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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3-06-21 14:48:56

신드라/배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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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장문 배경2. 꿈꾸는 연못
2.1. 1막2.2. 2막
3. 구 설정
3.1. 구 단문 배경3.2. 구 장문 배경

1. 장문 배경

나보리의 어린 소녀였던 신드라는 해야 할 일에 집중하지 않고 다른 곳에 정신을 빼앗기는 경우가 많았다. 나무가 드리우는 그늘 때문에 특유의 물빛을 잃은 연못이 풍기는 마법과도 같은 아름다움이나, 담벼락을 열심히 기어오르는 설탕딱정벌레의 움직임을 넋을 잃고 바라보기 일쑤였다. 그래서 자신에게 맡겨진 집안일을 마무리하지 못하고 어머니에게 집중력이 없다며 호된 꾸지람을 듣는 것이 일상이었다. 나중에는 우유가 상해도 신드라가 야단을 맞았고, 심지어 가족에게 소소한 불운이 닥쳐와도 신드라의 탓이 되었다.

그런 일이 생기면 오빠인 에바르드가 누구보다도 앞장서서 신드라를 놀리고는 했다. 그럴 때면 신드라는 마을에서 신성시되는 고목이자 제일 좋아하는 은신처인 ‘유령 버드나무’로 도망쳤다. 그러고는 혼자서 몇 시간이나 버드나무에게 속상한 마음을 털어놓으며 위안을 얻었다. 어느 따스한 날 저녁, 에바르드와 그 친구들이 몰래 신드라를 따라가 그 광경을 보았고, 어린애처럼 나무에 대고 울고불고한다며 웃어댔다. 신드라는 애써 무시했지만 수치심과 분노가 끓어올랐고, 그중 한 명이 던진 흙덩어리에 머리를 맞자 더 참을 수가 없었다.

더 이상 감정을 통제하지 못하게 된 신드라가 깊은 내면으로부터 분노를 폭발시키자, 그녀의 몸에서 어두운 빛을 발하는 마법 구체들이 튀어나왔다. 구체들은 신드라가 느끼는 번민과 고통만큼이나 묵직했다.

그때까지 신드라의 내면에 잠들어 있던 강력한 마법 능력이 마침내 깨어난 것이었다. 마법의 힘은 일촉즉발의 불꽃처럼 너울거리며 타올랐고, 구체들은 신드라 주변에 흩어져 있던 영의 세계의 마력을 빨아들이고 유령 버드나무에게서 생명의 정수를 뽑아냈다. 늙은 버드나무의 줄기가 비틀리기 시작했고, 에바르드와 친구들은 겁에 질려 뒷걸음질 쳤다. 나무껍질은 생명력을 잃고 타르처럼 시커멓게 변했다.

주민들은 유령 버드나무가 죽으면 마을이 더 이상 아이오니아의 영혼과 연결되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했고, 신드라의 가족에게 비난을 퍼부었다. 게다가 모두들 신드라의 마법을 두려워하게 되었기에, 신드라의 가족은 고향 마을을 떠나 새로운 정착지를 찾아 나설 수밖에 없었다.

몇 달 동안이나 떠돌아다닌 끝에 어느 바닷가에 다다른 신드라의 가족은 코니젠이라는 이름의 은둔 사제를 만났다. 코니젠은 자신이 파엘로어라는 섬에 살며, 자연의 마법을 통제하는 법을 배우고 싶어 하는 사람들을 가르친다고 말했다. 신드라의 가족에게 이보다 더 좋은 조건은 없었다. 이 사람이라면 문제를 해결해 줄 수 있을지도 몰랐다. 어린 신드라는 코니젠과 함께 파엘로어 섬으로 가서, 아주 오래전 검은 바위를 깎아 만든 사원으로 올라갔다. 바다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높은 절벽에 자리한 사원이었다. 소녀는 이전의 생활이 몹시 그리웠지만, 그래도 스승의 지혜를 받아들이고 감정을 다스리는 일에 온 힘을 쏟았다.

