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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1-06-21 20:02:32

시궁쥐와 고양이와 네온 생쥐

1. 개요2. 본문
2.1. 종료2.2. 센트럴2.3. 보이지 않는 힘2.4. 힙2.5. 탈바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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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017년 프로젝트 스킨 발매와 동시에 공개된 프로젝트 세계관 관련 단편 소설이다. 리그 오브 레전드/스킨 세계관 참고 바람.

2. 본문

2.1. 종료

의사는 미끄러운 다리 위에서 크게 비틀거렸다. 한 손으로 낡아빠진 난간을 잡으려는 순간, 한쪽 다리에서 발목과 연결된 배선 장치가 끊겼다. 의사는 잠시 방향 감각을 잃었다. 그의 시야에 통근자들이 건너다니는 통행용 다리의 젖은 바닥과, 금속과 유리와 꺼지지 않는 빛이 조립체처럼 끝도 없이 늘어선 상부 센트럴이 훑듯이 지나갔다.

의사는 눈꺼풀을 깜박여 눈부심을 밀어내고 증강체 발을 재연결했다. 증강체 회로 속에 지난번 사용자의 기억이 희미하게 새겨져 있었다. 비싼 거였는데…

게다가 사이즈도 너무 크지. 의사 자신의 마음이 그 기억에 퉁명스럽게 대꾸했다. 증강체 발은 상부 섹터의 어느 부자 환자가 쓰던 중고품이었다. 뒷골목 무허가 의사에게 크레디트를 주었다가는 추적당할까 봐 겁이 났던 것이다.

증강체를 받고 나서 다섯 번도 넘게 프로세서를 세척했지만, 그 실리콘 조직 속에는 여전히 이전 주인이 느꼈던 인상이 남아 있었다. 마치 어떻게 해도 지워지지 않는 지문처럼. 의사는 불평 어린 신음을 내뱉으며 그 기억을 털어버렸다. 인간의 육체에 기존의 일반 해부학이 감당할 수 없는 기술을 억지로 끼워 넣으면 어떻게 되는지를 상기시키는, 불유쾌한 존재였다.

갈수록 숱이 줄어들고 있는 의사의 머리 위로 물방울이 흘러내리더니 마이크론 안경 뒤편으로 스며드는 바람에 다리 저쪽 편의 불빛이 흐릿하니 잘 보이지 않게 되었다. 오늘 아침 공지사항 목록에 습기 응결은 없었는데. 하기야 오늘 갑자기 들이닥친 이 상황에서는 준비가 되지 않은 것이 너무 많았다. 의사는 가슴 주머니에 넣은 생물학적 불활성 플라스틱 슬리브를 어루만졌다. 무기급 물건이었다. 의사가 20레브(rev) 전 자신에게 약속했던 은퇴 생활을 누리기에 충분했다.

의사는 하부 섹터에서 상부 센트럴의 기계화 승강기로 이어지는 다리의 한편, 두툼한 금속과 섬유 강화 플라스틱으로 만들어진 바닥에 홀로 서 있었다. 의사와 함께 걸어왔던 통근자 무리는 이미 전이 시장의 어두컴컴한 좌판과 그늘진 뒷골목으로 흘러들 듯 사라진 후였다. 의사는 다시 한번 불평의 신음 소리를 내고는 절뚝거리면서 서둘러 걷기 시작했다. 물방울은 이제 물줄기가 되어 얼굴로 흘러내렸고, 그는 한 손으로 물을 훔쳐냈다. 의사는 나이가 들긴 했지만 진짜 비가 무엇인지를 기억할 정도로 늙지는 않았다. 지금 떨어지는 물줄기는 무수한 유기체의 호흡 속 습기가 차곡차곡 모여 물로 응결된 것에 불과했다.

의사의 뒤편에서 승강기가 움직이며 나는 윙윙윙윙 소리가 들리더니 간격이 차츰 느려졌다. 증강체를 여기저기 단 인간의 또 다른 무리가 미로처럼 복잡한 시장으로 들어서려는 참이었다. 의사는 가슴팍의 은퇴 보장 패키지를 한 번 더 어루만지고는 조심스럽게 흘끗 뒤를 돌아보았다.

공압 장치가 쉬이익 소리를 냈고, 승강기 문이 열리면서 어두컴컴한 내부와 개성 없이 밋밋한 얼굴들의 바다가 드러났다. 의사는 참고 있던 숨을 내뱉았다.

“전이 지대입니다. 조심해서 이동하십시오.” 디지털 합성 음성이 흘러나왔다.

사람들은 각자 라이트 쉐이드를 작동시키고 합성 듀베틴 천으로 만든 후드를 뒤집어써서 떨어지는 물줄기와 상부 센트럴의 압도하는 듯한 번쩍임을 막았다. 그러고는 잘 훈련된 생쥐 무리처럼, 열심히 종종걸음을 쳐서 다리로 올라왔다.

그때였다. 의사의 눈에 야수를 떠올리게 하는 금속성 그림자가 들어온 것은. 그림자는 주변의 군중보다 머리 하나는 더 컸다.

공포 때문에 숨이 가빠졌고, 뜨거운 숨결에 안경이 부옇게 흐려졌다.

그림자는 밝은 쪽으로 나왔다. 호리호리한 체격은 온통 어두운 빛깔이었고, 묵직한 서보 장치(servo) 위로 늘어뜨린 탄소 섬유 근육은 강단 있어 보였다. 새까만 가슴판은 위쪽에서 내려오는 빛을 흡수해 버렸다. 양극산화처리된 강철로 만든 짙은 빛깔 목에는 야생고양이 같은 모피 깃이 휘감겨 있었다. 의사는 그 텁수룩한 옷깃을 알아볼 수 있었다. 하지만 정작 의사의 증강되지 않은 약한 뼈들이 덜걱거릴 정도로 의사를 겁먹게 만든 것은 그림자의 얼굴을 가린 특색 없는 가면이었다. 표면에 흘러내리는 물줄기가 진동하는 홀로그램의 빛을 반사할 때에만 얼핏얼핏 드러나는 가면이었지만, 의사는 알 수 있었다.

카다 진이다.

의사는 뒷걸음질을 쳤으나 또다시 금속 바닥판에서 미끄러졌다. 허우적대며 다리 난간을 붙잡으려다 손가락 관절 부분이 긁혀서 까졌다. 군중은 물줄기가 떨어지고 빛이 어지러운 다리를 조금이라도 빨리 벗어나는 것 외에는 관심이 없었다. 그들은 의사의 온몸을 죄어오는 공포는 아랑곳하지 않고 그를 밀치며 우르르 지나갔다.

