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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f00><colcolor=#fff> 크로아트 제12대 국왕 스테판 2세 Stjepan II. | |
제호 | 스테판 2세 (Stjepan II.,) |
출생 | 미상 |
사망 | 1091년 (향년 불명) |
재위 | 크로아트 왕국의 제12대 국왕 |
1089년 ~ 1091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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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크로아트 왕국 제12대 국왕.2. 행적
제10대 국왕 페타르 크레시미르 4세의 남동생인 고이슬라브의 아들이다. 고이슬라브는 당초 페타르 크레시미르 4세와 함께 크로아트 왕국의 공동 국왕이 되기로 예정되었지만, 선왕 스테판 1세 사후 의문사하면서 왕이 되지 못했다. 이에 대해 페타르 크레시미르 4세가 형제를 살해했을 거라는 소문이 돌았고, 교황 알렉산데르 2세가 마이나르드(Majnard)를 교황 특사로 파견해 이를 조사하게 하자, 페타르 크레시미르 4세는 12명의 장관과 함께 그 소문은 사실이 아니라고 맹세했고, 교황청은 이를 받아들여 페타르 크레시미르 4세가 크로아트 국왕으로 군림하는 걸 받아들였다.아버지가 사망한 후, 스테판은 별다른 행적을 보이지 않았다. 다만 1066년 페타르 크레시미르 4세가 성 스테판 수도원에 토지를 기부할 때에 반포한 기부 문서에서 왕자로 언급되었는데, 일부 학자들은 이를 근거로 그가 당시에도 남자 후손이 없었던 삼촌의 상속자로 지명되었을 거라고 추정한다. 그러나 1070년 드미타르 즈보니미르가 페타르 크레시미르 4세의 후계자가 되면서, 이것이 이뤄질 가망은 사라졌다. 스테판은 1078년 스플리트의 성 스테판 수도원에 수도사로 들어갔는데, 공식적인 이유를 아래와 같이 밝혔다.
한때 크로아티아의 명석한 왕자였던 나 스테판은 심각한 질병에 시달렸고, 내 죄에 대한 치료법을 찾기 위해 크로아티아 왕국의 명예로운 사제들을 불러 모았다. 나는 그들의 조언에 따라 나 자신을 돌보기 위해 성 스테판 수도원으로 옮겼다. 나는 그곳에서 모든 명예를 포기했으며, 수도원장에게 내가 무덤으로 들어간 후 기도할 때 나를 언급하라고 권했다.
그 후 수도원에서 조용히 지내던 스테판은 1089년 드미타르 즈보니미르가 자녀를 낳지 못한 채 사망하자 귀족들에 의해 수도원에서 꺼내진 뒤 크로아트 국왕에 옹립되었다. 그 후 2년간 잠자코 지내다가 1091년경 후계자를 지명하지 않은 채 사망했다. 스테판 2세 사후, 귀족들간의 왕위 분쟁이 벌어졌다.
이에 드미트라 즈보니미르의 미망인이자 헝가리 국왕 라슬로 1세의 누이인 엘레나 리예파가 오빠에게 크로아트 왕위를 이어받으라고 권고했고, 라슬로 1세는 이에 호응해 크로아트 왕국으로 진군해 사바강 북쪽에 위치한 슬라보니아를 점령하고 크로아트의 왕을 칭했으며, 자기 조카인 알모스 왕자에게 크로아트 영토의 관리를 맡겼다. 하지만 네레트바의 통치자 슬라비츠는 이에 반발해 지르노브니차 강 동쪽 지역을 장악하고 1095년 사망할 때까지 크로아트 국왕을 자처했고, 여러 크로아티아 귀족들은 라슬로 1세가 쿠만인들의 헝가리 침공에 맞서 군대를 물린 틈을 타 1093년 페타르 스나치치를 새 국왕으로 옹립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