하지만 신드라는 차츰 좌절감을 느끼게 되었다. 몇 년 동안 노력한 끝에 감정을 통제하는 능력은 향상되었으나 마법의 힘은 갈수록 약해지기만 했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코니젠은 이제 신드라에게 무언가 새로운 것을 가르치려 하지 않고 매일 아침 사원에 틀어박혀 고독 속에서 명상을 할 뿐이었다. 결국 신드라는 작심하고 스승에게 까닭을 따져 물었다. 코니젠은 기진맥진한 듯 이를 악물며 털어놓았다. 신드라의 안전을 위해 일부러 그 힘을 억눌러 왔다고…신드라의 어두운 힘은 현실 세계에 예측 불가능하며 기이한 영향을 끼치고 있고, 신드라의 힘은 이미 스승인 자신의 능력을 훨씬 초월했다는 것이었다.

신드라는 그 어느 때보다도 심한 배신감을 느꼈다. 코니젠은 신드라를 진정시키려 했으나 오히려 그녀의 분노에 기름을 붓는 격이 되어버렸다. 그리고 그 순간, 코니젠은 집중력을 잃었다.

사원이 기초 토대에서부터 흔들리기 시작했다. 아침의 햇빛이 그 따스함을 잃고 핼쑥해지는 것 같았다. 신드라는 앉아 있던 바닥에서 몸을 일으켰다. 그동안 쌓였던 좌절과 불만이 치밀어올라 온몸을 휘감았다. 그녀는 공중에 떠오른 어두운 구체들을 잡아채어 스승에게 집어던졌다. 구체들은 신드라의 격노를 가득 품은 채 날아가 순식간에 코니젠의 목숨을 앗아갔다.

사원의 천장이 무너지고, 돌무더기가 비처럼 쏟아졌다. 신성한 정원은 잠깐 사이에 먼지가 피어오르는 돌밭으로 변했다. 신드라는 여기서 그치지 않고 사원의 잔해조차도 파괴했으며, 파엘로어 섬 전체에 충격파를 발산하고 섬에 깃들어 있던 원초적 마법의 힘을 빨아들였다.

어두운 마법의 힘이 한곳에 이렇게 집중된 적은 일찍이 없었다. 그 바람에 아이오니아의 영혼이 팽창하여 그 힘과 맞닿게 되었다. 신드라의 발밑에서 단단한 암반이 쩍 하고 갈라졌고, 지하 깊숙이 자리한 커다란 동굴로 신드라를 끌어들였다. 거대한 뿌리들이 그녀의 몸을 살아 있는 물웅덩이 속에 담가 어둠의 힘을 억눌렀고, 그녀의 정신을 마법의 수면으로 적셨다.

신드라는 영겁과 같은 꿈에 빠져들었다. 이윽고 이 세계의 대부분은 신드라가 존재했다는 사실조차도 잊게 되었다.

하지만 녹서스와 전쟁을 치르며 아이오니아 주민들이 분열할 즈음, 과거 파엘로어 섬을 지키던 사람들 때문에 신드라는 기나긴 잠에서 깨어나게 되었다. 신드라를 처치하려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신드라가 녹서스에 대항하여 자신들을 도와줄 것이라고 기대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신드라는 그들 모두에게 혼돈을 선사했다. 그녀는 다른 사람이 벌인 장기판에서 이리저리 옮겨지는 장기말이 되는 것을 거부했다. 신드라는 자신이 갇혀 있던 동굴 위에 지어진 요새의 벽을 산산조각내고, 그것으로 하늘을 찌를 듯 높이 솟은 거대한 탑을 세워 멀리 나아갈 준비를 마쳤다.

신드라는 이제 그 누구의 통제도 받지 않을 것이다. 다시는…

2. 꿈꾸는 연못

파일:Short Story The Dreaming Pool.jpg

2.1. 1막

점점 깊어지는 숲은 아름다움으로 가득했다. 하지만 구불구불한 길을 쿵쿵거리며 걸어가는 소녀의 눈에는 그 어느 것도 보이지 않았다.