의사는 양손과 무릎을 재빨리 놀려 앞으로 기어갔다. 하지만 진짜 발들과 금속 발들이 연이어 의사의 손을 밟아 다리 바닥의 쇠창살에 짓눌러 버렸다. 의사는 더 나아가지 못했다. 의사의 모습을 가리던 군중은 차츰 수가 줄었고, 이윽고 그의 몸뚱이가 추격자에게 노출되었다. 의사는 덜덜 떨리는 손으로 눈의 물기를 닦아냈다. 군중과의 난리 통에 안경은 어디론가 날아가 버렸다. 눈물에 피가 섞여 있었다. 시야가 잠시 또렷해졌다. 습기 변환기가 보이자 순간 구원을 받은 기분이었다. 변환기 통풍구에서 하부 섹터의 퀴퀴하고 습기 찬 공기가 뿌연 구름처럼 뿜어져 나왔다.

의사가 안식처처럼 느껴지는 변환기에 막 도달했을 무렵, 군중의 마지막 무리가 다리를 빠져나갔다. 의사는 몸을 웅크리고 제대로 벌어지지 않는 입술 사이로 힘겹게 숨을 내뱉었다. 미궁 같은 전이 시장이 바로 몇 미터 앞에 있다. 그 복잡한 구조 안으로 들어갈 수만 있다면, 저 끈질기게 따라오는 그림자를 피할 수 있다.

습기 변환기가 공기를 내뿜으며 내는 쉭쉭 소리가 느려졌다. 마지막 통근자가 전이 시장 안으로 사라지면서, 아무도 없는 좌판이 하나 보였다. 좌판은 거울유리로 만들어져 있어 의사의 뒤편에서 금속성 그림자가 기다란 펄스 소총을 어깨 높이로 들어 올리는 모습이 그대로 비쳤다. 강렬한 붉은색이 스치고 지나가자, 일순 특징 없는 가면이 생기를 띠었다.

의사는 고개를 젖혀 온통 네온빛으로 번들거리는 상부 섹터를 올려다보았다. 지금 자신을 겨누고 있는 저 총구를 돌릴 무언가를 찾아서. 그는 눈을 찡그리고 간절히 빌었지만, 네온빛 미래는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 특히 의사처럼 하잘것없고 외로운 존재에게는.

물줄기 속에서, 펄스 소총의 안전장치를 풀 때 나는 금속성의 찰칵 소리가 들렸다. 의사는 한 손을 가슴에 올려 자신이 가진 진짜 보물을 보호했다. 패키지의 플라스틱 슬리브 아래에서 심장이 쿵쾅거리는 것이 느껴졌다.

매정할 정도로 번뜩이는 상부의 빛이 그에게 쏟아져 내렸고, 마지막 순간 의사의 뇌는 단 한 가지 생각만이 가득했다.

미래가 가져가지 않는 건 없어.

2.2. 센트럴

“재생 정지.”

지난번 성과 평가회에서 나는 감찰관들에게 센트럴로 가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물었다. 그러자 그중 한 명이 말하기를, 자신의 일부를 맞교환할 각오가 되어 있어야 한다고 대답했다. 그러니까 업그레이드를 할 때마다 프로젝트의 지휘 계통에서 더 높이 올라가게 되지만, 그럴수록 나 자신의 일부를 더 많이 내놓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나는 제정신인 사람이라면 그런 대가를 치르려 하진 않을 거라고, 약간 퉁명스럽게 대꾸했다. 하자 없는 실리콘 약간과 고급 로고 때문에 그런 짓을 할 사람은 없을 거라고.

그러자 감찰관들은 일제히 웃음을 터뜨렸고, 나를 진급시켰다.

지금 내 눈앞에 보이는 이미지는 재생을 정지하며 생긴 띠 때문에 일그러져 있었다. 3차원 홀로그램 속 의사의 육체는 살아 있는 마지막 순간의 모습 그대로 굳은 채였다. 하늘을 향해 쳐든 얼굴에는 두려움과 체념이 뒤섞여 있었고, 머리 뒤쪽에는 펄스 소총이 낸 상처가 있었다. 지금 이미지에선 지름이 몇 센티미터이지만, 1, 2틱(tick) 후에는 고밀도 플라스마가 아예 관통하게 될 것이었다.

“조금만 더 돌리면 제일 좋은 장면인데, 바이?”

새로 배정된 내 파트너 모즐리가 기지개를 켜며 하품을 했다. 한때는 근육이었을 것들이 이제는 중력에 저항할 힘을 잃고 허리에 축 늘어져 있었다. 범죄와의 전쟁을 책상에 앉아서 치르다 보니 영양 보충 시간을 한 번도 놓치지 않은 게 분명했다.

하지만 모즐리는 여전히 배가 고픈 듯했다. 벌써 세 번째, 그는 내 승진 데이터 큐브에서 눈길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새로 내 상사가 된 지서장이 오늘 아침 그걸 내 데스크에 턱 내려놓았고, 눈을 반짝이는 내 새 파트너와 나에게 따뜻한 축하를 건넸다.

내가 지켜보고 있자니 모즐리는 이윽고 탐욕에 굴복했다. 그는 비디오 데스크에서 그 조그마한 큐브를 집어 들어 무심한 동작으로 한쪽 손에서 다른 쪽 손으로 던졌다 받았다 하기 시작했다.

“요 새로운 서브루틴을 아직 설치하지 않은 거야?” 손장난을 하는 모즐리의 목소리는 부자연스럽게 가벼웠다.

나는 손가락 관절을 뚜둑 꺾었다.

내 아틀라스 건틀릿은 책상에 놓여 있었다. 하부 섹터 경찰로서의 업무를 수행하기에 알맞게 두툼한 건틀릿이었다. 신참들은 대개 경찰관 말을 듣지 않는 범죄자와 힘 차이를 벌리려고 업그레이드를 서두르지만, 나는 힘 차이에에 신경을 쓰지 않았다. 건틀릿의 둔탁한 느낌이 내게는 마치 손에 딱 들어맞는 장갑처럼 편안하기도 했다. 게다가 영구 설치를 한 번도 하지 않으면 다른 사람의 기억이 배선 속으로 흘러들어올 가능성도 없다. 센트럴 훈련 점검 시간에 비웃는 시선을 몇 번 받기는 했지만, 내 라이트 훅이 충돌 테스트용 티타늄제 인형의 가슴팍을 함몰시키자 담당관은 히죽거리던 웃음을 거두었다.

“아무튼 너 지금 시간 낭비하는 거야.” 모즐리가 말을 이었다. 유감스럽게도, 내가 자기 말에 대답을 하지 않는 것을 자신이 대화를 이어가야 한다는 의미로 받아들인 듯했다. “질 안 좋은 의사가 질 안 좋은 죽음을 맞이한 것뿐이야. 그걸로 사건 종결이지. 언제 저 승강기를 출입 허가 상태로 돌려놓으면 될지 지서장이 궁금해하고 있어. 통근자들이 너무 오래 불편을 겪으면 안 되니까.”

나는 모즐리의 말을 무시했다. 아무리 하부 섹터라도 백 미터 거리에서 등록되지 않은 펄스 소총에 두개골이 탈이온화하는 것으로 질 안 좋은 죽음을 맞이하는 경우는 흔치 않다. 이건 프로의 솜씨다. 나는 사무실 안의 인공지능에 말을 걸었다.

“검토 계속. 뒤로 돌려.”

