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모에 미러 (일반/어두운 화면)
최근 수정 시각 : 2024-09-12 10:16:32

스티그 잉에 비요르네뷔에

스티그 잉에 비요르네뷔에의 수상 이력
{{{#!folding ▼ 둘러보기 틀 모음
개인 수상
베스트팀
파일:PFA_UK_logo.png
}}} ||
오르후스 GF
Aarhus Gymnastikforening
파일:AGFsportchef.jpg
<colbgcolor=#1a1c2b,#191919> 이름 <colbgcolor=#fff,#191919> 스티그 잉에 비요르네뷔에
Stig Inge Bjørnebye
출생 1969년 12월 11일 ([age(1969-12-11)]세)
노르웨이 인라네 주 엘베룸
국적
[[노르웨이|]][[틀:국기|]][[틀:국기|]]
신장 180cm
직업 축구 선수 (레프트백 / 은퇴)
축구 감독
축구 행정가
소속 <colbgcolor=#1a1c2b,#191919> 선수 엘베룸 포트발 (1985~1987 / 유스)
스트뢰멘 IF (1987~1988)
콩스빙에르 IL (1989~1992)
로센보르그 BK (1992)
리버풀 FC (1992~2000)
로센보르그 BK (1994 / 임대)
브뢴뷔 IF (2000 / 임대)
블랙번 로버스 FC (2000~2003)
감독 노르웨이 대표팀 (2003~2006 / 수석코치)
IK 스타르트 (2006~2007)
행정 로센보르그 BK (2015~2019 / 디렉터)
오르후스 GF (2021~ / 디렉터)
국가대표 75경기 1골(노르웨이 / 1989~2000)

1. 개요2. 경력
2.1. 선수 경력
2.1.1. 클럽 경력2.1.2. 국가대표 경력
2.2. 감독 경력
3. 기록
3.1. 대회 기록3.2. 개인 수상
4. 여담

[clearfix]

1. 개요

노르웨이 국적의 은퇴한 축구선수. 현재는 오르후스 GF의 디렉터이다.

2. 경력

2.1. 선수 경력

2.1.1. 클럽 경력

그의 축구 경력은 고향 클럽 엘버룸 IL의 유소년 선수로 시작되었고, 이후 1980년대 후반 스트룀멘 IF에 합류했다. 1989년 그는 콩스빙거 IL로 이적하여 노르웨이 최고 디비전에서 1군 주전 선수로 자리 잡았다. 콩스빙거에서 세 시즌을 보낸 후 1992년 로센보르그 BK로 이적했으며, 첫 시즌에 티펠리가엔노르웨이컵을 우승했다. 그는 릴레스트룀 SK와의 결승전에서 결승골을 넣었다.

그의 뛰어난 활약은 국가대표팀에 포함되게 했고, 리버풀의 감독 그레이엄 수네스의 관심을 끌어 로센보르그로 이적한 지 1년이 채 되지 않아 £600,000에 리버풀로 이적했다. 데이비드 버로우스의 대체자로 영입된 비요르네뷔는 1992년 12월 19일 코번트리 시티와의 경기에서 5-1로 패하며 데뷔했다. 프리미어리그 적응 초기의 어려움으로 많은 팬들이 그의 경기력을 의심했고, 그는 1994년 로센보르그로 임대 복귀했다.

1994-95 시즌에 로이 에반스 감독 하에서 비요르네뷔는 이전 시즌보다 훨씬 더 성공적인 경험을 했다. 그는 1군 정규 선수로 자리 잡았고, 1995년 4월 2일 볼튼 원더러스와의 EFL 컵 결승에서 2-1로 승리하는 경기에 출전했다. 그러나 1995년 4월 5일 사우스햄튼 FC와의 경기에서 다리가 부러져 시즌이 종료되었고, 스티브 하크니스로 교체되었다.

몇 달 동안 출전할 수 없었던 비요르네뷔는 1995-96 시즌에 리버풀에서 두 경기만 출전했다. 자신의 회복과 다른 왼쪽 레프트백들의 부상 덕분에 비요르네뷔는 다음 시즌에 자신의 자리를 되찾았고, 1996년 8월 17일 미들즈브러와의 경기에서 리버풀 첫 골을 넣었다. 그는 스탠 콜리모어로비 파울러에게 정밀한 크로스를 공급하며 프리미어리그 출범 이후 리버풀의 가장 강력한 타이틀 도전에 기여했다. 그는 스티브 맥마나만, 마크 라이트와 함께 PFA 올해의 팀에 포함되었다.

1998-99 시즌에 스티브 스턴튼의 영입과 제라르 울리에의 부임으로 인해 비요르네뷔의 1군 출전 기회는 제한되었고, 그는 사실상 배제되었다. 비요르네뷔는 그 시즌 리버풀에 남고자 하는 결심을 재차 확인하며 "내가 싸울 의지가 없었다면 최소 세 번은 리버풀을 떠났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스턴튼과 도미닉 마테오를 대체하지 못한 비요르네뷔는 2000년 덴마크 클럽 브뢴비 IF로 임대 이적을 결정했고, 브뢴비는 비요르네뷔가 있는 팀으로 덴마크 덴마크 수페르리가 2위를 차지했다.

