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명 | 손병주(孫炳柱) |
일본식 이름 | 모무라 헤이주(茂村炳柱) |
생몰 | 1921년 5월 1일 ~ 1943년 8월 21일 |
출생지 | 경상남도 울산군 울산읍 생후동 |
사망지 | 경상남도 울산군 |
추서 | 건국훈장 애족장 |
1. 개요
한국의 독립운동가. 1995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2. 생애
손병주는 1921년 5월 1일 경상남도 울산군 울산읍 생후동에서 태어났다. 그는 1939년 6월 일본 도쿄의 연수학관(硏數學館) 학생으로 재학하던 중 나가사키의 간조농학교(諫早農學校) 선배인 이상만(李相晩)·박근철(朴根澈)·심재인 등과 함께 민족정신을 고취하여 독립을 쟁취할 목적으로 ‘3인조 지하조직’을 결성하여 독립운동 지침과 지하조직 강령을 작성하고 조직원을 33명으로 정했다. 1940년 4월 신입생 입학 자축회가 개최되자 참석한 그는 신입생들을 대상으로 다음과 같이 연설했다.“우리 조선학생은 조선인의 문화향상과 동포를 위해 공부해야 한다. (중략) 또 일본인의 조선인에 대한 모멸은 그 원인이 조선문화가 열등한 데 있다. 그러나 만약 조선이 일본 식민지가 아니었다면 문화도 이와 같이 저열하지 않았을 것이고 오늘과 같은 차별적 모욕도 받지 않았을 것이다. 따라서 무엇보다도 조선을 일본의 식민지에서 벗어나게 함이 가장 중요하다. 조선의 독립은 쉬운 일이 아니지만 조선인이 모름지기 조선인 정신을 견지하여 앙양함과 동시에 조선 독립을 목표로 서서히 시기가 도래하는 것을 기다려야 한다”
이후 3인조 지하조직은 식민지정책과 한인에 대한 민족차별정책, 창씨개명을 통한 민족혼 말살정책 등 일제정책을 규탄하고 이에 대한 대책으로 일본인에 대한 적개심 함양과 유사시에 대비한 무술 연마와 지하운동 전개, 일본의 전쟁 수행에 불리한 유언비어를 유포하여 인심 교란과 전의를 상실시킬 것을 목적으로 삼았다. 그러나 얼마 후 경찰에 체포되어 한국으로 송환된 그는 경북 예천, 영주, 안동경찰서와 대구형무소에서 2년여 간 수감되어 가혹한 고문을 받다 1943년 5월 7일 대구지방법원에서 치안유지법 위반 혐의로 징역 1년 6개월, 집행유예 3년을 선고받고 출옥한 뒤 3개월 만인 8월 21일 고향에서 사망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5년 손병주에게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