“시간 증분을 명시해 주십시오.” 인공지능 음성이 약을 올렸다. 비디오 스캐너조차도 사건 조사에 진지하게 참여하지 않으려는 건가.

짜증이 울컥 솟아올라 전신을 훑었다. 0600시에 출근해서 얼마 지나지도 않았는데 벌써부터 이 상부 섹터의 갖가지 규정이 조립층에서 무릎까지 차오르는 폐품 더미를 헤치고 나아가는 것보다 더 성가시게 느껴졌다.

내가 바라는 것은 신나는 추격전이었다. 도중에 주먹도 몇 번 휘두를 수 있으면 더 좋을 텐데. 나는 끙 소리를 내고는 이마에 내려온 머리칼을 훅 불어서 넘겼다.

첫날이야, 바이. 착하게 행동해야지. 사람들과 친해지려면 마음에 안 든다고 뭘 때려부수거나 하면 안 돼. 나는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나에게 읊는 그 주문을 다시 외우고, 심호흡을 했다.

“3, 아니 4틱.” 나는 자제력을 최대한 발휘하며 기계에게 말했다.

이미지가 다시 흔들리더니 이번에는 홀로그램 장면이 아주 조금씩 이전으로 돌아갔다. 나는 소총에서 나온 빛이 승강기 바깥의 보안 피드 범위로 들어올 때의 탄도를 추적했다. 승강기 안쪽은 깜깜했다. 그쪽 보안 피드를 누가 손댄 것이 분명했다. 지금 공중에 멈춰 있는 불꽃만이 내가 추적할 수 있는 유일한 단서였다.

“탄도 입사를 토대로 용의자의 키와 무기 유형을 추정해.” 내가 말했다.

어둠 속에서 불빛이 깜박거렸고, 계산이 시작되자 웅웅 소리가 났다. 폴리곤 윤곽이 가느다란 네온 선으로 표시되었다. 살인자는 키가 큰 편이군… 하지만 그 외에는 표시되는 렌더링에서 별다른 게 나오지 않았다.

“진짜인 건 하나도 없어.” 나는 투덜거렸다. 하부 섹터에서는 이런 멋들어진 홀로비디오로 사건을 조사하지 않는다. “컴퓨터가 만든 모델이나 쳐다본다고 뭐가 나올 리가 있나?”

“질의 오류. 의문점을 다시 진술해 주십시오.” 나는 이놈의 인공지능에 잘난 척하며 가르치려 드는 성격이 프로그래밍되어 있는 것인지 궁금해졌다. 어쩌면 저 인공지능을 만든 사람의 성격이 그런 건지도.

모즐리가 웃었다. “바이 형사, 여기선 다 그런 식이야.” 그는 나한테 새로 주어진 그 직함을 유달리 힘주어 발음했다. 내가 이제 하부 섹터 경찰의 고된 업무에서 벗어났음을 상기시켜 주려는 게 분명했다. “이따금 시궁쥐 한 마리가 갈라진 틈으로 빠져나가는 경우가 있어. 하지만 저 위에서 빛이 우리를 비추는 동안은 만사형통이야. 그렇게 생각하면 우린 아주 깨끗하게 살고 있는 거라고.”

그 따위 미지근한 몇 마디 말로 날 달래겠다는 거야? 나는 시뮬레이션에서 시선을 떼고 모즐리를 바라보았다. 그를 탓할 수는 없었다. 모즐리는 여전히 내 데이터 큐브에 관심이 쏠려 있었다.

“그래, 이걸 설치할 거야, 말 거야?” 모즐리가 물었다.

나는 홀로비디오를 껐다. 펄스 소총에서 발사된 빛에서는 더 이상 쓸 만한 데이터가 나올 것 같지 않았다. “난 업그레이드를 믿지 않아.” 나는 차분하게 말했다.

모즐리가 드디어 나를 올려다보았다. “젊은 친구, 이건 하부 섹터의 싸구려 물건이 아냐.” 그는 큐브를 내 쪽으로 흔들었다. “이건 진짜라고. 위층에서 내려온 거란 말야.” 비디오 콘솔의 빛이 큐브에 반사되며 프로젝트 기업 연구소 로고인 역삼각형이 강조되었다. “이건 새 거야. 아니면 최소한 제대로 세척된 거지.”

모즐리가 그 큐브를 원하는 건 확실했다. 나는 뒷덜미를 문질렀다.

“얼마 전에 하나 설치했어. 한 사이클(cycle)이 좀 안 됐으니, 과충전이 될지도 몰라.” 나는 그렇게 거짓말을 하며 데스크에서 건틀릿을 집어들었다. “게다가 이것들도 아직 쌩쌩하단 말야.” 나는 데이터 큐브 쪽으로 한 손을 내밀었다.

욕망을 제멋대로 표출해서는 안 된다는 사회적 합의를 지켜야 한다는 마음이 가느다란 땀 한 줄기가 되어 모즐리의 얼굴에서 번들거렸다. 지금 이 순간 서브루틴을 넘겨주고 싶지 않다는 욕망과 싸우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결국 모즐리는 이마를 찌푸리고 큐브를 넘겨주었다.

“난 한 사이클 후에 다음 업그레이드를 하면 돼. 그러니까 네가 그걸 원하지 않는다면…” 모즐리가 말했다.

나는 돌아서서 출구 쪽으로 걷기 시작했다.

“그렇게 되면 말해 줄게...” 나는 어깨 너머로 툭 던졌다. “…파트너 씨.”

“근데, 어디 가는 거야?” 모즐리의 목소리에는 걱정이 섞여 있었지만 많지는 않았다.

나는 양손에 건틀릿을 끼며 승강기로 들어섰다.

“손 좀 더럽히러.”

2.3. 보이지 않는 힘

나는 고속 승강기가 아래로 내려가는 동안, 보안 센서가 작동하지 않는 것을 주시했다. 마이크론 유리눈은 흐릿하고 안개 비슷한 것이 끼어 있었다. 의사를 살해한 자는 센트럴이 지켜보리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어깨를 빙빙 돌려 풀고 양팔을 등 뒤로 한껏 뻗었다. 승강기 안이 텅 비어 있어 가능한 일이었다. 원래 이 커다란 상자 안은 위층의 집세를 감당하기 어려운 센트럴 근로자들로 빈틈없이 들어차게 마련이었지만, 지금은 의사의 살인 사건 때문에 센트럴이 일반 시민의 이용을 막고 있었다.

즉, 내가 사건을 종결시킬 때까지 말이다. 모즐리 입장에서는 무허가 의사가 살해당한 사건 정도는 통근자들의 일상을 통제하고 센트럴의 효율성에 지장을 줄 가치가 없었다. 승강기가 가속하는 바람에 잠시 몸이 붕 뜨는 느낌이었다. 나는 습관적으로 건틀릿의 관성 완충장치를 꺼서 건틀릿의 질량으로 내 몸이 가라앉게 만들었다. 잠시 후 승강기가 완전히 멈추자 체중이 다시 온전하게 느껴졌다.