리버풀을 떠나기로 결정한 그는 전 감독 그레이엄 수네스와 재회하며 블랙번 로버스로 £300,000에 이적했다. 첫 해에 프리미어리그로 승격되었고, 그 과정에서 2000년 11월 11일 포츠머스 FC와의 2-2 무승부 경기에서 클럽 유일의 골을 넣었다. 그의 마지막 트로피는 블랙번이 2002년 EFL 컵 결승에서 토트넘 홋스퍼를 2-1로 이긴 경기를 통해 얻었다.

컵 우승 이후 연이은 부상으로 그의 축구 경력은 결국 끝나게 되었다. 2002-03 시즌을 준비하던 중 훈련 중 사고로 눈 소켓이 골절되었다. 그는 복시를 호소하며 수술을 받았고, 7개월 동안 출전할 수 없었다. 2002년 12월 17일 위건 애슬레틱과의 리그컵 경기 중 또 다른 부상을 당했으며, 노르웨이에서 회복 중이던 그는 발 절단을 피하기 위해 응급 수술을 받아야 했다. 비요르네뷔는 2003년 3월 11일 은퇴를 발표했다. 블랙번의 감독 그레이엄 수네스는 그의 은퇴 결정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매우 슬픈 날이다. 내 생각에 스티그는 헌신적인 프로 선수의 모범이다. 그와 같이 훌륭한 프로 선수는 없었고, 그는 훌륭한 롤 모델이며 진정한 인간이다. 스티그는 훌륭한 경력을 쌓아왔으며, 그가 더 오래 뛸 수 있었을 것이라 느꼈기 때문에 훈련장에서의 사고로 그의 경력이 끝나야 한다는 것은 큰 유감이다."

2.1.2. 국가대표 경력

비요르네뷔는 노르웨이 대표로 75번 출전하며 한 골을 기록했는데, 이는 1993년 9월 8일 미국과의 친선 경기에서의 올림픽 골이었다.

그는 청소년, 21세 이하, B 대표팀을 거쳐 1989년 5월 31일 오스트리아와의 경기에서 성인 대표팀에 데뷔했다. 그의 대부분의 출전은 에길 올센 감독의 8년 임기 동안 이루어졌다. 올센의 지도 하에 노르웨이는 주로 높은 선수들을 활용한 "롱볼" 전술을 사용했다. 이 전술에서 비요르네뷔가 긴 패스를 요스테인 플로에게 보내는 플레이는 노르웨이에서 "플로 패스"로 알려졌다.

롱볼 접근법과 수비적인 전략으로 비판받기도 했지만, 올센 감독은 1994년과 1998년 월드컵 진출을 이뤄냈다. 비요르네뷔는 두 대회에 출전하여 총 7경기를 소화했다. 그는 1998년 월드컵 이후 국가대표에서 은퇴하여 국내 리그와 가족에 집중하려 했으나, 닐스 요한 셈브 감독의 설득으로 UEFA 유로 2000에 복귀했다.

2000년 6월 13일 스페인과의 경기에서 1-0으로 승리할 때는 출전하지 않았지만, 6월 18일 유고슬라비아와의 두 번째 조별 리그 경기에서 리버풀 동료 베가르 헤겜와 교체되며 35분간 출전했다. 그는 6월 21일 슬로베니아와의 경기에서도 출전하여 0-0 무승부를 기록하며 노르웨이의 탈락을 지켜보았다. 그의 마지막 국제 경기는 2000년 10월 7일 웨일스와의 월드컵 예선 경기로, 1-1 무승부를 기록하며 2007년 기준으로 노르웨이 출전 기록에서 9위에 올랐다.

2.2. 감독 경력

비요르네뷔는 노르웨이 축구협회에 의해 노르웨이의 새로운 감독 오게 하레이데의 수석 코치로 임명되면서 축구에 복귀했다.
2006년, 그는 IK 스타르트의 감독으로 톰 노르들리에의 후임으로 임명되며 코치직을 떠났다. 첫 시즌에는 성공을 거두어 팀이 유럽 대회에 출전했고, 비요르네뷔는 약 700만 크로네의 소득으로 시즌 최고 연봉 감독이 되었다. 그의 임기는 두 시즌 동안 지속되었지만, 2007년 9월 부진한 성적 때문에 해임되었고, 팀은 강등 위기에 처했다. 비요르네뷔의 후임으로 베니 레나르트손이 임명되었으나 팀의 잔류를 이루지 못했고, 스타트는 노르웨이의 2부 리그로 강등되었다.

2015년 3월 15일, 비요르네뷔는 로센보르그 BK의 스포츠 디렉터로 에릭 호프트운의 후임으로 임명되었다. 그는 2015년과 2016년에 로젠보르그와 함께 더블을 연속으로 달성하며, 노르웨이 축구 역사상 최초로 이를 이룬 클럽이 되었다.

3. 기록

3.1. 대회 기록

3.2. 개인 수상

4. 여담

4.1. WAGs

파일:Hege Frøseth.jpg
헤게 프뢰세트라는 핸드볼 선수와 결혼하여 슬하에 3명의 자녀를 두었다. 프뢰세트는 1992 바르셀로나 올림픽 은메달리스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