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쉬스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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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쑤성 영도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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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화인민공화국 난징 군구 사령원
광저우 군구 사령원
본명 <colbgcolor=#ffffff,#191919>허석우(許釋友)
정체 許世友
간체 许世友
한국식 독음 허세우
영문 Xu Shiyou
한우(漢禹)
출생 1905년 2월 28일 청나라 후베이성 마성현
사망 1985년 10월 22일 중화인민공화국 장쑤성 난징
국적 청나라 파일:청나라 국기.svg
중화민국 파일:중화민국 북양정부 국기.svg
중화민국 파일:대만 국기.svg
중화인민공화국 파일:중국 국기.svg
학력 항일군정대학
직업 군인, 정치가
최종계급 상장(上將)
종교 무신론

1. 개요2. 생애3. 가족4. 기타5. 주요경력6.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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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중화민국의 공산주의 혁명가, 중화인민공화국의 군인.

2. 생애

2.1. 초기 이력

1905년 2월, 호북성 마성현 허가와에서 빈농의 아들로 태어났다. 8세에 숭산 소림사에 들어가 8년 동안 무술을 익혔으며 18반 무예와 비첨주벽의 무공을 터득한 후 하산하여 고향에서 지주를 때려죽이고 수배자가 되었다. 기골이 장대하고 금니로 유명하였으며 소림사에서 수련한 과거 때문에 <수도승 사령관>으로 불렸다. 그러다가 우페이푸의 군대에 들어가 군인이 되었으며 1926년, 국민당의 1차 북벌이 시작되자 국민혁명군에 가담하여 국민혁명군 독립 1사단 1연대 중대장이 되었다. 1926년 9월, 공산주의청년단에 가입함으로 공산당에 합류했으며 1927년 중국공산당에 가입, 국공결렬 이후 공산군의 일원이 되어 국민혁명군과 교전했다.

1932년, 홍군 4방면군 4군단 12사단 34연대장에 임명되었으며 이 부대는 장궈타오가 지휘하는 악예환(호북성-하남성-안휘성) 소비에트 소속이었다. 제4차 초공작전에서 국민당군의 공세가 이곳에 집중되자 7차례에 걸쳐 결사대원으로 전투에 나섰다. 제4차 초공작전은 일본의 침략 탓에 국민당군이 중도에 작전을 취소했고, 결과적으로 홍군의 승리로 끝났으나 피해가 너무 컸고, 이 때문에 악예환 소비에트는 1935년 사천성으로 근거지를 옮겼다.

제5차 초공작전으로 보구, 오토 브라운 등의 공산당 지도부가 있던 강서 소비에트 또한 멸망함에 따라 그 휘하에 있던 제1방면군도 대장정에 올랐고, 사천성에서 장궈타오의 제4방면군과 합류하게 되었다. 이당시 제1방면군은 대장정중에 집중공세를 받아 병력이 장궈타오의 부대의 1/10 수준으로 축소되어 있었다. 마오쩌둥은 장정중 귀주성에서 열린 준의회의에서 보구와 오토 브라운을 밀어내고 당권을 되찾았고, 북쪽으로 장정을 계속해서 사천성에서 장궈타오의 제4방면군과 만났다. 마오쩌둥은 장궈타오와 만나자 이후의 전략을 두고 갈등을 빚었다. 장궈타오는 사천성에서, 마오쩌둥은 섬서성에서 각각 근거지를 건설하자고 주장했는데, 의견이 해소되지 않자 거느린 병력수가 더 많은 장궈타오는 마오쩌둥을 체포해 처형하고 당권을 장악하려고 했다. 이 음모는 조기에 마오쩌둥에 알려져서 마오쩌둥은 휘하부대를 이끌고 섬서성으로 미리 피해갔다. 홀로 사천성에 남은 장궈타오는 스스로 당지도부를 참칭하고 자신의 생각대로 사천성에서 해방구를 열었으나, 국민당군에게 개발살 나고 마찬가지로 마오쩌둥의 뒤를 따라 섬서성으로 쫓겨간다. 1936년, 장궈타오도 200여명의 패잔병만 거느라고 섬서성의 옌안 소비에트에 합류했고, 이때 쉬스유도 옌안에 도착했다. 쉬스유는 1936년 말에 항일군정대학에 입학하였다. 졸업 후 항일군정대학 교무부 부부장을 지냈다.

