기름 부음을 받은 자(메시아)라고 했을 정도였다.(이사야 45,1)[31]
야훼께서 당신이 기름 부어 세우신 고레스에게 말씀하신다.
"내가 너의 오른손을 잡아주어 만백성을 네 앞에 굴복시키고 제왕들을 무장해제시키리라. 네 앞에 성문을 활짝 열어 젖혀 다시는 닫히지 않게 하리라."
<이사야서> 45장 1절(《공동번역성서》)
이민족의 지도자로서 유대인에게 이 정도로 칭송받은 사람은 키루스 2세 전에도 없었고 후에도 없었다.[32]

4.3. 스파르타와 키루스 2세

아케메네스 왕조 페르시아 제국과 그리스 폴리스 간의 첫 번째 접촉이 이루어진 때가 바로 키루스 대왕의 치세때였다.

리디아의 왕 크로이소스가 받았던 예언에는 제국이 멸망할 것이란 예언 말고도
"그리스의 가장 강한 폴리스의 도움을 받아야 한다."
라는 예언도 있었기에, 크로이소스는 펠로폰네소스 반도에 위치한 아르고스스파르타 두 폴리스 중 스파르타를 택해 동맹을 맺었다. 하지만 스파르타는 동맹은 해주었으나, 외국으로 원정을 나갈 여력이 안되었기에[33] 키루스 2세에게 사신을 보내
"만일 이오니아로 진출을 시도할 시 스파르타가 가만 있지 않을 것이다."
라는 내용의 경고장만 보냈다.[34]

이는 세상 그 누구든 간에 스파르타라는 말 하나면 두려워하지 않을 리 없다는 오만한 생각에서 나온 경고였다. 물론 스파르타가 오늘날에도 무용으로 이름이 높지만, 당시 동방의 대제국을 다스리던 키루스 2세의 입장에서는 서쪽 저 멀리 있는 조그마한 반도의 도시 이름 따위를 알턱이 없었고, 오히려 이오니아 출신의 시종을 불러다가 라며 물었다고 한다.

