石超
(? ~ 305)
서진의 인물이자 석포의 손자로 기주 발해군 남피현 사람.
사마영 휘하에서 독호를 지내고 301년에 사마륜이 찬탈하자 각 왕들이 군사를 일으켰고 석초는 왕언, 이의, 조양 등과 함께 선봉이 되었으며, 사마영의 명령으로 견수와 함께 사마경을 도와 양적에서 장홍을 공격해 항복시켰다.
중호군을 지내면서 303년에 사마영과 사마경이 사마예를 토벌하기로 하자 견수와 함께 군사 20여만 명을 감독해 남쪽으로 가서 낙양으로 향했으며, 석초는 전진해 구씨현을 압박했다. 낙양에서 견수가 패배하자 사마영이 마함을 보내 육기를 돕도록 했는데, 마함이 전사하고 육기의 군대가 격파되고 가숭 등 16명이 참수되는 등 큰 패배를 하자 석초는 숨어서 도망쳤다.
사마예가 죽고 사마영이 승상이 되자 분무장군을 지내면서 사마영의 명령으로 군사 5만 명을 거느리고 낙양으로 가서 12개의 성문에 주둔했다. 사마영이 권력을 휘두르면서 인망을 잃자 사마월이 사마영을 토벌하기로 하면서 계엄령을 내리자 석초는 업성으로 달아났다.
사마월이 혜제를 등에 업고 사마영을 토벌하기 위한 군사를 이끌자 사마영의 명령으로 5만 명을 이끌고 탕음에서 혜제가 있는 군대를 공격해 혜소를 죽이고 혜제의 신병을 확보했다. 혜제가 배고파 하자 물을 올렸고 왕준, 사마등이 사마월을 도와 사마영을 공격하기로 하자 사마영의 명령으로 왕진과 함께 왕준을 공격했지만 왕준이 보낸 기홍에게 평극에서 패퇴했다.
시기는 알 수 없으나 거기장군도 지냈고 305년에 사마월이 황제의 명을 받았다고 칭하면서 유교를 안북장군, 기주자사로 전속시키도록 했는데, 유교가 황제의 명이 아니라면서 군대를 내서 거부했다. 석초는 왕천 등을 이끌고 하교에 진을 쳐 유교의 원군이 되었으며, 사마월을 지지한 유곤. 사마효 등이 왕준에게 군사를 빌려 황하를 건너 공격하자 형양에서 전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