앞쪽의 문이 미끄러지듯 열렸다. 디지털 합성 목소리가 습기 찬 공기 속으로 퍼져나갔다. “전이 지대입니다. 조심해서 이동하십시오.”

나는 라이트 쉐이드를 작동시키고, 승강기의 어둠 속에서 나와 빛이 환한 다리로 조심스럽게 발걸음을 옮겼다. 하부 섹터가 대개 그렇듯 이곳도 공기가 눅눅했다. 습기가 물방울이 되어 내려앉는 바람에 목 쪽의 머리칼이 늘어져 피부에 닿았다.

다리 위는 텅 비었고, 다리가 시장과 이어지는 부분의 노점 좌판대도 마찬가지였다. 통근자용 승강기를 이용하지 못하게 되자 주변 상권이 모두 문을 닫은 것이었다. 그러니 사건의 목격자를 만날 가능성은 없었다. 애초에 이곳 사람들이 경찰관에게 마음을 터놓고 말할 리도 없지만.

나는 다리 위에서 몇 걸음 걷다가 돌아서서 승강기 쪽을 보았다. 승강기는 수동 모드로 설정되어 있어 얌전히 멈춰선 채 내가 센트럴로 돌아가자는 명령을 내리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인공지능이 추정한 키로 보아, 범인은 이 지점에 서서 소총을 발사했다. 한 걸음만 더 가면 승강기 바깥에 배치된 다리의 보안 피드가 살인자의 모습을 잡아냈을 것이다. 의사가 몸을 숨기려고 했던 습기 변환기는 백 미터 정도 떨어져 있다. 범인은 확실히 아마추어는 아니었다.

나는 다리 상판을 살폈다. 금속 표면에 긁힌 자국이 몇 개 있었다. 나는 몸을 웅크려 더 자세히 들여다보았다. 자국은 최근에 생긴 것이었다. 하루나 이틀만 더 지났어도 녹이 슬어 있었을 것이다. 승강기와 이 다리는 살인 사건 이후 출입이 금지되었다. 자국의 깊이를 스캔하자 라이트 쉐이드의 아래쪽 구석에 숫자가 한 줄 떴다. 이 자국이 살인자가 낸 것이라면, 일반적인 증강 휴머노이드보다 체중이 훨씬 무겁겠군.

벌써부터 섹터에서 내보내는 뉴스가 귀에 들리는 듯했다. 센트럴, 무장한 자동화 근로자가 뒷골목 의사를 기화시켰다고 보도, 뭐 그 비슷하게 제멋대로 각색하겠지.

공기 흐름이 갑자기 바뀌면서 축축해진 내 머리칼이 얼굴에 달라붙었다. 고개를 돌리지 않고 라이트 쉐이더의 한쪽 구석을 흘깃 보았으나 다리는 여전히 텅 비어 있었다. 코를 킁킁거려 보니 오존 냄새가 났다. 내 어깨 근육이 바싹 긴장했다. 나는 건틀릿 속 충전 연결기를 켜고 한쪽 무릎을 다리 바닥에 댔다.

“이봐, 공공 통근 장소에서 6레벨 은신 모드를 유지하는 건 센트럴 자치 법규를 위반하는 행위야.” 나는 허공에 대고 말했다.

내 앞 웅덩이에 고인 물이 살짝 흔들렸다. 동력이 충전되자 건틀릿 안쪽이 진동했다. 나는 묵직한 어퍼컷을 한 방 날렸다. 무언가 딱딱한 것에 닿았다. 내 얼굴에 미소가 떠올랐지만, 다음 순간 건틀릿 손목이 눈에 보이지 않는 뭔가에 꽉 붙잡히는 바람에 오래가지 못했다.

눈에 보이지 않는 습격자는 나를 밀쳐냈고, 나는 다리의 금속 바닥에 호되게 떨어졌다. 내 방어구도 그 충격을 제대로 흡수하지 못했다.

파일:project vayne story image.jpg

공기가 불안정하게 떨리더니 습격자 친구가 모습을 드러냈다. 나는 등을 대고 누운 채로, 위에서 내려꽂히는 빛 때문에 눈을 가늘게 뜨고 바라보았다. 전쟁터에 나가도 될 정도로 튼튼한 탄성 중합체 방어구로 온몸을 감싼 여자였다. 광자로 탈색한 긴 머리칼을 하나로 질끈 묶어 근엄한 느낌이었다. 눈은 차갑게 빛났고, 손목에 장착한 석궁으로 내 이마를 똑바로 겨누고 있었다.

“그거 미등록 무기인 것 같은데.” 나는 일어나 앉으며 내뱉았다.

여자는 입술을 꽉 다물고 있었다. 뭔가를 계산하느라 집중하는 것 같았다. 내 목숨을 끊을 가장 빠른 방법을 산출하는 거겠지. 나는 짐작했다.

“배지 번호 20121219. 하부 섹터 경찰관. 오늘자 0600시에 센트럴로 승진.” 여자는 감정 없는 목소리로 읊었다. “축하해, 형사.”

여자의 목소리는 디지털 변조가 되어 있었으나 그 말투에 약간이나마 호기심이 들어 있는 것 같기도 했다. 비록 내 눈 앞의 석궁은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지만.

여자가 말을 이었다. “내가 위험하다는 걸 알면서도 나한테 덤벼들었다 이거지.”

“승진이란 게 꽤 스트레스가 쌓이는 일이라서. 그냥 주먹 좀 쓰고 싶었나 봐.”

“네 기록을 보니 오늘 아침에 프로젝트 승진 큐브를 받았군.” 여자가 다시 내 장비를 스캔했다. “아직 서브루틴을 설치하진 않았고.”

“아니 이봐, 사생활 좀 존중해 주면 안되는 거—”

“난 그게 필요한데.” 여자가 내 말을 끊었다.

“과충전인 거야?” 나는 큼직한 금속 건틀릿을 낀 손으로 목 뒤를 문질렀다. 젖은 머리칼이 뾰족뾰족하게 일어섰다. “난 너를 곧장 센트럴로 끌고 갈 수도 있다고.”

“그래 보시든가.” 여자가 말했다. 석궁은 여전히 나를 겨누고 있었다.

나는 쓴웃음을 지었다. “좋아. 선물을 교환하기 앞서 친분을 쌓는 대화라도 잠시 나누면 어떨까?” 내 음성 처리기에 빈정대는 투가 들어갔다. “이름이 뭐지?”

“기밀이야.” 일자로 닫혀 있던 여자의 입술에 먹이를 눈앞에 둔 맹수가 지을 법한 미소가 떠올랐다. “너한테 말해 줬다간 널 죽여야 해.”

나는 이 여자가 농담이 통하지 않는 유형이라고 결론을 내렸다. 여자의 수트와 무기를 좀더 살펴본 다음 나는 화제를 바꾸었다.

“넌 업그레이드가 필요할 것 같진 않은데.” 나는 여자의 손목을 가리켰다. “고 예쁜 석궁 하나만 해도 웬만한 센트럴 표준 무기보다 훨씬 세잖아.”

