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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3-11-25 12:06:54

서주철

이름 노광일 → 서주철
출생년도 1977년~1978년으로 추정
최종계급 조선인민군 해군 소좌 → 해병 강등
경력 등산곶 684호정 갑판 포분대장,
684 함포장 겸 포대장[1] 직책 겸임[2]
학력 김철주 포병군관학교 졸업
현재소속 불명
계급 중사(추정) → 중좌 ~ 상좌(추정)

북한의 군인. 조선인민군 해군 소속 해병 출신 군관으로 제1연평해전, 제2연평해전에 참전하여 살아남은 684 승조원의 일원으로, 본명은 노광일이었다. 2002년 6월 29일, 한일 월드컵에서 한국 vs 터키의 4강전이 열리던 그날, 85mm 전차포를 참수리 357호정의 좌현을 집중공격하여 여러 발을 명중시켰다. 그러나 전투 개시 10분 내외의 시간 즈음, 모든 함포와 저격수, 각종 소화기 담당 기관총 사수와 보총수들이 사망하였고, 85mm 전차포를 포함한 각 포대 방호판이 거의 다 파괴되었는데, 아마 서주철은 이 때 부상을 입었거나 무사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그렇게 주요기관들을 파괴당한, 선체 전체가 반파된 684는 후타실조차 말을 듣지 않자 결국 육도 388호정에 묶인 채 북으로 예인되며 퇴각하였으나, 357정은 그보다 손상정도가 심해 결국 침몰하고 말았고, 이 사실을 알게 된 김정일은 노광일에게 공화국 영웅 칭호와 "서해를 주인처럼 철옹성같이 지키라!" 라는 의미에서 '서주철' 이라는 이름으로 개명시키고는 단번에 소좌로 빠르게 진급시켜 김철주 포병군관학교[3]로 단번에 진학, 그가 청소년기를 보내온 봉흥중학교도 '영웅학교' 칭호를 받았다. 그러나 주변에 자신의 공적을 지나치게 자랑하고 다녔고, 또 연평해전은 북한의 의도되고 치밀하게 계획된 해상 전쟁 도발 행위이다." 라고 연설 도중 밝혀 '혁명화' 교육을 받았다. 량강도 출신의 서주철은 1999년 6월15일 발생한 제1차 연평해전에도 참가했으며 이 같은 공으로 인해 분대장에서 단번에 소좌로 특진한 것으로 전해지기도 했다. 서주철의 기구한 운명이 현지 주민들속에서 새삼 화제가 되고 있다고 소식통들은 전했다.

서주철은 량강도 혜산시 연봉 2동에 위치한 ‘봉흥중학교’ 출신으로 확인되었다. 즉, 량강도 출신의 가능성이 높다. 북한은 대외적으로 연평해전이 일방적인 우리 측의 서해 북방한계선(NLL) 설정으로 인해 우발적으로 불거진 사건이라는 주장을 펼쳤던 것으로 인해 서주철의 계급도 일반 병사로 강등됐으나 '공화국 영웅' 칭호와 뽀그리우스가 하사한 명칭은 박탈되지 않았다고 하며, 서주철이 '공화국 영웅' 칭호를 받았을 당시 '영웅학교' 칭호를 받은 서주철의 출신 중학교인 '봉흥중학교'도 혁명화교육을 계기로 영웅학교 칭호를 박탈당했다.

‘공화국 영웅’ 칭호를 수여하는 자리에서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22살밖에 안된 노광일에게 “서해의 주인으로 우리(북한) 바다를 철옹성처럼 지키라”고 부추긴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노광일이라는 본명이 서주철로 바뀌게 된 사연이다. 하지만 당년 4월 량강도 당위원회가 서주철의 출신학교인 ‘봉흥중학교를 다시 ‘영웅학교’로 추천했으나 중앙에서 답변이 없으면서 ‘공화국 영웅’ 칭호를 받은 서주철의 행적이 현지 주민들속에서 새삼스레 화제가 되고 있다고 소식통들은 밝혔다. 량강도의 한 소식통은 “서주철로 하여 2002년 9월 ‘영웅학교’가 됐던 ‘봉흥중학교’는 서주철의 과오로 두달만에 ‘영웅학교’ 칭호를 상실했다”며 “다행히 서주철에게 수여된 영웅칭호는 박탈되지 않았다”고 12일 자유아시아방송에 밝혔다.

분대장에서 단번에 소좌로 진급해 ‘김철주 포병군관학교’에 입학했던 서주철은 ‘연평해전’이 김정일 정권의 도발이었다는 비밀을 누설하고, 자신을 너무 자랑하고 다니다가 일반병사로 강등돼 2년간의 ‘혁명화’ 처벌을 받았다고 그는 이야기했다. 지난해까지 서주철은 황해남도 4군단에서 해안포 중대장으로 복무했는데 올해 대대장으로 승진했다는 소식도 들려오고 있지만 그동안 뇌물사건 등 크고 작은 사건들에 휘말려 여러 번 처벌을 받아 승진이 쉽지 않을 것이라고 평가된다.

이와 관련 14일 량강도의 또 다른 소식통은 서주철의 가족들은 화폐교환 시기 생계유지를 위해 혜명동에 받았던 ‘배려아파트’를 중국인민폐 2만 위안에 팔았다며 그로 인하여 서주철의 아버지는 3달간 ‘로동단련대’ 처벌까지 받았다”고 말했습니다. 소식통은 화폐교환 후 생활난에 직면한 가족들은 2010년 4월 아버지인 노중천이 ‘로동단련대’에서 석방되자 모두 서주철이 군사복무를 하고 있는 황해남도의 한 농촌 부근으로 이사했다고 연평해전 영웅의 기구한 가족사를 설명했다. 그러나 공화국 영웅 칭호가 있으니만큼 북한 사회인으로서의 생명력은 있는 모양.


[1] 우리 해군 직별로 따지면 병기장.[2] 2002 연평해전 당시에는 서해함대사령부 예하 8전대 7편대 등산곶 684호정에서 근무하고 있었다.[3] 우리로 따지면 육군포병학교의 장교교육대대버전 정도 되는 위치의 학교라 할 수 있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