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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3-12-31 23:44:18

블라인드 윌리 존슨

블라인드 윌리 존슨
Blind Willie Johnson
파일:johnsbw.jpg
그로 알려진 유일한 사진
본명 윌리엄 J. 존슨
William J. Johns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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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라인드 윌리
Blind Willie
블라인드 텍사스 마린
Blind Texas Marlin
더 블라인드 필그림
The Blind Pilgri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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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1897년 1월 22일
미국 텍사스 주 워싱턴 군 인데펜던스
사망 1945년 9월 18일 (향년 48세)
미국 텍사스 주 제퍼슨 군 보몬트
직업 가수, 기타리스트, 전도사
장르 가스펠, 어쿠스틱 텍사스 블루스[1]
종교 개신교

1. 개요2. 생애
2.1. 초창기2.2. 녹음2.3. 말년 및 죽음
3. 음악적 스타일과 영향4. 대표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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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미국의 음악가 겸 전도사. 강렬한 흉성 보컬로 유명하며 슬라이드 주법의 달인으로 알려져 있는, 후대에 큰 영향을 끼친 블루스 음악가이다. 생전의 그의 곡들이 상업적으로 성공했었지만 그에 반해 그는 평생을 풍족하게 살지 못하였다.

2. 생애

2.1. 초창기

텍사스 주 워싱턴 군의 인데펜던스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인 조지 존슨[2]은 소작농이었으며 어머니인 매리 필즈는 그가 태어나고 4년이 지난 1901년에 사망했다. 블루스 역사가인 스티브 칼트에 의하면 칼이라는 이름의 동생이 있었다고도 했다. 그의 가족은 곧장 농업적으로 매우 부유한 도시였던 말린으로 이사를 했으며 존슨은 어린 시절을 대부분 말린에서 보냈다. 그곳에서 존슨의 가족은 매주 일요일마다 교회를 가곤 했는데 그 때의 경험이 지속적으로 그에게 침례교 목사의 꿈을 가지게끔 영향을 끼쳤다. 그리고 다섯 살이 되던 해, 그의 아버지가 그에게 시가 박스로 만들어진 기타를 주었다.

그는 태어날 때부터 시력을 잃은 것이 아니었다. 많은 전기 작가들이 가장 유력한 이유로 보고 있는 이야기로는 그가 7살 때 아버지와 새어머니가 싸우던 도중, 새어머니가 양잿물을 쏟거나 흩뿌려 버렸고 그것이 존슨의 눈에 들어가 영구적으로 시력을 잃게 되었다는 이야기다. 이는 그의 아내였던 안젤린 존슨이 증언했다. 다른 이야기로는 1905년 8월 30일 텍사스 주에서 부분적으로 보이던 일식을 잘못된 안경이 착용된 상태에서 보게 되어 시력을 잃었다는 이야기도 있다. 하지만 대부분은 첫 번째 이야기를 가장 신빙성있는 이유로 보고 있다.

2.2. 녹음

그의 첫 녹음은 1927년 12월 3일에 컬럼비아 레코드에서 이루어졌는데, 이 때 녹음한 곡은 "i know his blood can make me whole", "jesus make up my dying bed", "it's nobody's fault but mine", "mother's children have a hard time", "dark was the night, cold was the ground" 등등이 있는데 그가 전도사인 만큼 전통적인 가스펠 곡들도 있으며 그가 직접 작곡, 작사를 한 곡도 있다. 이때 처음 두 곡은 그의 첫 싱글로 발매되었다. 마지막 녹음은 1930년 쯤이었다.

그의 첫 싱글은 성공적인 판매량을 거두게 된다. 이 때 약 9400장의 카피가 찍혀나갔는데, 컬럼비아 레코드의 간판급 스타였던 베시 스미스의 최근 카피가 6000장이 팔린 것으로 보면 어마무시한 판매량이었다.

그리고 그가 다섯 번 째로 녹음했던 곡인 "Dark Was the Night, Cold Was the Ground"[3]은 오픈 D 튜닝과 슬라이드 주법[4]으로 이루어진 곡이다. 그의 지속적인 노숙 생활 등의 경험을 토대로 쓰여진 곡이며 단 한 마디의 가사도 없이 허밍과 슬라이드 연주가 곡을 가득 채우고 있다. 제목과 곡 그 자체로 모든 것을 설명할 수 있다는 셈.