“난 사냥 중이야.”

“그건 나도 마찬가지야.” 내가 말했다.

“데이터 큐브 넘겨.”

이 여자는 센트럴의 표준은 하나도 지키지 않는 것이 분명했지만, 그래도 센트럴과 일맥상통하는 건 하나 있었다. 결국, 사람은 하나같이 다른 누군가의 일부를 원한다는 것.

내가 대꾸를 하려는데, 개인 통신으로 연락이 들어왔다. 이어피스에 잡음이 가득 찼다.

“바이? 바이, 내 말 들려?” 모즐리였다. 목소리에 두려움이 식은땀처럼 배어 있었다. “그게… 내가… 지원이 좀 필요해서… 그러니까… 파트너…”

“나 좀 바빠, 모즐리.” 나는 바이저 아래쪽 구석에 표시되는 시간을 보았다. “너 지금 근무 시간 지났잖아?”

“그냥 와서 나 좀 도와주면 안 될까?”

“그쪽 담당 경찰관한테 연락하는 게 더 빠를 거야.” 나는 내 앞에 버티고 선 여자를 보았다. “관할서에 요청하면—”

“내 위치를 전송할게.”

6섹터 아래의 어느 지점이 빛으로 표시되었다. “힙(Heap)은 센트럴 관할권에서 좀 벗어난 데잖아, 모즐리.” 나는 한숨을 섞어 말했다.

힙은 골치 아픈 낙오자들이 모여드는 시궁창 그 이상이었다. 거기 주민들은 한 장소에 한 사이클 넘게 눌러앉는 경우가 거의 없어서 추적이 쉽지가 않았다. 건물들이 죄다 재건 대상일 정도로 무너지기 직전인 것이 주된 이유였다. 미등록 해커, 암시장 무기, “많이 사용하지 않은” 중고 업그레이드를 손쉽게 구할 수 있는 곳이기도 했다. 우리가 하부 섹터에 힙이 존재하도록 놔두는 것은 용의자를 찾아야 할 때 힙에 가면 찾을 가능성이 높아지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함부로 들어갔다가는 이 세상에서 영구히 삭제될 가능성도 높은 곳이었다.

“내가 여기서 하는 일이 있거든. 그러니까… 내 본업 쪽에는 공개하면 안 될 일이야.” 모즐리의 요령부득 설명에는 두려움이 가시처럼 돋아나 있었다. 그 물렁물렁한 덩치를 생각할 때 모즐리가 청부업자로 일한다는 건 상상이 가지 않았다.“우리가 파트너가 된 지 하루도 안 된 건 맞아. 하지만 이쪽에 나를 죽이려 하는 놈이 있어. 달리 도움을 청할 사람도 없고.”

젠장. “지금 갈게. 그 자리에—”

통신이 갑자기 끊겨 버렸다. 나는 건틀릿 주먹으로 다리를 내리쳤다. 금속판이 움푹 들어갔다. 고개를 들었더니 전쟁터에 나가도 될 정도의 무기와 방어구를 갖춘 수수께끼의 여자는 여전히 나를 굽어보고 있었다. 여자의 석궁은 1마이크로미터도 움직이지 않았다.

나는 몸을 일으켰다. 여자가 아마도 나를 쏘지는 않을 것이라는 희망을 품은 채.

“나 가봐야 돼. 다리 저쪽에 하부 섹터로 내려가는 승강기가 있어. 안전장치를 부수고 수동으로 속도를 조절하면 내 파트너가 애꿎은 사람에게 술을 쏟아버리기 전에 도착할 수 있을지도 몰라.” 나는 몸을 돌렸다. “그리고 이건 경고로 생각해도 좋아.” 나는 냉담하게 덧붙였다. “그 무기들, 등록해서 허가를 받아. 안 그러면 다음번에 만날 땐 너를 위반 행위자로 보고해야 하니까.”

“승강기가 다음 레벨에 도달하기도 전에 네 파트너는 죽어 있을 걸. 힙은 그런 곳이잖아.” 여자가 등 뒤에서 말했다. “좀더 빨리 가고 싶지 않아?”

타다닥거리는 소리와 오존 냄새가 사방으로 퍼져나가는 바람에 나는 뒤를 돌아보았다.

개인용 전투 하이퍼바이크가 모습을 드러냈다. 또다시 공기 중의 습기가 응축되어 물줄기로 주룩주룩 떨어졌지만, 바이크의 새까만 에어로그래파이트 패널은 물방울들을 튀겨내 버렸다. 여자가 자기구동장치를 작동시키자 부르릉거리는 진동이 느껴졌다.

나는 낮게 휘파람을 불었다. “이건 확실하게 미등록 무기네.”

“맞아.”

“넌 이런 걸 공짜로 태워줄 사람으로는 안 보이는데.”

“승진 큐브를 줄 거잖아.” 여자는 엔진 소리를 높이며 평온하게 대꾸했다. “속도 업그레이드 대신으로 생각해.”

나는 여자의 눈을 들여다보았다. 여자는 지금이라도 나를 쏴버리고 원하는 걸 손에 넣을 수 있는데, 그러지 않고 있다.

“난 업그레이드를 믿지 않아.”

나는 그렇게 말하고는 여자 뒤쪽에 올라탔다.

“그래야지.” 여자는 바이크 앞바퀴를 다리 가장자리로 돌렸다. “참, 내 이름은 베인이야.”

2.4.

섹터 여섯 개를 내려가는 동안 사방팔방에서 네온 빛이 흐릿한 수직 막대가 되어 어지러이 휙휙 올라갔다. 베인의 말쑥한 바이크에 아까 먹었던 영양팩을 온통 토해버리는 사고를 치지 않으려고, 나는 라이트 쉐이드로 모즐리의 위치를 추적하는 일에 집중했다.

베인은 힙을 내려다보는 높이의 어느 건물 비상용 출구에 바이크를 숨겼다. 얼마 전에 건물에 불이 난 듯, 매캐하고 톡 쏘는 화재의 잔향이 공기 중에 남아 있었다. 나는 울트라 V 쌍안경으로 저녁의 거리를 오가는 군중을 살폈다.

평소보다 분주한 모습이었다. 마치 단체로 저녁 먹으러 오라는 종소리를 듣기라도 한 듯.

“내 파트너는 이 안에 있어.” 나는 베인에게 몸을 돌리고 전술용 파우치에서 데이터 큐브를 꺼냈다. “자. 까먹기 전에 버스 요금은 내야지.”

“정직한 경찰이네. 요즘은 멸종한 줄 알았더니.” 베인은 큐브를 받아들고 최근의 힙 분위기를 평가했다. “이번 레브는 지난 레브보다 좀 유해진 느낌인데.”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이런 걸 끼고 주먹다짐을 말리러 다닌 게 바로 어제 일 같은데 말야.”

“그렇겠지.” 베인이 다시 차가운 미소를 떠올리더니, 가지고 다니는 더 큰 석궁의 동력 전지를 점검했다. “먼저 들어가긴 싫은가 봐.”

