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모에 미러 (일반/어두운 화면)
최근 수정 시각 : 2024-01-29 18:59:42

서오룡

파일:서오룡.jpg
<colbgcolor=#0047a0><colcolor=#ffffff> 이명 서오룡(徐吳龍), 최용길(崔龍吉), 대본철(大本徹), 대본혁수(大本爀洙)
족보명 서혁수(徐爀洙)
본관 달성 서씨[1]
출생 1911 6월 11일
경상북도 달성군 성북면 산격동
사망 1950년
상훈 건국훈장 애족장

1. 생애와 주요 활동2. 주 참고 출처

[clearfix]

1. 생애와 주요 활동

일제 강점기의 독립운동가 서오룡(徐五龍/徐吳龍/서혁수徐爀洙)은 대구상업학교에 재학하던 당시 사사키 다카시(佐佐木隆), 이동우(李東雨), 김동욱, 권영달, 김홍열 등과 '프로 과학 연구소 조선 제1호 지국'이라는 항일운동 비밀결사 단체를 조직하였다.

해당 단체는 자본주의 사회 타파를 통해 사회주의 사회를 건설한다는 이념으로 소작쟁의, 노동쟁의, 동맹휴교 등으로 사회 운동을 확장하고자 했다. 그 후 대구 상업 학교의 재학생 서상조(徐相祚), 권태우(權泰禹), 정학진(鄭學鎭) 등이 가입하면서 조직이 확대되었으며 기관지 『프롤레타리아과학』을 연구, 보급하는 한편 야간학교를 대상으로 강연활동을 전개했다.

1931년에는 「빵을 위해 투쟁하자」, 「자본가를 처단하자」 등의 격문을 제작해 대구의 시내에 배포하거나 제국주의적 교육제도의 본질 폭로를 위해 학생들의 맹휴(동맹 휴학)를 주도하기도 했다. 서오룡은 1월 28일, 5학년생으로서 1학년 학생들을 선동했다는 이유로 무기정학 처분을 받았다. 동료 사사키는 퇴학을 당하기도 했으나 그들은 아랑곳하지 않은 채 5월부터 9월까지 독서회 모임을 통해 여러 차례의 회합을 진행했다.

1931년 7월에 대구 상업 학교를 졸업한 서오룡은 "만보산 사건에 대한 조선인의 반항심을 일본 제국주의로 향하게 하여 그 본질을 폭로하자"는 내용을 담은 반제격문을 경상북도 잠종업조합(蠶種業組合) 사무소 등에 전달했다. 또한 「프롤레타리아과학연구소 지국뉴스」 제1호와 제2호를 인쇄해 국내의 지국원들과 과학 연구소에 배포하였다.

그는 1931년 8월 만보산 사건(萬寶山事件)[2]에 대해 강연하면서 그 사건의 진면모는 "일본 관헌이 고의로 한국인과 중국인 간의 충돌을 일으켜, 조선 내의 보복 행위를 이용하여 민족적 대립 감정을 조장하고 양성했으며 중국·조선·일본 피압박 민중의 공동전선을 파괴하려는 시도"-임을 설명했다. 9월 말 즈음에는 "일반 노동자와 농민은 대은행(大銀行)·일본내각·총독·조선은행(朝鮮銀行)·동양척식주식회사(東洋拓殖株式會社)·경찰관리·자본가·지주·고리대금업자·상인들로부터 압박과 착취를 당하고 있다"는 강연도 이행했다.

이어서 11월 27일, 서오룡은 동네 서당의 야간학교에서 학생 8명에게 한국인과 일본인 간의 빈부 격차와 그 원인에 대해 연설하기도 했는데, 『산업노동시보(産業勞動時報)』 통계를 인용하여 "한국인의 쌀 소비량은 1년에 1인당 평균치 7말(斗) 내외로서 매년 감소하고 있는 반면, 일본인의 쌀 소비량은 1섬(石) 이상으로 매년 증가하는 경향이다. 이는 일본제국주의의 식민지 착취로서 동양척식주식회사가 한국인의 토지를 빼앗아 일본인 이민을 장려한 결과이다"-라는 주제의 내용이었다.

그러나 1930년 12월 4일, 대구고등보통학교생 등을 주로 학교와 대구의 일본군 등에 반제격문[3]을 배포한 일이 문제로 제기되면서 대구경찰서(大邱警察署) 고등계(高等係)와 경상북도경찰부 고등과가 연합한 검거 과정에서 서오룡 역시 체포되었다. 1932년 1월에 검찰로 송치된 그는 동료들과 9월 초에 예심이 마무리되었다. 이후 12월 2일 대구지방법원(大邱地方法院)에서 소위 '치안유지법(治安維持法) 및 출판법 및 보안법(保安法) 위반'을 미루어 징역 2년을 선고받았던 그는 1934년 칙령(勅令) 제19조에 의해 징역 1년 10월 2일로 감형된 결과 4월 8일에 대구형무소에서 출옥하게 되었다.

가량 2년이 흐른 1936년 2월, '유림단(儒林團) 사건'[4]의 관계자 정수기(鄭守基)의 동지장(同志葬) 문제에 연루되어 정운해(鄭雲海), 이동우 등과 대구경찰서에 재차 체포된 서오룡은 5월 20일에 석방되었다.

서오룡에게는 2018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

2. 주 참고 출처

공훈전자사료관-서오룡
디지털달성문화대전-서오룡
대구역사문화대전-프로과학연구소 조선 제1지국

[1] 현감공 제(濟)파. 달성 서씨 23세 수(洙) 원(源) 호(浩) 항렬.[2] 1931년 7월 중국 지린성 (吉林省) 만보산 지역에서 한인 농민과 중국인 농민 사이에 일어난 충돌 사건[3] 제국주의에 반대하고 신사회 건설을 주장하는 격문[4] 1925년부터 1926년까지 대구를 비롯한 영남 일대에서 유림 대표들이 중심이 되어 독립 자금을 마련하기 위하여 일으킨 독립운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