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불교 대각여래위 | |||||
소태산 박중빈 | 정산 송규 | 대산 김대거 | 주산 송도성 | 상산 박장식 | |
용타원 서대인 | 대타원A 이인의화 | 각산A 신도형 | |||
A 2024. 5. 7 동시 추존 |
<colbgcolor=#ffc224> 원불교 대각여래위 송도성 宋道性 | Song Doseong | |||
출생 | <colbgcolor=#fff,#121212>1907년 12월 23일 | ||
경상북도 성주군 유곡면 구성리 (현 경상북도 성주군 초전면 소성리 박실마을)[1] | |||
사망 | 1946년 3월 27일 (향년 38세) | ||
법호 | 주산(主山) | ||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6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 <colbgcolor=#ffc224><colcolor=#221f20> 대각여래위 추존 | 1991년 | |
본관 | 야성 송씨[2] | ||
속명 | 송도열(宋道悅) | ||
족보명 | 송홍택(宋鴻澤) | ||
자 | 경가(景可) | ||
가족 | 아버지 구산 송벽조(久山 宋碧照)[3] 어머니 준타원 이운외(準陀圓 李雲外)[4] 형 정산 송규(鼎山 宋奎) 조카사위 박동묘[5]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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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獻心靈父 許身世界
常隨法輪 永轉不休
마음은 스승님께 드리고 몸은 세계에 바쳐서
일원의 법륜을 힘껏 굴려 영겁토록 쉬지 않게 하리라
16세에 지은 출가시
常隨法輪 永轉不休
마음은 스승님께 드리고 몸은 세계에 바쳐서
일원의 법륜을 힘껏 굴려 영겁토록 쉬지 않게 하리라
16세에 지은 출가시
소태산 박중빈 대종사의 사위이자 정산 송규 종사의 친동생. 원불교 창립의 핵심 역할을 한 청년 지도자이자 전재동포구호사업에 매진하다 순직한, 실천하는 종교인의 표상이다.
2. 일생
"내가 송 규 형제를 만난후로 그들로 인하여 크게 걱정하여 본 일이 없었고, 무슨 일이나 내가 시켜서 아니한 일과 두번 시켜 본 일이 없었다. 그러므로 나의 마음이 그들의 마음이 되고 그들의 마음이 곧 나의 마음이 되었다" - 소태산 대종사, 대종경 신성품 18장 |
정산 송규 종사의 친동생으로, 1907년 경상북도 성주군 유곡면 구성리(현 성주군 초전면 소성리 박실마을)에서 아버지 구산 송벽조(久山 宋碧照)와 어머니 연안 이씨 준타원 이운외(準陀圓 李雲外) 사이의 2남 1녀 중 차남으로 태어나, 고향에서 유년기를 보냈다. 13살 때 형을 따라 소태산 박중빈 대종사를 만나 법문을 듣고 제자가 되었으며, 16살에 출가를 단행하고 22살 때 대종사의 장녀인 청타원 박길선 종사와 결혼하였다.
형인 정산 종사 등과 더불어 영광, 변산, 익산 등을 오가며 대종사를 모시고 원불교 창립에 중추적인 역할을 하였으며, 특히 대종사의 법문을 빠짐없이 기록하여 훗날 많은 자료를 남겼다.[6] 19세에 원불교 최고 의결기관인 수위단 단원이 되었고, 이후 원불교 최초의 월간지 발행, 교무부장 역임, 영광지부장 등을 거쳐 31세에 교정원장[7]을 맡았다. 여름과 겨울에 선 훈련에 심혈을 기울였고, 좌선 시간에 철주부동의 자세로 진경에 드는 모습을 보이며 많은 수도인들을 키워냈다.
1945년 해방 이후 해외에 나가있던 동포들이 대거 귀국하였는데, 오갈곳 없는 귀환 동포들을 돕는 전재동포구호사업의 총 책임을 맡았다. 당시 구호사업을 시작한 수십개 단체 중 사업을 끝까지 이어간 곳은 원불교를 비롯하여 몇 군데에 지나지 않았고, 이에 감명한 백범 김구와 인연을 맺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사업을 진행하던 중 전염병 발진티푸스에 감염되었으나 그 사실을 모른채 업무에 매진하며 과로하다 1946년 38세로 세상을 떠났다.
사후 1954년에 출가위[8]로, 1991년에 대각여래위로 추존되었다. 38세의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났음에도 불구하고, 수행인으로 지도자로 만인의 인정을 받은 것이다.
[1] #[2] 충숙공파(고산리)-단구공파 30세 홍(鴻) 항렬.[3] 본명 송인기(宋寅驥). 자는 치원(致遠), 법호는 구산(久山)이다. 1876년 경상도 성주목 유곡방 고산리(현 경상북도 성주군 초전면 고산리)에서 아버지 송성흠(宋成欽, 족보명 송성흠宋性欽, 법명 송훈동)과 어머니 전주 이씨 이인엽(李仁燁)의 딸 사이의 무녀독남으로 태어나 박중빈의 권유로 1919년 10월 20일 전라남도 영광군 백수면(현 백수읍) 길용리로 이주하여 본적을 두었다. 이후 전라북도 진안군 마령면 평지리로 이주하여 살면서 불법연구회 진안군지부 교무 겸 전도를 역임하다가 1939년 한반도 남부 지방에 큰 가뭄이 들자, 그해 7월 14일 '조선에서 재해가 빈발함은 요임금과 탕왕의 시대에도 없던 일로 천황은 은사를 베풀고 천지신명께 기원하라'는 취지의 편지를 쇼와 천황에 보냈다. 이로 인해 체포되어 1940년 3월 13일 전주지방법원 형사부에서 소위 불경 혐의로 징역 1년형을 선고받고# 광주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른 바 있다.#[4] 연안 이씨 이병균(李炳均)의 딸이다.[5] 누나가 전주 이씨 정석군(貞石君) 이융생(李隆生)의 후손인 이해철(李海哲)과 혼인했는데, 슬하 셋째 딸이 박동묘와 혼인하였다.[6] 대종사 법문집인 대종경의 간행에 있어서 구타원 이공주 종사와 더불어 핵심적인 역할을 하였다.[7] 원불교의 국무총리 격.[8] 원불교 6단계 법위 중 대각여래위 바로 아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