“뭐야, 왜 이래? 넌 올 필요 없어.” 내가 말했다.

“너만 뭘 때려부수고 싶은 게 아냐.”

나는 어깨를 으쓱하고는 건물 뒤편으로 돌아 하중이 덜한 벽을 찾기 시작했다. 이 건물은 화재로 손상된 터라 조심할 필요가 있었다. 모즐리가 안에 있는데 건물이 통째로 무너지기라도 하면 모즐리에게 좋을 일이 아니니까.

나는 적당한 곳을 발견하고는 건틀릿을 한껏 충전시킨 뒤 오늘 받은 짜증을 몽땅 실어 벽을 후려쳤다.

두 번 만에 낡은 벌집형 탄소체 구조물이 와르르 무너졌다. 셋이 들어가도 될 정도로 큰 구멍이 생겼다. 나는 부스러기들을 밀어내며 캄캄한 건물 안으로 들어섰다.

운 좋게도 그곳은 바닥부터 천장까지 팔다리 교체용 부품이 쌓여 있는 창고였다. 그 중 어느 것도 깨끗함과는 거리가 멀었다. 하기야 공장 생산라인에서 갓 나온 깨끗한 개인용 업그레이드 부품을 살 수 있는 것은 우리보다 훨씬, 훨씬 더 높은 섹터에 있는 사람들 뿐이다.

플라스틱 판금을 몇 개 밀어내자 더 큰 공간이 나왔다. 형광 파란색과 보라색이 맥박치듯 깜박이는 것 외에는 어둑어둑했고, 베이스가 묵직하게 강조된 음악이 울려퍼지면서 내 가슴판이 진동했다. 나는 높직한 곳에 마련된 칸막이 좌석 쪽을 가리켰다.

“저 사람이야?” 베인의 목소리가 내 머릿속에 선명하게 들려왔다. 그녀가 내 내부 통신을 해킹해서 자신의 통신 시스템과 1대 1로 연결해 놓았기 때문이었다. 여전히 나지막하기는 했지만, 음성 처리기를 거쳐서 나올 때의 그 인공적인 느낌은 없는 목소리였다. 베인은 약하게 조명이 들어온 테이블 앞에 널브러지듯 앉아 있는 덩치 큰 남자를 보며 고개를 까딱 했다.

“센트럴 경찰관의 개인 통신을 해킹하는 건 징역형을 받을 수 있는 범죄야.” 내가 말했다.“하지만 그런 방법을 어디서 배웠는지는 묻지 않을게.”

베인이 미소를 지었다. 모즐리의 눈이 테이블 조명을 반사하며 번들거렸다.

“맞아, 저 사람이야.”

나는 건틀릿에 에너지를 약간 흘려보냈다. 부서진 바닥에 오렌지색 빛이 너울거리기 시작했다. 내 앞에 있던 힙의 주민들은 그 불빛의 의미를 알고 있었기에 군말 없이 옆으로 비켰다.

나는 의자 하나를 끌어 모즐리 앞에 놓았다. 가까이서 보니 이 칸막이 좌석에서 누가 조금 전에 신경 수술을 집도했음을 알 수 있었다. 모즐리가 마시던 술잔 옆에 치아가 몇 개 든 작은 양동이가 놓여 있는 것이 그 증거였다. 센트럴의 승인을 받지 않은 데이터 포트를 신경 더미가 있는 부위에 삽입하는 것은 꽤 알려진 수법이다. 특히 어금니 밑에 넣어두면 도청하는 데 그만이다.

모즐리가 베인을 올려다보았다. “치, 친구를 데려온다는 말은 안 했잖아, 바이.”

“업그레이드야.” 베인이 정정했다.

나는 건틀릿을 낀 양손을 탁자에 짚고 몸을 앞으로 숙였다. 하마터면 치아가 든 양동이를 뒤엎을 뻔했다. 나는 라이트 쉐이드를 젖히고 모즐리의 진짜 눈, 약하기 짝이 없는 눈을 들여다보았다.

“이런 곳에 오려면 지원이 필요할 것 같아서 말이야. 네가 아무 용건도 없이 힙에 오진 않았을 텐데. 뭐를 찾고 있었던 거지, 모즐리?”

분출하지 못한 에너지 때문에 건틀릿 속 관절이 근질근질했다.

“그자는 내가 가진 걸 구매하지 않겠다고 했어… 그래서 네 업그레이드에 대해 말했지.” 모즐리의 목소리는 흔들렸고 눈에는 눈물이 고였다. “그 사람이 관심을 보이면 그걸 팔라고 너한테 말하려 했어. 그랬더니 그자가… 내가 널 여기로 데려온다면…”

“그 구매자가 어디 있지?” 베인이 우리 주변을 서성거리는 불한당 무리를 스캔했다.

붉고 가느다란 빛줄기가 켜지더니 모즐리의 가슴팍 움푹 꺼진 곳에 곧장 꽂혔다.

오싹할 정도로 차분한 목소리가 낡은 건물 전체의 통신 연결망으로 울려퍼졌다.“여기 있어, 아가씨.”

베인의 얼굴에 분노에 찬 맹수의 표정이 떠올랐다. 하부 섹터의 법 집행관이라면 모를 리가 없는 음성 패턴이었다. “진.” 베인이 으르렁거리듯 말했다.

“특수대 베인 중위, 여기서 만나다니 이렇게 반가울 수가. 그때보다 얼굴이 훨씬 밝아졌네. 네 팀원들 일은 참 안됐는데, 그래도 잘 견디고 있나 봐? 참, 그 석궁 업그레이드는 아주 좋았어.”

“진이라고? 네가 말한 그 구매자가 카다 진이란 말야, 모즐리?” 나는 새로 배정된 내 파트너, 바보처럼 히죽거리던 그를 바라보았다. 모즐리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진은 악명 높은 증강 해커로 고급 보안 업그레이드를 특히 좋아했다. 소문에 따르면 옛날에는 암시장 기술자였는데 심각한 인격 단편화를 겪는 바람에 인격이 거의 완전히 지워질 뻔했다고 한다. 지난번에 다운로드받은 뉴스에는 진이 그 이후로 다른 사람들의 탐나는 부분들을 수집한다고 적혀 있었다. 덕분에 정신이 조각조각 나지는 않았다 하더라도, 다른 사람들의 일부분을 그렇게 많이 쑤셔넣은 정신에 과연 온전한 구석이 있을지는 의문이었다.

그리고 보아하니 진과 베인은 뭔가 이전의 일 때문에 서로를 알고 있는 듯했다.

“오늘은 참 갈수록 좋은 일만 생기는데.” 나는 한숨에 섞어 말했다.

진이 웃음을 터뜨렸다. 그 뒤틀린 웃음소리에 깔린 사이코패스의 음산한 분위기에 등골이 서늘해졌다.

“바이러스 같은 놈. 널 산산조각내 버리겠어.” 베인이 이를 갈았다. 온몸이 팽팽하게 긴장되어 있었다.