그런데 이미 마오쩌둥은 당내를 완전 장악하게 되었고, 마오쩌둥에 반항하던 장궈타오는 심하게 계속 비판받았으며, 장궈타오 휘하였던 제4방면군 출신들은 한직으로 돌았다. 쉬스유는 제4 방면군에서 죽 지내온 장궈타오의 추종자였기 때문에 이런 분위기를 참을 수 없었고, "우리 보스(장궈타오)를 모시고 옌안을 떠나 사천성에서 독자적인 유격전을 벌이자"고 4방면군 출신들을 선동했다. 이런 계획이 옌안 지도부에게 발각되어 1937년에 반당조직 음모혐의로 체포되어 투옥되었다. 이때 옌안에서 결혼한 두번째 아내가 이혼을 선언했다.

하지만 자신의 수족들이 투옥된 장궈타오가 자신도 같은 운명이 될 것을 두려워하여 1938년 옌안을 탈출, 국민당으로 전향하면서 당지도부에서는 "마오쩌둥이 지나치게 장궈타오를 몰아붙인거 아니냐"는 비판이 나왔고, 마오쩌둥이 이를 시인하고 투옥된 장궈타오 추종자들에게 관용을 베풀면서 쉬스유에게도 다시 기회가 왔다.

2.2. 중일전쟁국공내전

1937년 중일전쟁이 발발하자 팔로군으로 편제되어 항일전쟁에 참가했다. 1938년 팔로군 129사단 386여단 부여단장에 임명되어 평원 지역에서 유격전을 전개했으며 1940년 팔로군 산동군단 3여단장과 군단 참모장에 임명되었다. 1942년 교동 군구 사령관에 임명되었다. 정풍운동 기간 중 장궈타오의 부하였다는 이유로 극심한 박해를 받아 숙청당할 위기에 놓였으나 마오쩌둥이 쉬스유를 직접 불러 장궈타오를 따라가고 싶은지 아님 자신을 따르고 싶은지를 물었고 이에 눈물을 흘리며 마오쩌둥을 따르고 싶다고 말하여 이후 마오쩌둥에게 충성을 바치게 되었고 장궈타오를 기회주의자, 협잡꾼으로 맹비난하였다.
파일:중일전쟁허세우.jpg
1939년의 쉬스유

종전 후 1947년, 화둥 야전군 9군단 사령관에 임명되어 우라이 전투, 멍량구 전투 등에 참가했다. 이후 화동야전군 산동병단을 이끌고 탄전린과 함께 산동전선에서 국민정부군과 교전했다. 교동, 연주 등을 함락하였으며 마오쩌둥의 지시를 받고 산동성의 성도 제남을 공격하였다. 1948년 9월 16일부터 시작된 제남 전투에서 쉬스유는 국민정부군을 격파하고 8만 4천명을 섬멸, 9월 24일 제남성과 2수정구 사령부를 점령하고 9월 28일 사령관 왕야오우를 체포하였다.

중공 건국 이후 요직을 거쳤으며 1950년 산동군구 사령원에 임명, 1953년 4월까지 재임하였으며 1953년 4월, 중국 인민지원군 제3병단 사령원에 임명되어 6.25 전쟁 막판에 잠시 참전했다. 1954년 2월에 귀국, 화북군구 제2부사령원에 임명되었으며 1954년 10월, 인민해방군 부총참모장에 임명되어 1959년 10월까지 재직했다. 1955년 3월, 난징군구 사령원에 임명되어 20년 가까지 재직하였으며, 1959년 9월, 국방부 부부장에 임명, 1978년 3월까지 이 역시 20년 가까이 재임하였다.