빛나는 너울날개들이 빛의 흔적을 남기며 황혼 속에서 춤췄지만, 소녀는 그 아름다움을 의식하지 못한 채 얼굴에서 그것들을 내쫓아 버렸다. 눈을 내리뜬 소녀는 돌멩이를 차서 길 건너에 뒤틀린 뿌리 너머로 보내 버렸다. 우거진 나뭇가지 사이로 언뜻 보이는 황홀한 일몰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활짝 핀 밤붓꽃의 여린 자주색 꽃잎들이 따스한 저녁 공기에 그 빛나는 꽃가루를 내뿜었지만, 소녀는 지나가며 손을 뻗어 줄기에서 꽃을 꺾어 버렸다.

소녀의 얼굴은 수치심과 분노로 타올랐다. 어머니가 야단치는 소리가 여전히 귓가를 맴돌았고, 형제와 다른 이들의 웃음소리도 계속 자신을 따라오는 듯했다.

소녀는 걸음을 멈추더니 고개를 돌려 길 위에 떨어져 있는 꽃잎을 바라보고 눈을 찡그렸다. 이 모든 게 뭔가 이상할 정도로 익숙했다… 마치 예전에도 이런 일이 있었던 것 같았다. 소녀는 고개를 젓고서는 계속해서 깊은 숲으로 향했다.

마침내 소녀는 신성한 유령 버드나무 앞에 섰다. 버들가지가 마치 물 밑에서 흔들리듯 느릿하게 휘날렸고 어디선가 달그락대는 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왔다.

여전히 속에서 뜨겁고 격렬한 분노가 치밀었지만, 소녀는 눈을 감으며 쥐고 있던 주먹을 폈다. 늙은 스승이 가르쳐 준 대로 천천히 숨을 들이쉬며 분노를 잠재우려고 노력했다.

무언가 뒤통수를 강하게 치는 바람에 소녀는 무릎을 털썩 꿇었다. 맞은 곳을 손으로 만져 보자 손가락에 피가 묻어 나왔다. 그때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소녀의 분노는 다시 차올랐다.

자리에서 일어난 소녀는 돌아서서 자신의 형제와 다른 이들을 검은 눈으로 노려보았다. 소녀는 짧고 거칠게 숨을 몰아쉬며, 다시 한번 주먹을 불끈 쥐었다. 조금 전에 마음을 가라앉히려고 한 모든 노력이 한순간의 분노에 물거품이 되어 버렸다. 마음속 분노는 손쓸 방법이 없는 병처럼 속수무책으로 자라났다. 주변의 공기가 일렁이는 듯했고, 소녀의 뒤에 있는 유령 버드나무는 시들어가기 시작했다. 나무에서는 붉은 수액이 흘렀고 잎은 말려서 거멓게 변했다.

아주 오래전 이 땅의 마법은 유령 버드나무를 기름지게 했고, 버드나무는 다시 이 땅과 사람들을 번영하게 했다. 그런 버드나무가 죽어가고 있었다. 탄력 있는 가지는 곧 바스러질 듯 말라 갔고, 뿌리는 고통스럽게 말려 들어갔다. 가지가 부딪히는 소리는 마치 죽음이 임박한 것처럼 구슬프게 들렸지만, 분노에 눈이 먼 소녀의 귀에는 들리지 않았다.

태고의 나무가 명을 다하자 소녀는 공중으로 떠올랐다. 빛을 삼켜버리는 완전한 어둠의 구체 세 개가 소녀 주변을 돌기 시작했다.

소녀를 괴롭힌 아이들의 얼굴에는 웃음이 사라졌다…
칼란은 파엘로어의 흉벽에 서서 좁은 해협 너머로 최초의 땅 본토를 바라보았다. 지금은 인간들이 아이오니아라고 부르는 곳이었다.

달이 뜨지 않은 어두운 밤이었지만, 동공이 활짝 열린 그의 고양이 같은 눈에는 아직 낮인 것처럼 모든 것이 환하게 보였다. 가끔 횃불이 비치면 그의 눈은 어둠 속의 맹수처럼 밝게 빛나고는 했다.