“지금은 말고, 아가씨. 내가 원하는 게 있어서 말야.” 진의 목소리가 낮아지더니 듣는 이를 불안하게 만드는, 흥얼거리는 듯한 어조가 되었다. “업그레이드.”

“바이는 이걸 팔지 않을 걸.” 베인이 데이터 큐브를 꺼내 쳐들었다.

“실망이란 말이야.” 진이 한탄했다. “네가 먼저 그걸 설치하길 간절히 바랐는데. 그럼 뭐… 제3막은 각본을 다시 써야겠지.”

붉은 플라스마가 활 모양으로 날아와 나와 모즐리 사이의 공기를 태워버리자 귀청을 찢을 듯 높은 위잉 소리가 들렸다. 나는 라이트 쉐이드를 젖히고 있었기에 그 강렬한 빛에 잠시 눈이 멀었다. 배경음처럼 들려오던 사람들과 음악 소리가 뚝 멎고, 공황 상태가 찾아들었다. 두려움과 그슬린 실리콘의 냄새가 콧속을 가득 채웠다. 눈에 눈물이 차올랐고, 나는 눈꺼풀을 깜박여 네온빛 잔상을 떨쳐냈다.

잔상 너머로 내 건틀릿 한쪽의 손가락 관절이 꺼멓게 그을었고 모즐리의 몸에 구멍이 뻥 뚫린 것이 보였다. 센트럴의 감식 도구를 들이대지 않아도, 모즐리가 다리에서 의사를 녹여버렸던 것과 같은 무기에 당했다는 사실은 너무나 자명했다.

“저 쥐새끼가 여기 있어.” 베인이 우리 통신 링크로 내게 말했다. “내가 저놈을 죽일 거야. 저놈은 이걸 원해.” 베인은 승진 큐브를 내게 던져주었다. “총 맞지 마.”

내가 업그레이드 큐브를 받아드는 순간 베인은 은신 모드가 되어 사라졌다. 힙은 거의 텅 비어 있었다. 사람들을 흩어지게 하는 것으로 탈이온화 플라스마 파동만큼이나 효과적인 것도 없다. 건틀릿 안 연결기를 충전시키자 진황색 빛이 주변 어둠을 밝혔다.

진의 기계 변조 웃음 소리가 벽에 메아리쳤다. 건물 통신에 지직거리는 잡음이 나왔다.

“저런, 저런, 저런. 형사님, 장갑을 낀 고양이는 쥐를 잡을 수 없어요.” 진이 기분 좋다는 듯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카다 진. 너는 여러 건의 살인 사건으로 수배 중이다.” 나는 천장 쪽 높이 설치된 상층부를 살피며 놈의 위치를 알려줄 빨간 빛을 찾았다. “그리고 내 파트너를 녹여버렸고.”

“넌 그자를 안 좋아했잖아. 아까 네가 뭐라 그랬더라?” 오디오 파일을 검색할 때 나는 치직, 스윽스윽 하는 소리가 들렸다. “아, 그래. 여기 있네...”

스윽스윽 소리가 멎었고, 건물 전체에 내 목소리가 울려퍼졌다. “난 업그레이드를 믿지 않아.”

“잘 찾아냈네.” 나는 낡은 부품을 쌓아놓은 쓰레기 더미를 헤치며 수색을 계속했다. “난 네가 원하는 걸 갖고 있지.”

“새로 사귄 친구가 그 선물을 좋아하지 않았나?” 더 큰 웃음소리가 주변을 쩌렁쩌렁 울렸다. 방사형으로 깨진 거울유리 한 구석에 무언가 휙 움직이는 것이 잠깐 비쳤다.“그 여자도 업그레이드를 좋아하지 않지. 그 친구가 이전 파트너들 얘기를 안 해줬나? 자기가 이끌던 팀 얘기는?”

나는 대꾸하지 않았다. 놈이 마지막으로 있던 위치 쪽으로 계속 나아갔다.

“다들 죽었어.” 진의 음산한 미소가 보이는 듯했다. 놈은 기뻐하고 있었다. 몸뚱이 거의 전체가 기계인 인간이 그런 감정을 느낄 여지가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특수대 중위 샤우나 베인도 죽었어. 그래서 그들이 재구성한 거지. 베인은 특별했으니까.”

“누가?” 나는 그렇게 물었다. 진에게 자꾸 말을 시키면 놈이 실수를 저지를지도 모르니까. “누가 베인을 재구성했다는 거야?”

“당연히 프로젝트지, 요 머리 나쁜 아기고양이. 프로젝트가 우리 모두를 재구성하고 있는 거야.” 진이 높은 주파수로 키득거리는 소리가 귓속에서 따갑게 울렸다. “하지만 프로젝트도 너를 재구성할 때는 시간이 좀 걸리겠지. 내가 이렇게 해줄 거거든—”

금속 실린더 하나가 느닷없이 어둠 속에서 발사되었다. 나는 황급히 몸을 날려 피했다. 실린더는 쓰레기 더미에 명중했고, 작은 폭발을 일으키며 쓰레기를 찢어발긴 다음, 두 번째 쓰레기 더미로 튕겨나가 또 한 번 폭발했다.

“그 사람들이 어떻게 죽었는지 그 여자가 말해 줬나?” 진이 잔뜩 흥분해서 숨을 몰아쉬는 소리가 통신기로 밀려들어왔다. 나는 느릿느릿 몸을 일으켰다. 붉고 가는 빛줄기가 내 배에 똑바로 꽂혀 있었다. 50미터 떨어진 곳에서 키가 큰 금속성 그림자가 나를 겨누고 있는 것이 보였다.

진이 다시 키득키득 웃었다. “어떻게 된 거냐면—”

“함정이었지.” 베인의 목소리가 내 통신기로 들어왔다. 그녀의 윤곽이 진 바로 옆에서 은신 해제되었다.

나는 달리기 시작했다. 베인의 석궁이 건물 안 어둠을 한 번, 두 번, 세 번 밝혔지만, 그때마다 진도 마주 소총을 쏘아댔기에 베인은 구르면서 피할 수밖에 없었다. 진의 무기는 아주 가까운 거리에서는 명중도가 낮았지만, 주변의 벽을 닥치는 대로 부수는 데에는 효과적이었다.

베인이 진 쪽으로 도약해서 놈의 몸뚱이를 바닥에 쓰러뜨렸다. 나도 두 사람 옆에 거의 도착해 있었다.

“준비됐니, 내 고양이들아?” 진이 나직하게 말했다. “너희가 얼마나 잘 뛰는지 한 번 보자.”

기계 변조 음성이 들려왔다. “수동 무효화. 폭파 시퀀스 시작. 구역 재건 임박.” 다 쓰러져 가는 건물의 아래쪽에서부터 진황색 빛과 나른한 경적 소리가 퍼져나왔다. 힙에서는 지금 이곳처럼 봉쇄하여 붕괴시키는 운명을 맞는 구역이 꽤 있다. 상부의 높이 치솟은 구조물들을 떠받치는 새로운 토대로 쓰기 위해서이다.

