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모에 미러 (일반/어두운 화면)
최근 수정 시각 : 2024-07-25 23:03:20

넬슨 신

신능균에서 넘어옴
넬슨 신(신능균)
申能均 | Nelson Shin
파일:nelson-shin.jpg
출생 1939년 ([age(1939-12-31)]~[age(1939-01-01)]세)
황해도 평산군
(現 황해남도 평산군)
본관 평산 신씨
학력 보문고등학교 (졸업)
서라벌예술대학[1] (서양화과 / 학사)

1. 개요2. 생애
2.1. 미국으로의 진출2.2. 한국 복귀
3. 기타

[clearfix]

1. 개요

세계적으로 유명한 한국인 애니메이터.

2. 생애

1939년 황해도 평산군(현 황해남도 평산군)에서 태어났다.

어릴 적부터 그림을 좋아해서 교과서 그림을 따라 그리는것을 하다가 본인에게 그림그리기에 재능이 있음을 발견하고 만화그리는 일을 찾다가 신동헌 화백에게 무작정 찾아가 문하로 받아달라고 떼를 써서 문하로 들어가 시사만화로 데뷔한다. 시사만화를 그리다가 전쟁이 끝난후 한국산업이 성장기에 오르자 광고계로 진출하여 기업들의 애니메이션 광고에 원화가로 데뷔하여 애니메이션계에 발을 들여놓았다. 이때 필명으로 쓴 이름은 '신능파'였다.

2.1. 미국으로의 진출

참고자료 - 네이버 캐스트

그렇게 오랫동안 광고 애니메이션을 제작하다 본격적으로 애니메이션에 관심이 생겨 이를 제대로 해보고자 70년 즈음 애니메이션 본고장인 미국으로 가서 디즈니 같은 회사에서 잡역들을 하며 기술을 배우고자 돈을 모았다. 그리고 71년 일본 공항을 경유해 샌프란시스코에 도착 후 한달 호텔 숙박비로 280달러를 선불하고 나니 5달러만 남았고, 이조차도 생필품 구입에 썼다.

이후 경치에 반해 무일푼으로 카메라를 들고 여기저기 돌아다니던 중 한 사람이 도라지를 그릴 줄 아냐며 말을 걸어왔고, 즉석에서 그려주자 자초지종[2]을 설명하고 한달에 350달러를 줄테니 같이 일해보자는 제안을 받고, 그의 밑에서 22시간 동안 일하며 테이블 매너 등 미국 문화를 배워가며, 그의 도움으로 가족들까지 미국으로 초청해 본격적인 이민생활을 시작했다.

이후 갖가지 직업들을 17가지 넘게 전전하며 6개월 정도 지나자 코피가 나는 등 한계에 다다랐고, 이러던 중 그의 실력은 자기도 모르게 애니메이션계에 소문이 나 미국 애니메이션 협회에 가입된 애니메이션 업체 사장으로부터 전화가 걸려와 이를 승낙했다. 이후 회사가 소속된 애니메이션 협회의 도움으로 취업 비자까지 발급받아 합법적으로 일할 수 있게 되었는데, 이 즈음 자신의 한국식 이름은 현지인들에게 생소하고 발음하기 어려워서 전화번호부에서 N자 이름들을 검색해 그 중 '넬슨'에 꽂혀서 미국식 이름을 지었다.

이후 넬슨 신의 재빠른 일처리 솜씨를 눈여겨 본 조지 루카스에게 발탁돼 스타워즈의 제작에 참여했는데, 이 과정에서 광선검(라이트 세이버)의 효과와 기초적인 설정들을 구축했다.