2.3. 문화대혁명

파일:문혁허세우.jpg
문혁 시기의 쉬스유

1967년 초 반동적 파벌을 이끌고 있다는 이유로 고발당해 홍위병들에게 붙들려 경서빈관에 억류당하는 수모를 겪었다. 이후 마오쩌둥에게 홍위병들이 원로들에게 큰 모자를 씌우고 박해한다고 울분을 토했으며 마오쩌둥이 직접 쉬스유의 혐의를 풀어주어 무사할 수 있었다. 이후 난징 군구 사령관으로 재직하면서 홍위병들을 강도라고 맹비난, 1967년 초부터 1970년까지 장쑤성난징에서 강경 조반파에 대한 강력한 탄압을 실시했다. 1967년 주중 영국 대표부 점령 사건 이후 5.16 분자 색출운동에 나서서 1년에 걸쳐 10만명에 달하는 사람들을 좌경이단으로 몰아 숙청하고 많은 사람들을 투옥, 노동수용소 수감, 사형했다. 난징 시민 100만명 중 2만 7천명이 목숨을 잃었으며 조반파로 의심되는 간부들을 직접 심문하고 일부는 직접 고문하기도 했다. 난징 대학교의 교수진 중 삼분의 일이 좌경분자로 몰려 숙청당했고 이중 21명이 사망했다. 난징 삼림학교에선 90%의 교사들이 숙청당했다.

1967년 4월 28일, 마오쩌둥의 지시로 소집된 당중앙위원회 9기 1중전회에서 중공중앙 정치국 위원으로 선출되었다. 마오쩌둥이 지나치게 강성해진 조반파를 숙청하기로 결정하면서 그의 신임을 얻었고 1967년 10월 1일의 국경절 행사에서 마오쩌둥의 바로 옆에 서는 영광을 누렸다. 마오쩌둥의 명령으로 구성된 강소성 당위원회 위원장으로 임명되었다.
파일:1973년허세우.jpg
1973년 10월, 중국 공산당 12전 대회에 참여한 쉬스유. 옆에는 장춘차오다.

1970년 8월 30일에 개최된 중국 공산당 10기 1중전회에서 중앙정치국 위원에 다시 선출되었다. 1971년, 마오쩌둥이 남부를 열차로 순회할 때 린뱌오, 린리궈571 공정을 발동하여 마오쩌둥에 대한 모반을 기도했는데, 정보를 접한 쉬스유는 선로에 10-20미터 간격으로 병사를 배치하여 암살팀이 접근하는 것을 막았고, 결국 린뱌오의 암살음모는 실패했다. 린뱌오 일가는 소련으로 도주하다가 몽골에 비행기가 추락하여 사망했다. 마오의 생명을 구했기 때문에 쉬스유는 마오의 신임을 톡톡히 받았다.

1973년 10차 전국대표대회에서 왕훙원이 당 부주석에 임명되어 마오쩌둥의 후계자로 부상한 것에 크게 불만을 품고 8월 21일 정치국 회의에서 마오쩌둥의 뒤를 이을만한 인물로는 저우언라이면 충분하다고 직언하였으나 조반파의 비판에 캉성, 예젠잉을 후보로 추가했다. 하지만 마오쩌둥은 쉬스유의 비판을 무시하고 왕훙원을 그대로 부주석에 임명했다.

1973년 12월 22일, 중앙군사위원회의 8대 군구 사령원 상호 교체 인사발령이 떨어짐에 따라 난징 군구 사령관에서 광저우 군구 사령관 딩성과 자리를 교체하여 광저우로 전근갔다. 이후 광동성 당위원회 1서기 웨이궈칭과 함께 덩샤오핑의 매우 강력한 지지자로 남았다. 1976년 1월 저우언라이 총리가 사망하자 그를 추모하기 위해 베이징으로 갔으나 천안문 사태가 발생하자 주더, 예젠잉, 리셴녠 등과 함께 4인방에게 밀려 이를 처리하기 위한 회의에 참석하지 못했다.

마오쩌둥 사망 후 장칭을 비롯한 4인방이 마오쩌둥을 독살했다고 주장하며 격렬히 대립하였다. 1976년, 4인방이 체포되자 4인방 지지자들이 상하이에서 봉기할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난징 군구 사령관으로 오래 재직했던 경험에 근거하여 이들을 제압할 준비를 하였다.