칼란은 고대 혈통의 바스타야였다. 회색이 적잖이 섞인 그의 적갈색 털은 복잡한 매듭으로 땋여 등을 타고 길게 늘어져 있었다. 표범을 닮은 위풍당당한 얼굴에는 일생의 전투에서 얻은 흉터가 뒤얽혀 있었다. 털이 없는 왼쪽 얼굴에 벌겋게 곪아 부은 자국은 젊은 전사였을 때 끔찍한 화상을 입은 흔적이었다. 관자놀이에서 자라나 둥글게 말린 뿔에는 룬 문자가 나선형으로 새겨져 있었다. 뒤에서 휙휙 움직이는 세 개의 꼬리는 각각 겹겹이 이어붙인 판금을 두르고 있었다. 자신의 두 번째 조국인 녹서스 제국의 검은 강철 갑옷과 상징물을 걸친 그는 어딘가 심기가 불편해 보였다.

아이오니아와 바스타야 모두 그를 배신자라고 부르기도 했지만, 그는 개의치 않았다. 그들의 생각 따윈 상관없었다.

파엘로어 요새는 아이오니아 최서단에 위치한 섬에 지어졌다. 방어가 아주 견고한 이곳은 녹서스 침공 때 기나긴 포위 작전 끝에 함락되기 전까지는 무수한 적들을 버텨 내며 수 세기 동안 굳건히 자리를 지켰다.

그 후 칼란은 녹서스 편에 섰고, 운명적인 플레시디엄의 전투에서 스웨인에게 충성을 맹세했다. 그는 충성에 대한 포상으로 파엘로어의 지휘관 자리를 요청했다.

녹서스인들은 그런 그를 뒤에서 비웃었다. 그도 알고 있었다. 훨씬 높은 중책을 맡을 수 있었음에도 제국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위치한 파엘로어를 선택했다.

녹서스인들은 이해하지 못했지만, 칼란은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그는 ‘이곳’이어야만 했으니까.

물론 녹서스가 전쟁에서 승리한 건 아니었다… 그건 아이오니아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전투가 끝난 지 한참이 지난 후에도 파엘로어는 여전히 녹서스의 지배를 받고 있었다.

전함 서른세 척과 그의 반 정도 되는 상선과 무역선이 이곳 부두에 정박하고 있었고, 제국 방방곡곡에서 온 숙련병 부대가 뒤섞인 천 명이 넘는 녹서스 병사들이 그의 통솔하에 주둔하고 있었다.

순찰대가 흉벽을 따라 묵직한 소리를 내며 걸었다. 그들이 흉갑에 주먹을 부딪쳐 경례하자 칼란은 고개를 끄덕여 답했다. 그는 그들이 지나가며 자신을 향해 내비친 어두운 표정을 보았다. 그들은 아이오니아인들만큼이나 그를 싫어했지만, 동시에 두려워하며 존경했다. 그에겐 그거면 충분했다.

칼란은 과거를 곱씹으며, 다시 몸을 돌려 바다를 바라봤다. ‘왜 여기에 온 거지?’ 매일 부하들의 눈에 비친 의문이자, 숲과 사냥이 그를 부르는 짙은 밤이 오면 마음속에서 슬금슬금 떠오르는 의문이었다. 하지만 대답은 간단했다.

그는 ‘그녀’를 계속 감시하기 위해 이곳에 남은 것이다.
검은 옷을 두른 두 사람이 아무도 몰래, 마치 죽은 듯 조용히 바다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여자 하나와 남자 하나였다. 그들은 수직으로 된 전함 ‘붉은 사냥꾼’의 선체를 거미처럼 빠르게 올라가 뱃전 위를 살금살금 이동했다. 그들의 칼날이 번득이자, 전함의 야간 보초병들은 경보를 울리지 못한 채 하나둘씩 당할 수밖에 없었다.

순식간에 녹서스 병사 다섯이 갑판에 쓰러졌다.

“깔끔한 솜씨네.” 시리크가 위쪽 갑판의 그림자 속에 몸을 웅크린 채 말했다. 그녀의 얼굴에서는 오직 눈과 그 주변을 감싼 소용돌이 모양의 남색 문신만이 보였다.