정확히는 루카스를 포함한 직원들이 라이트세이버를 어떻게 처리해야할까 고민하던 차[3] 문득 아이디어가 떠올라서 그 방법을 구체화시켰는데 바로 흰 종이를 라이트세이버 모양으로 잘라서 장면에 맞게 일일이 수작업으로 붙인 후 컴퓨터로 색을 입혔다고 한다. 그렇게 수작업으로 종이를 일일이 다 붙인 후 직원에게 가져다주며 말하길, 착한 놈은 파랑색, 나쁜 놈은 빨간색(...)[4]이라며 피아 식별을 지시했고, 그걸 알아들은 특수효과팀이 색을 입혀 작업해준 것이 우리가 아는 그 라이트세이버의 시초

이후 <핑크 팬더>, <지 아이 조(G.I. Joe)>, <판타스틱 포>, <심슨 가족>의 제작을 연이어 맡다가 완구회사 해즈브로의 요청으로 트랜스포머 1세대(통칭 G1) 등 80년대 당시 해즈브로가 관여한 애니메이션 작품의 연출을 돕게 된다.

2.2. 한국 복귀

마블 스튜디오로부터 일거리를 받은 뒤 한국으로 돌아가 애이콤(AKOM)을 세우고 3년 후에 사장이 되어 아직까지 회사를 이끌고 있다. 그리고 애니메이션 전문 잡지인 <애니메이툰>을 발간했다. 발간 당시 정부에 찾아가서 발간에 관한 협조를 부탁했으나 정부 관료는 개인에게 도움을 줄수 없다며 단칼에 거절당한다.

한국 복귀 후 미국 현지의 외주 제작 방식이 바뀌면서 자체 제작 애니메이션을 만들게 되고 그것이 왕후 심청이란 이름으로 개봉을 했으나 저조한 흥행 성적을 기록하며 참패한다. 언젠가 재개봉을 목표로 수정 작업을 하고 있다고 한다.

'이렇게 능력이 뛰어난 사람이 계속 해즈브로 등 외국 업체와 계속 빌붙는 바람에 한국은 하청기지로 전락하고 국내 자체 기획 애니메이션 작품이 발전할 기회를 놓쳤다'는 식의 낭설이 한국 애니메이션 업계나 팬덤에서 돌고있는 듯 하나, 여기서 다룬 내용(영어)을 보면 AKOM의 실력이 그렇게 뛰어난 것은 아니었던 듯 하다.[5]

심슨가족의 그림 자체가 간단해 보이지만 AKOM 직원들 말에 따르면 엄청나게 까다로운 규칙이 있다고 한다. 일례로 호머 심슨의 경우 눈동자가 흰자에서부터 몇센치 혹은 어느 정도의 비율인지 마지 심슨의 머리카락의 굴곡 갯수가 어느정도인지 엄청나게 까다롭다고.

2015년에 개구리왕국이라는 중국산 극장 애니메이션의 감독을 맡았다.

3. 기타

2020년에 취재대행소 왱을 통해 인터뷰를 진행했다.#

2021년 당시 대선후보였던 윤석열의 부인 김건희의 행적에 대해 넬슨 신 감독은 14일 이데일리와 전화통화에서 "김건희 씨를 알지 못한다"며 '왕후 심청'에 기여한 것도 없고, "그 분은 대선 후보의 아내라는 것만 알고 있다"고 밝혔다.

그는 2004년 장편 부문 대상을 수상한 작품인 '왕후 심청'에 대해 "제작하면서 파트너가 없었다"면서 "내 돈을 갖고 100% 작업을 했고 기획도 내가 한 것"이라고 말하며 과거 김건희의 행적에 이의를 제기했다. [단독]김건희씨 받았다는 2004년 대상 수상자…"김씨 본적도 없다"

과천시 샘터길 51에는 본인의 기념관이 있다. 넬슨신애니메이션아트박물관


[1] 관련 기사.[2] 도라지라는 한인 식당에서 도라지를 그려달라는 주문을 받았는데, 현지에는 이를 아는 사람이 없어 막막했다고 한다.[3] 루카스는 그러다 넬슨 신에게 그냥 다 맡겨버렸다고 한다.[4] 본인이 말에 따르면 어색한 영어로 그렇게 표현했다 함.[5] 특히 "Prophet of Doom" 에피 얘기를 보면 그저 낭설일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