경고하는 목소리가 더 나왔는지는 듣지 못했다. 곧이어 작은 폭발이 연속적으로 일어났기 때문이었다. 콘크리트 지지층이 무너지자 금속 뼈대들이 끼익끼익 소리를 냈다.

진과 베인은 서로 떨어졌고, 베인은 몸을 한 바퀴 굴려 벌떡 일어났다. 나는 달리다 말고 멈춰섰다. 진을 가까이서 본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다. 진은 기계 같은 동작으로 어깨의 서보(servo) 장치를 제자리에 끼웠다. 이 남자의 몸뚱이에 인간의 살이 남아 있긴 한지 의심스러웠다. 진은 얼굴이 없었다. 강철로 된 목 위에는 거미처럼 생긴 드론이 올라앉아 있을 뿐이었다.

“중위, 뭐 하고 있어. 날 쏘라고.” 진이 베인을 껴안기라도 할 듯 양팔을 활짝 벌렸다. “네가 그렇게도 원하던 순간이잖아.”

베인은 등에서 큰 석궁을 뽑아들고 발사 채비를 했다.

“베인!” 나는 사방의 소음보다 더 큰 소리로 외쳤다. “지금 당장 나가야 돼! 어서!”

“이 사냥은 이걸로 끝이다.” 베인은 신중하게 겨냥을 했다. “넌 죽은 목숨이야.”

“나한테 인간의 목숨이란 게 있다면 말이지.” 진은 너무나 차분하게 대꾸했다.

베인은 화살을 발사했다. 화살은 진의 가슴에 명중했다. 진은 뒤로 밀려나며 콘크리트 기둥에 부딪혔고, 말 그대로 기둥 속에 박혀 버렸다. 동력이 끊어지면서 금속 뼈대가 충격을 받은 듯 부르르 떨었다. 얼굴이 있어야 할 부위에 올라앉은 거미 드론도 시커멓게 변했다.

“베인!” 하지만 베인은 나를 보지 않았다. 그녀의 시선은 오로지 진에게만 꽂혀 있었다.

잠시 후, 반들반들한 검은색 거미 드론 여기저기에 빨간 점 같은 네온이 켜졌다. 서보 장치들이 풀리자 거미는 잽싸게 몸뚱이를 타고 내려왔다. 도망칠 곳을 찾는 듯했다.

“부숴버려!” 베인이 소리쳤다. 그녀는 손목 석궁으로 작은 플라스마 화살을 몇 개 발사했지만, 거미 드론은 진짜 곤충같이 반사적인 동작으로 피해 버렸다.

거미는 옆쪽 콘크리트 기둥에 내려앉았다. 나는 기둥을 힘껏 후려쳤다. 기둥 속 플라스틱 그물망이 드러났고, 거미 드론은 공중으로 떠올라 천장으로 향했다. 베인은 계속 화살을 발사했지만, 거미는 모퉁이에 난 균열 쪽으로 날쌔게 달아나더니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베인의 머리 바로 위 천장 부분이 금방이라도 떨어질 듯 너덜거렸다. 양해를 구할 시간이 없었다. 나는 베인에게 돌진해 한쪽 어깨로 밀쳤다. 우리는 깜깜해진 창문을 뚫고 나가 건물 바로 옆 구조물에 떨어졌다.

제법 크게 쿵 소리가 났고, 유리 조각들이 우리 위로 빗발치듯 쏟아졌다. 센트럴이 무게를 집중시켜 이곳 힙 구역을 폐허더미로 부수는 장관을, 나는 멍하니 지켜보았다.

파일:project vi story image.jpg

“근무 첫날 치고는 참 엄청나네.” 나는 그렇게 중얼거리면서 건틀릿의 손가락을 꼼지락거려 보았다. 이 난리통을 겪고도 제대로 작동하는지 확인하고 싶었다. 그러고 보니 지금까지도 승진 업그레이드를 꼭 쥐고 있었다. 나는 그걸 베인에게 내밀었다. “이거 네 거 같은데.”

베인은 몸을 일으켰다. 분노가 가라앉지 않은 표정이었다. 불꽃이 튀는 듯한 눈에 맹렬한 노여움이 그대로 드러나 있었다. 스으으으 소리와 오존 냄새가 다시 공중에 퍼져나갔다. 베인의 모습은 밤공기 속으로 사라졌다.

“덕분에 내 복수심이 아주 약간 해소되었어, 형사.” 그녀의 목소리가 내 머릿속에 울렸다.“업그레이드 정도로는 갚을 수 없는 빚이지만, 그래도 받아 둬.”

2.5. 탈바꿈

무너진 건물 주변은 고요했다. 으스러진 탄소체 구조물과 구부러진 강철 부스러기가 올 거친 담요처럼 뒤덮인 아수라장에서, 작고 검은 거미 한 마리가 다리로 잔해를 밀어내며 모습을 드러냈다. 매끈매끈한 합금 겉껍질은 먼지투성이었으나 흠집 하나 없이 온전했다. 표면까지 올라온 거미는 동서남북 기본 방향을 잡으며 새로운 환경에 적응했다. 공중에서 응결한 물방울이 툭툭 떨어지며 거미를 깨끗이 씻어냈지만, 완전히 깨끗하게 만들지는 못했다.

후리후리한 금속성 그림자가 잔해 무더기로 성큼성큼 올라와 거미 앞에 무릎을 꺾었다.

거미는 그림자의 가닥가닥 꼬인 탄소체 금속 다리를 기어올라가, 먼지가 덮이고 텁수룩한 털 깃을 지나 양극산화처리 강철로 이루어진 척추 맨 위에 자리를 잡았다. 상부 섹터에서 영원히 꺼지지 않는 빛이 내리쬐는 가운데, 거미 드론의 회로가 그림자의 몸뚱이 회로와 재연결되었다.

금속성 그림자는 한 팔을 들어 입고 있는 조끼의 직물 패널을 한쪽으로 젖히더니 드러난 몸판 안으로 한 손가락을 푹 찔러넣었다. 판 안쪽의 탄소체 섬유망에서 손가락이 집어낸 것은 짤막한 석궁 화살이었다. 펄스 효과가 있는 끝부분이 여전히 온전했다. 강력한 손가락이 화살을 조심스럽게 눌러 껍데기를 부수자, 가느다란 리본 모양의 회로가 드러났다. 그림자는 외과의사처럼 정밀한 손놀림으로 회로를 자신의 얼굴 뒤쪽 작은 포트에 연결시켰다. 가면의 매끄러운 검은 외곽에 붉은 불빛이 들어오며 생기를 띠었다.

금속 그림자의 내부에서 디지털로 합성한 흥얼거림이 시작되더니 짧게 끊어지는 가학적인 웃음소리와 조화를 이루며 외부로 터져나왔다. 그 소리는 수직으로 솟아 있는 섹터를 왔다갔다하며 메아리쳤고, 맨 꼭대기까지 올라갔다.

“내 작품을 통해—” 진은 네온이 미궁처럼 얽혀 있는 위쪽을 향해 나직이 속삭였다. “—넌 초월을 이루게 될 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