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스테판 드 라 페르테(Stephen de La Ferté : ? ~ 1130년)는 프랑스 출신의 성직자이다. 샤르트르에 위치한 성 요한 골짜기 수도원(Abbot of Saint Jean en Vallée)의 대 수도원장이며, 보두앵 2세의 사촌이다. 그는 1128년 부터 1130년 그가 죽을 때 까지 예루살렘 라틴 총대주교였다.2. 생애
그의 전임자였던 고르몽 드 픽퀴니(Gormond de Picquigny)는 보두앵 2세와 굉장히 친밀했지만, 스테판은 왕과 친척임에도 불구하고 그다지 서로 협력하지 못했다. 왜냐하면 그가 과거 총대주교였던 다임베르트 다 피사(Dagoberto da Pisa)의 교회 권력 우위를 다시 주장하며 걸고 넘어졌기 때문이다. 그러면서 요구하길 당시 다임베르트와 예루살렘의 초대 국왕이었던 고드프루아 사이의 협정이었던 총대주교의 야파의 자치권 소유와 심지어 더 나아가 예루살렘 조차도 말이다. 고드프루아의 계승자인 보두앵 2세는 당연히 동의할 수 없어 항상 이행을 거부했고, 왕궁과 성묘 교회의 사이는 갈수록 악화에 악화를 거듭한다.그의 임기 동안에 1129년 교황청의 트루아 공의회에서 성전 기사단과 그들의 규칙이 채택됐다. 총대주교 스테판은 교황 호노리오 2세보다 "동방 문제와 그리스도의 가난한 기사들(성전 기사단)에 대해 더 잘 알고 있기 때문에" 허점이 발생할 경우 선 조치 후 보고로 결정해야 할 사람으로 지명되었다. 그의 교회 권력에 힘이 실리는 결정이었다.
하지만 1130년 봄 스테판은 병에 걸린다. 보두앵 2세가 죽어가는 총대주교를 병문안하여 "그가 어떻게 지내오?"하고 묻자, 스테판이 대답하길 "전하, 저는 전하께서 염원하는 것처럼 지내고 있습니다" 라고 했다. 스테판이 짧은 병상 생활 뒤 사망했기에 교회와 왕정사이의 크게 드러나는 분열은 없었다. 하지만 빠르게 급서한 총대주교의 죽음을 두고 그의 측근들은 독살을 의심했다. 그의 후계자인 기욤 드 말린(Guillaume de Malines)은 보두앵 2세의 정책과 모순되지 않은 경건하고 순종적인 사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