2.4. 말년

파일:1984년허세우.jpg
1984년 10월, 중국 공산당 12기 3중전회에 참석한 쉬스우, 그와 악수하는 사람은 시진핑의 아버지 시중쉰이다.

1978년 8월 19일에 개최된 당중앙위원회 11기 1중전회에서 정치국 위원에 재선출되었다. 1978년, 베트남과의 긴장 상태가 고조되자 12월 8일, 중앙군사위원회로부터 1979년 1월 10일까지 베트남 공격을 준비하라는 명령을 받았으며 이에 따라 12월 21일 광서성 난닝에 총지휘부를 설치하고 베트남 진공 작전을 준비했다. 1979년 중국-베트남 전쟁이 발생하자 인접 군구 사령관으로서 이를 실질적으로 지휘했다. 1982년 9월 12일부터 13일에 걸쳐 개최된 중국 공산당 12기 1중전회에서 중앙고문위원회[1] 부주임으로 선출되었다.

하지만 그가 지휘한 중월전쟁의 결과가 영 좋지 못했기 때문에, 더이상 승진을 못하고 국방부장이나 총참모장에 임명되지 못했다. 1980년 행해진 류사오치의 복권 행사에 참여하지 않음으로 불만을 표시하기도 했다. 또한 마오가 직접 주자파로 지목한 류사오치의 복권이 마오쩌둥의 명예를 심각하게 훼손한 것 역시 마오쩌둥에 대한 충성파였던 그를 자극한 것으로 보인다. 1985년 3월, 상하이 푸단대학 산하 화동의원에서 간암 진단을 받았으며 10월 22일, 난징군구 총의원에서 사망했다.

3. 가족

결혼을 세번했고, 3남 4녀를 두었다.

첫 아내 주시밍은 현모양처로 쉬스유의 노모를 모시고 첫아들 쉬광(1924-2013)을 키우며 살았으나, 쉬스유가 혁명활동중 생사가 불분명하자 노모가 "젊은 니가 어찌 독수공방하겠냐"고 개가시켰다. 사실 쉬스유도 옌안에서 재혼을 했으나 위에서 나온 것처럼 모종의 사건에 연루되자 둘째 아내가 이혼을 선언하였다. 이후 세번째 아내를 맞아 여러명의 자식을 두었다.

장남은 군에 있었으나 장군이 되지는 못했다. 장남은 2남 2녀를 두었는데 장녀가 군의관으로서 로켓군 대교[2]이다.

3남 허원조(援朝, 1951년생)는 중공군의 6.25전쟁 참전인 항미원조에서 딴 것으로 후에 아버지의 근무처였던 난징군구에서 소장까지 올랐다.

4. 기타

난징 군구사령관 시절, 고급장교도 사병과 똑같은 대접을 받아야 한다며 본인이 솔선수범하여 훈련, 짬밥, 오락 등의 활동에 사병과 똑같이 참여했다고 한다. 사병과 마찬가지로 군구사령관이 초병 노릇을 하기도 했다. #1958년

사망 직전 "나를 매장해 달라"는 유언을 남겼다. 원래 중국 법률은 무조건 화장을 강제했기 때문에[3] 이는 지켜지기 어려웠지만, 그의 유언을 들은 덩샤오핑은 "허장군은 수많은 공적을 남겼는데 나라에 요구한 것은 하나도 없다. 그러니 그 정도는 해줄 수 있지 않나"고 명령, 화장되지 않고 어머니의 곁에 묻혔다.

외모에서 풍기는 분위기뿐만 아니라 단순무식하고 우직한 성격이 꼭 장비를 연상시킨다는 평가가 많았다. 장비처럼 술을 좋아해서 음주전투를 하기도 했고, 국민당군과 교전중에 총상을 입었는데 자신이 직접 대검으로 총알을 빼냈다는 이야기도 있다. 이 양반의 생애를 찾아보면 이렇게 여러 재미있는 일화들이 많은데, 전장에서는 물불 안가리고 돌진하는 스타일로, 전형적인 맹장 타입이었다. 이렇게 소탈함이 있기 때문에 중국에서도 장비나 노지심, 이규처럼 인기가 많다.