5. 대중매체에서


[1] 《개역개정 성경》에서 '고레스'로 표기되며, 바빌로니아로 끌려온 이스라엘 포로에 대해 기원전 538년, 귀환령을 내렸다.[2] '쿠루쉬' 또는 '퀴루쉬'[3] '키로스' 또는 '퀴로스'[4] 그대로 읽으면 '코레쉬'. 《한국어 개역성경》에서는 '고레스'라고 쓴다.[5] 영어 발음은 '사이러스' 또는 '사이어러스'이다.[6] 국내의 일반적인 표기법으로는 '키로스'지만, 천병희 교수의 번역을 따른다.[7] 당시까지만 하더라도 페르시아는 이란 인근의 작은 부족에 불과했다.[8] 출산을 한 아내가 허약하게 태어난 아이와 함께 출산 후유증으로 곧바로 죽었다는 이야기도 있다.[9] 페르시아 내 설화상으로는 이렇게 알려져 있지만 실제 역사에서 키루스가 외조부인 아스티아게스를 죽였다는 기록은 없고, 오히려 폐위시킨 후에 적절한 대우를 해주었다고 한다.[10] 당시 오리엔트 지방의 강대국 중에서도 가장 국토가 넓은 나라가 메디아였다. 물론 땅 자체는 신바빌로니아와 리디아가 더 풍요로웠기에 이들을 압도하는 국력을 가지진 못했지만, 어쨌든 당대 오리엔트의 패자라 할만한 나라였다.[11] 아스티아게스는 리디아의 왕녀와 혼인했다고 한다.[12] 스파르타도 이때 지원했다고 한다.[13] 이를 제안한 사람이 위에 나온 하르파고스라고 한다.[14] 당연하지만 강대국에 전쟁을 선포하려면 선포하는 쪽도 그만한 힘이 있어야 한다.[15] 또한, 패배한 나라가 무조건 망한다고 한다면 그 나라는 신탁을 모르는 국가가 아니라 아는 나라라고 해석하는 것이 더 맞는 게 신탁을 아는 국가는 이상한 변덕이 생겨서 상대를 망하지 않게 내버려둘 수도 있기 때문이다.[16] 하지만 바빌로니아의 문서에는 키루스가 크로이소스로 추정되는 왕을 즉시 처형했다는 기록이 있다. 다만 이 기록에 나오는 페르시아에 패배한 나라가 리디아인지, 아니면 우라르투를 비롯한 다른 나라인지는 논란이 있다.[17] 반대로 조언자가 되어 목숨을 건졌다는 내용에서는 키루스 2세가 크로이소스를 현명하다고 여겨 고문으로 삼았으며 꽤 아꼈다고 한다.[18] 헤로도토스의 《역사》에서는 그 후일담도 기록하고 있는데, 나중에 크로이소스가 델포이 신전에 "당신들이 섬기는 신인 아폴론이 내게 거짓말을 했다!"고 항의하자, 델포이 신전 측에서는 "정해진 운명은 신조차 피할 수 없다. 당신의 조상은 원래 왕이 아닌 비천한 이발사였는데 그 4대째 후손인 당신까지 리디아의 왕위를 차지했고, 또 비록 페르시아한테 패배했지만 목숨은 건지지 않았는가? 이 정도면 아폴론 신도 당신한테 해줄 만큼 해주었으니 너무 원망하지 마라."라며 다소 궁색한 변명을 했다고 한다(...).[19] 일반적으로 알려진 후일담은 "강력한 제국이라고 했지, 그 제국이 페르시아라고 한 적은 없다."이다.[20] 앞에 붙은 '우'는 '그리고'(and)를 의미한다.[21] Massagetae. 트란스옥시아나 서부, 호라즘 북부 일대에 살았던 스키타이계(이란어군) 유목민들이었다.[22] 본명은 아니며, 이 사건을 기록한 역사가 헤로도토스가 변형시킨 이름이다. 참고로 이 토미리스의 모티브가 되는 인물이 실존했는지는 확실하지 않다.[23] 혹은 좀 더 정중하게, 돌려보내면 살려 보내주겠지만 돌려보내지 않는다면 앞서 나온 말처럼 해주겠다 했다고도 한다.[24] 혹은 풀어주었는데 치욕스러워서 자살했다고도 한다.[25] 고대 그리스의 역사가로, 《페르시카》라는 아시리아와 페르시아에 관한 역사책을 썼다.[26] 원본은 대영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27] 전투나 군사상 공무 중에 몸을 다친 군인.[28] 키루스 2세의 입장에서는 신아시리아 제국이 그렇게 멀리 떨어진 시기의 나라가 아니었는데, 키루스 2세가 태어나기 12년 전에 신아시리아의 수도인 니네베가 함락되었고, 아시리아가 끝장난 것은 키루스 2세가 태어나고도 9년이나 지나서였다.[29] 캄비세스 2세는 재위 4년에 대규모 원정군을 일으켜 이집트의 파라오였던 프삼티크 3세를 격파하고 이집트를 정복했다. 4년은 정세가 어지러운 와중에 대규모 원정군을 계획하고 준비하기에는 짧은 시간이었으므로 선왕이었던 키루스 2세가 미리 이집트 정벌을 계획하고 준비한 것을 이어받았을 확률이 높다. 캄비세스 2세의 군사적 능력은 키루스 2세에 미치지 못했으므로 캄비세스가 할 수 있었던 일을 키루스 대왕이 하지 못했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다.[30] 메디아, 리디아, 신바빌로니아, 이집트[31] 정확히 말하면 여기서 '메시아'(=기름부음 받은 이)는 그 자체로는 영도자라는 의미이며, 키루스 2세가 기음부음을 받았다는 《구약성경》의 언급은 그리스도교와 현대의 유대교에서 말하는 의미(종말론적 영도자)와는 다른 것이다. 물론 키루스 2세가 신에 의해 공권력이 부여된 영도자라고 《구약성경》이 말하는 것은 매우 이색적이고 후한 평가이긴 하지만, 당대 유대인들이 키루스 2세를 종말론적인 영도자로 여겼다는 의미는 아니다.[32] 굳이 따지면 로마 제국에서 사는 유대인들이 가장 원하던 두 가지인 종교적 자유와 자유무역 시장을 약속하고, 실제로 어느 정도 실행에 옮기기도 했던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호평을 받기는 했지만 약속을 제대로 실행하지 못하고 암살당했기 때문에 키루스 2세 정도는 아니었다. 그래도 카이사르가 암살당했을 때 비로마인들 중 유대인들이 가장 슬퍼했다.[33] 스파르타의 신분 구조 상 해외 원정은 거의 불가능에 가까웠다. 당시 스파르타는 소수의 도리아계 시민층이 노예 계급에 해당하는 다수의 헤일로타이를 밑에 두는 구조였는데 스파르타는 이들을 철저히 차별했고 이에 따라 헤일로타이들이 반란을 일으키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 스파르타가 병영국가화 된 것도 이런 잦은 노예반란 탓이 컸으며 이에 따라 해외원정이란 단어는 노예들한테 털리고 싶다는 말과 같은 의미였다.[34] 다른 이야기로 도와줬지만 리디아가 멸망하자 빈정이 상해서 저렇게 보냈다고도 한다.[35] 전혀 엉뚱한 도시명으로 번역한 사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