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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3-02-26 22:17:24

수리야바르만 2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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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메르 제국 제17대 국왕
수리야바르만 2세
ព្រះបាទសូរ្យវរ្ម័នទី
파일:external/vignette3.wikia.nocookie.net/latest?cb=20120614204513?.jpg
<colbgcolor=#6B8E23><colcolor=#fff,#fff> 출생 11세기
파일:크메르 제국 국기.svg 크메르 제국 앙코르
사망 1150년
파일:크메르 제국 국기.svg 크메르 제국 앙코르
재위 기간 크메르 제국 국왕
1113년 ~ 1150년 (37년)
대관식 1113년
전임자 다란인드라바르만 1세
후임자 다란인드라바르만 2세
부모 아버지 : 크시틴드라디티야
어머니 : 나렌드라락쉬미
종교 힌두교

1. 개요2. 생애3. 대중매체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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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크메르 제국의 국왕. 현재 캄보디아 최고의 건축물인 앙코르 와트를 만든 업적으로 유명하다. '수리야바르만'이란 칭호의 의미는 태양의 보호자란 뜻이다.

2. 생애

9세기에 세워진 크메르 제국은 몇 백여년 동안 꾸준하게 성장해왔지만, 12세기 들어서는 군소 왕국들에게 치이는 한편 내전에 시달리면서 상당히 어지러운 세월을 거쳐야만 했다. 이 상황 한복판이었던 1113년에 즉위한 인물이 바로 수리야바르만 2세였다. 수리야바르만 2세는 제국의 지방 통치력이 약해진 틈을 타서 지방 거점에서 힘을 길렀고, 어느 정도 세력을 모으자 늙고 무능한 왕 다란인드라바르만 1세에게 정면으로 도전장을 내밀었다. 수리야바르만 2세는 끝끝내 1113년에 다란인드라바르만 1세를 몰아내고 크메르 제국의 왕위를 찬탈하는 데 성공하게 된다.

제국 재건의 원대한 꿈을 숨길 생각이 없었던 수리야바르만 2세는 즉위 직후부터 정복 활동에 매진했다. 하지만 수리야바르만 2세는 생각만큼 운이 좋지 못했다. 바로 인근의 참파베트남리 왕조가 상당한 세력을 여전히 유지하면서 크메르 제국을 틈틈히 견제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1127년 수리야바르만 2세는 리 왕조의 신종에게 봉신국이 되어 조공을 바칠 걸 요구했지만 신종이 이를 거부하자 전쟁을 일으켰다. 수리야바르만 2세는 1128년 2만 명의 대군과 700여 척의 대함대를 이끌고 리 왕조로 쳐들어갔다. 4년 후인 1132년에는 참파와 동맹을 맺어 힘이 약해진 대월을 한꺼번에 때리자는 협약을 체결, 결과적으로는 베트남에서 가장 풍요로운 성들 중 하나였던 응에안 성을 함락하고 해안가를 약탈하는 성과를 올리기까지 했다. 하지만 베트남 북부를 점령하는 데에는 실패했고, 결과적으로 리 왕조를 복속시키는 데에도 성공을 거두지는 못했다.

참파와 크메르 제국의 일시적인 동맹은 1138년까지 이어졌다. 하지만 이후 참파가 독자적으로 리 왕조와 화해하고 평화 조약을 맺자 크메르와 참파와의 관계도 바로 틀어졌다. 수리야바르만 2세는 독자적으로 리 왕조를 공략하려 시도했지만 실패했고, 그 참에 관심을 안그래도 괘씸하던 참파에게 돌려버렸다. 의외로 참파 초기 원정은 술술 풀리는가 싶었는데, 1145년에는 공격 대상을 리 왕조에서 참파로 돌려 참파를 침공, 참파의 국왕이던 자야 인드라바르만 3세를 죽이고 수도 비자야를 약탈하는 성과를 거두기까지 했다. 하지만 여기서부터 문제가 잘 풀리지 않았다. 자야 인드라바르만 3세가 죽은 직후 새로 즉위한 자야 하리바르만 1세가 죽을둥살둥 크메르 제국에 반격하면서 크메르 군대가 참파 지방에 묶여버렸고, 수리야바르만 2세가 참파의 꼭두각시 왕으로 앉혀놓았던 하리데바 왕자가 자야 하리바르만 1세에게 탈탈 털리면서 참파 지방에 대한 영유권을 완전히 잃어버렸던 것이다.[1] 수리야바르만 2세는 1150년까지 참파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계속 원정을 계속했지만 결과적으로는 실패로 돌아갔다.
파일:d62e8410759160caa2db7dee76452cb1.jpg파일:cambodia_angkorwat_11_8_2014_101_SW_1_rs_wm_suryavarman_procession_suryavarman_court.jpg
전성기 시절의 앙코르 와트 앙코르 와트에 새겨진 수리야바르만 2세의 부조.
리 왕조. 참파에 대한 원정은 썩 성공적이지 못했지만 아무 성과도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수리야바르만 2세는 어쨌든 참파의 수도 비자야를 함락해 약탈하기까지 성공했고, 리 왕조와 참파의 국력을 확연히 약화시켜놓았으며 당대 동남아 최강국의 위치를 굳건히 고수할 수 있었다. 수리야바르만 2세는 이렇게 이룩한 국력을 바탕으로 왕성한 외교 활동을 펼쳤다. 1114년에는 기존의 패권국 촐라 제국의 황제 쿠로퉁가 촐라 1세에게 보석을 바치는가 하면 1116년에는 저멀리 중국에 사신을 보내 동남아의 군주로 인정받기까지 했다. 대외적으로는 동남아의 유일한 패권국으로 인정받았던 셈이다. 이 덕에 촐라와 중국에서 여러 문화들이 빠르게 유입되며 건축, 복식, 식생 등 여러 분야에서 폭등적인 발전이 일어났고 이는 크메르 제국의 발전에 정점을 찍는 계기가 되어주었다. 그 유명한 앙코르 와트가 지어진 것도 바로 이 수리야바르만 2세의 치세였다.

수리야바르만 2세는 참파에 대한 군사 원정 도중인 1150년 경 사망했다.[2] 수리야바르만 2세가 죽자 왕위는 다란인드라바르만 2세에게 넘어갔다. 하지만 다란인드라바르만 2세와 그 후계자들은 수리야바르만 2세에 비해 유약했고, 크메르 제국은 이후 참파에게 수도 앙코르가 기습당해 약탈당할 정도로 흔들린다. 하지만 그런 상황에서 캄보디아 최고의 성군이라 꼽히는 자야바르만 7세의 등장으로 다시 황금기를 맞게 된다.

3. 대중매체에서



[1] 그 외에 밤사라자라는 이름의 배신자가 자야 하리바르만 1세를 배신하고 참파를 뒤엎으려 시도했지만, 결국 실패하고 리 왕조로 도망쳤다. 밤사라자는 훗날 자야 하리바르만 1세에게 살해당했다.[2] 당시 그가 이끌던 크메르 원정군은 베트남 군대에게 패배하고 쓸쓸히 귀환해야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