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간호인 1982년 5월호 표지 |
1982년 5월에 1호가 발간되어, 1989년 7월에 86호로[3] 폐간되었다. 경쟁지였던 과학동아나 뉴턴은 각각 1986년, 1985년 창간되었기 때문에 1980년대 초반 한국에서는 사실상 독점적인 지위에 있던 과학잡지였다. 사이언스는 전국 군, 면 단위 서점까지 깔릴 정도로 불티나게 팔렸고[4] 이에 계몽사가 월간 과학이란 이름으로 일본 잡지 Newton의 한국판을 내며 참전했고, 그 이후 동아일보사가 자사 과학부의 강력한 취재력을 바탕으로[5] 국내 과학계에 더 초점을 맞추고 뉴턴보다 텍스트가 많은 과학동아를 내며 국내 과학잡지계는 1986년에 들어 삼강 구도를 이루게 된다.
잡지의 판형과 구성, 외형은 과학동아나 뉴턴과 매우 비슷하지만, 대형 출판사를 업은 후발 경쟁지들에 비해 영세했던 사이언스는 맨 앞과 뒤[6]의 십여 장을 빼면 대부분의 지면이 미색 갱지였고, 컬러 페이지는 매우 적었다. 그래도 오랜만에 나온 우리나라 본격 과학 잡지라는 지위에 힘입어 즐겨 보는 층이 있었으며 많은 대학 도서관에 장서로 비치되었고, 대학과의 이런 관계를 바탕으로 각종 행사를[7] 주최하는 등 의욕적인 활동을 벌이기도 하였다.
↑ 사이언스 캠프 개최 광고. 실제로 많은 학생들이 참여하였다. 참고로 참가비 57,000원은 지금(2020년 기준) 돈으로 약 20만원. 허나 "돈 값"을 하는 캠프로 교수진이 그야말로 쟁쟁했다. 우리나라 물리학계의 선구자인 권영대 박사[8], 장극 박사, 조장희 박사 등 국내 과학기술의 굵직한 이름들이 보인다.
↑ 정기 구독자에게는 학술 논문을 철하는 바인더처럼 생긴 전용 바인더를 함께 증정하였다. 당시 사이언스가 지향하던 포지션을 보여 주는 부분. 이 바인더는 나중에 뉴턴 한국판도 벤치마킹했다. 사이언스가 흑색인 데 비해 이 쪽은 감색과 빨간색. 다만 과학동아는 주지 않았는데, 과학동아는 사이언스나 뉴턴처럼 중철제본이 아니라 일반 잡지처럼 본드제본(일명 떡제본)이었기 때문이다. 사실 사이언스나 뉴턴이 이런 중철바인더를 제공한 것은 중철 특성상 책꽂이에 꽂아넣었을 때 책이 잘 안 보여 찾기 애매했기 때문이다. 뉴턴의 경우 아예 저 바인더 책 등에 붙일 전용 라벨(몇년 몇월호가 적힌)까지 줬다.
내용면에서는 국내 과학계의 이슈를 취재하거나 괄목할 만한 과학계 인물들을 인터뷰한 기사들, 거기에 외국 대중 과학잡지(옴니, 파퓰러 미캐닉스 등)의 기사를 번역한 것 등으로 채워져 있었다. 분야는 파퓰러 사이언스처럼 화학, 수학, 항공, 천체, 물리학, 생물학, 지리학 등 흥미 있는 건 가리지 않고 실었는데, 신기술 제품 소개 같은 짤막한 흥미 기사부터 초끈 이론이니 초한집잡합론이니 하는 좀 무거운 내용까지 들어가 있는, 알고 보면 내용이 참 다양한 잡지였다. 베껴 온 원본 잡지의 그렇다 보니 경쟁지에 비해 기사가 살짝 무거운 편. 아직도 나오는 뉴턴 등 후발 잡지와 분량은 거의 비슷했거나 더 두터웠기에, 그 많은 기사 내용을 영세 출판사 업체에서 적은 인원으로 한 달 안에 번역하고 편집해 책을 낸 것은 지금 생각하면 경이로운 일이다. 심지어 당시는 사진 식자(사식)를 떠서 종이에 붙여 조판하여 인쇄하던 시대였으며, 컴퓨터 편집, 조판(DTP)을 하던 시대도 아니었다. 물론 옴니와 기사 공유 관계가 있었던 것은 아니고, 그냥 사진은 스캔하고 기사는 무단으로 번역해서 실은 것이다.[9] 저작권 개념이 없었고 법도 없던 시대였으니...[10]
이처럼 미국 잡지를 베낀 것이 많다 보니 내용이 미국에 유리하게 편중된 경우가 많았다. 우주개발 역사를 실은 토막잡지가 소련은 배제하고 미국 중심으로 서술된 경우(예컨대 유리 가가린이나 발렌티나 테레시코바가 빠지고 존 글렌의 궤도비행과 미국 최초의 여성 우주인 샐리 라이드가 게재되는 등) 등이 그 예다. 이 기사가 실린 1986년은 한창 미-소 우주경쟁(SDI)이 치열하던 시절임을 감안해도...
[1] 학생과학은 잡지명과 달리 사실상 과학이 아니라 유사과학을 주로 다룬 잡지였으니...[2] 그 외 다른 잡지가 안 나왔으니까, 잡지 이름을 회사 이름으로 불러도 혼동 염려가 없었다. 이는 월간 플래툰과 비슷했다.[3] 한 호가 합병호였기 때문에 87호가 아니다.[4] 특히 '과학 입국'을 표방하며 전 사회적으로 과학자를 중시하던 분위기도 한몫 했다. 당시에는 학력고사 수석은 의대가 아니라 당연히 서울대 물리학과나 건축학과를 가던 시대였다.[5] 지금은 동아사이언스가 동아일보에서 분사되었지만 당시에는 동아일보 과학부였다.[6] 펼침 가운데에 스테이플을 박는 제본이었기에 종이가 다른 컬러 페이지는 앞뒤로 배치됨.[7] 예를 들면 이공계 교수들 및 대학생들과 중학교 학생들을 이어주는 과학캠프 등.[8] 권영대 박사는 이로부터 2년 후인 1985년에 타계하였으니 이 캠프에 참가한 학생들은 귀중한 경험을 한 셈이다.[9] 그래서 사진이나 일러스트레이션은 기사를 정식 계약해 들여온 후발 잡지에 비해 질이 좀 안 좋았다.[10] 우리나라에서 저작권법이 제대로 만들어진 것이 1987년이고, 그나마도 유명무실한 법으로 거의 방치되다 1995년 OECD 가입을 앞두고 베른 협약에 가입하면서부터 정비되기 시작했다. 그리고 우리나라에서 저작권법과 관련해 실제 사법 행위가 집행되기 시작한 것은 20세기 끝무렵으로 대충 IMF가 어느 정도 정리되던 2000년경이다. 이 당시부터 불법 스캔본과 MP3 공유, 특히 기업 차원에서의 소프트웨어 불법복제가 법의 철퇴를 맞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