이 곡은 1977년 우주로 쏘아진 보이저 호에 실렸던 골든 레코드에도 수록되었는데, 수록된 이유로는 공허한 우주를 떠도는 보이저 호의 외로움을 대변할 수 있는 곡이라고 판단되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즉, 이 곡은 지구의 "외로움"이란 감정을 가장 잘 표현한 곡이라고도 할 수 있겠다. 이후 많은 음악가들이 커버를 하고 많은 영화에 사운드트랙으로 수록되기도 하는 등 그의 가장 유명한 곡으로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2.3. 말년 및 죽음

그는 재혼을 한 뒤 계속해서 텍사스의 여러 도시를 떠돌며 거리 공연을 하는 등 별 다른 행적 없이 살다가 1945년 버몬트에 교회를 세우기도 한다. 하지만 같은 1945년, 그의 집에 불이 나서 파괴되었으나 그 어디도 갈 곳이 없던 그는 이전 집의 폐허에서 계속해서 살아간다. 이때 그는 지속적으로 폐허의 습기에 노출되었다. 이후 말라리아를 앓게 되지만 그가 흑인이고 눈이 안보인다는 이유로 그 어떤 병원에서도 그를 받아들여주지 않았다. 병세는 계속해서 악화되었고 몇 개월이 채 되지 않은 1945년 9월 18일 사망하게 된다. 이후 버몬트의 블랜체트 묘지에 안장되었다.

3. 음악적 스타일과 영향

그의 유례없는 독창적인 슬라이드 주법은 최고라고 평가를 받았다. 이러한 주법은 로버트 존슨하울링 울프등의 뮤지션에게도 영향을 주기도 하였다. 또한 그의 강렬한 흉성 보컬은 길거리에서 연주를 할 때 오가는 사람들이 잘 들을 수 있도록 그 창법으로 노래한 것이라고 한다.

꾸준히 좋은 판매량을 내다가도 대공황이 찾아오자 매우 저조한 판매량을 보이게 되면서 점점 잊혀가게 되는데, 이후 1952년 포크웨이스 레코드에서 발매한 컴필레이션인 "Anthology of American Folk Music"에 실리게 되면서 그를 포함한 수 많은 블루스 음악가들이 재발견되게 된다. 이때 또 다른 맹인 블루스 음악가인 개리 데이비스[5]의 지속적으로 그를 알리려는 노력 덕에 그가 더 많이 알려질 수 있게 되었다.

이후 1962년에는 밥 딜런이 그의 데뷔 앨범에 존슨의 "Jesus make up my dying bed"를 "In my time of dyin'"으로 제목을 바꾸어 수록하기도 했다. 그 뒤로 1970년대에는 레드 제플린, 존 세바스찬, 에릭 클랩튼등을 포함한 수 많은 록 음악가들이 그의 곡을 커버하기도 했으며 앞서 서술했듯 1977년 보이저 호에 실린 골든 레코드에도 그의 곡이 수록되게 된다. 그 외에도 앨리게이터 레코드에서 발매한 트리뷰트 앨범에는 톰 웨이츠와 루신다 윌리엄스등의 음악가들이 참여하기도 했다.

4. 대표곡



[1] 위키피디아에서는 그를 가스펠 블루스 음악가로 표기하고 있지만 텍사스에서 태어났다는 점과 올뮤직, 레이트유어뮤직 등에서도 그를 텍사스 블루스 음악가로 표기하고 있으므로 이곳에서도 텍사스 블루스로 표기함.[2] 윌리 존슨 시니어로도 알려져 있다.[3] 곡의 제목은 19세기에 유행했던 토마스 하위스의 찬송가인 "Gethsemane"의 첫 라인에서 따 온 것이다.[4] 이 때 그는 일반적인 슬라이드가 아닌 주머니칼 등을 슬라이드로 썻다고 한다.[5] 흔히 Reverend Gary Davis로 알려져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