원래 인민해방군에서 승진하려면 순환으로 정치장교참모직도 수행해야 하지만, 쉬스유는 평생 야전 지휘만 맡았고, 저우언라이조차 "쉬장군은 정위(정치장교)역에는 별로 맞지 않다"고 평가했다. 그가 총참모장이나 국방부장으로 승진하지 못한 이유는 중월전쟁의 졸전 탓도 있지만, 바로 이런 우직하고 단순무식한 성격때문이기도 했다. 그리고 보직상의 문제점도 존재한다. 총참모장이나 국방부장 같이 군 최고의 정점에 해당되는 보직에 앉으려면 모든 종류의 보직을 다 거쳐야 한다. 그런데 쉬스유는 정치장교 보직이 없다. 그렇기 때문에 총참모장이나 국방부장으로의 진급이 되지 못했던 것이다.

냉전시기 중월전쟁의 패전 때문에 총참모장에 승진못하자 부수상(부수상 덩샤오핑이 민간인 신분으로 총참모장을 겸임하다가 1980년 양더즈가 후임 총참모장에 임명되었음.) 덩샤오핑 앞에서 총을 빼들고 난동을 부리다 부상당했다는 대만발 보도가 있었는데 중앙일보 1980년 4월 29일자, 한국도 그렇지만 이당시 대만발 중공 뉴스는 아니면 말고식의 막장 보도가 많았다. 다만 중월전쟁의 고전에 함께 책임이 있는 쿤밍군구 사령관인 양더즈가 총참모장이 된 것에 대해서는 중국 내에서도 의문스럽게 생각하는 사람이 많았다. 쉬스유나 양더즈 모두 손실을 그다지 꺼리지 않는 유형이라서 중월전쟁 시에 중국군의 피해가 커졌다는 중국 내의 평가도 있다.

5. 주요경력

난징 군구 역대 사령원
파일:중국 인민해방군기.svg
1대 2대 3대
천이 쉬스유
(1954년 ~ 1973년 12월 22일)
딩성
광저우 군구 역대 사령원
파일:중국 인민해방군기.svg
2대 3대 4대
딩성 쉬스유
(1973년 12월 22일 ~ 1980년 1월)
오극화

6. 참고문헌



[1] 중국공산당 중앙고문위원회는 은퇴한 중국 공산당 원로 8인(덩샤오핑, 천윈, 보이보, 양상쿤 등)의 모임이다. 덩샤오핑, 천윈이 이 위원회의 주임을 맡던 시절엔 법치보다 '인치(人治)', 즉 권력자의 권위가 법과 제도보다 현실 정치에 끼치는 영향력이 더 강한 정치가 행해지는 시기였다. 일종의 중국식 원로원, 상황 정치를 8인 원로가 합의하여 구성한 것이며 마오쩌둥과 생사고락을 함께 했던 이 8인 원로들의 발언들 하나하나에 실린 힘은 중국 공산당의 수뇌부인 상무위원회를 이들의 의견을 처리하는 실무진 급으로 조종하는 역할을 했다. 이 특수기구는 중국공산당 중앙지도층의 신구교체를 처리하고, 젊은 관리들을 뽑아서 중국공산당 중앙위원회, 상무위원회에 진입시켜 실무를 보게하는 역할을 부여했다(즉 정식적인 국가주석은 따로있지만 주임을 맡던 덩샤오핑이나 천윈이 뒤에서 그 역할을 하고 당을 총관리하는 총서기도 후야오방 같이 따로 있지만 실제적 역할은 중앙고문위원회 실무 책임인 위원회의 상무부주임 보이보가 이 역할을 한 것).[2] 우리나라의 준장급[3] 1956년 마오쩌둥은 '장묘문화혁명'을 실시해 중국 내에서 매장을 금지하고 오로지 화장만 하도록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