“그런대로 괜찮은 선생 덕분이지.” 오킨이 대답했다. 그 역시 검은 옷을 두른 채 그림자 속에 웅크리고 있었다. 하지만 그의 누나와 달리 눈 주변에는 속이 꽉 찬 사각 무늬가 새겨져 있었다.

“그런대로 괜찮은 선생?” 그녀가 눈썹 한쪽을 올리며 답했다.

“굳이 우쭐대게 할 필요는 없잖아.” 그가 대답했다.

“노닥거릴 시간 없어.” 시리크는 허리춤에 달린 검은 가죽 주머니를 열어 밀랍을 칠한 가죽으로 감싼 물체를 살며시 꺼냈다. 가죽을 조심스레 풀자 주먹만 한 크기의 검은 수정이 모습을 드러냈다.

“안 젖었지?” 오킨이 속삭였다.

시리크는 수정을 살짝 흔들어 답했다. 수정 안에서 일렁이는 주황색 불빛이 살짝 비쳤다. 마치 바람을 받은 불씨 같았다.

“그런 것 같아. 이걸 놔둘 만한 장소를 찾아볼게.” 그녀는 고개를 까딱여 아래쪽 갑판으로 향하는 근처 문을 가리키며 말했다. “넌 다른 사람들에게 신호를 보내.”

오킨이 끄덕였다. 시리크가 아래쪽 갑판으로 소리 없이 움직이자 그녀의 동생은 조용히 뱃전으로 돌아가 몸을 기울여 손짓했다. 검은 형체 일곱이 검은 물속에서 떠오르더니, 그림자에 몸을 숨기며 전함의 갑판 위로 소리 없이 올라왔다.

그들은 조국의 영토를 잃은 아이오니아인들이었다. 녹서스인이 빼앗기 전까지 이곳 파엘로어 요새를 지켰던 마지막 전사들이었다. 패배의 굴욕과 조상 대대로 내려온 땅에서 모든 녹서스인을 몰아내고자 하는 욕망이 그들의 마음속에서 불타올랐다.

갑판에 오른 그들은 시리크를 기다렸다. 잠시 후 그녀가 나타났다.

“이제 됐어.” 시리크가 말했다.

시리크와 오킨이 앞장섰다. 아홉 명의 아이오니아인들은 전함의 측면을 뛰어넘고는 유유히 석조 부두를 따라 파엘로어 요새로 향했다.

그들은 첫 번째 벽을 향해 유령처럼 그림자에서 그림자로 쏜살같이 움직였다. 순찰대가 다가오면 그림자에 숨어 숨을 죽였다. 녹서스 병사들은 그들의 거친 언어로 말하며 웃고 있었다. 바로 옆 어둠 속에 아이오니아인들이 숨어 있을 것이라고는 상상도 못 했을 것이다.

순찰대가 모퉁이를 돌자 침입자들은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들은 가파른 벽을 빠르게 기어올랐다. 마치 사다리를 오르는 것처럼 쉬워 보였지만, 사실상 손으로 잡을 만한 곳은 하나도 없었다.

시리크가 가장 먼저 성벽 위쪽에 도달했다. 벽 너머를 살핀 그녀는 재빨리 몸을 숨겨 한 손으로 흉벽에 매달려 있었다. 아래에 있는 이들은 숨 죽이고 있다가 시리크가 빠르게 손으로 신호를 보내자 서둘러 올라갔다. 동생 오킨이 올라오자 시리크는 벽을 넘기 전에 주먹을 쥐어 신호를 보냈다. 녹서스 병사들은 아이오니아인 두 명이 흉벽 위를 빠르게 가로지르며 소리 없이 다가오는 것을 전혀 눈치채지 못 했다.

시리크와 오킨이 병사들 사이로 뛰어들었고, 경비병 넷은 칼을 뽑기도 전에 쓰러졌다.

그중 숨이 붙어있던 경비병 하나가 상처를 움켜쥔 채 벽 끝에 위태롭게 서 있었다. 시리크는 연인을 품에 끌어안듯이 그를 붙잡아 조심스레 땅에 눕혔다. 그가 추락했다면 그 소리 때문에 분명 경보가 울렸을 것이다.

다른 이들이 벽을 넘는 사이, 근처에 있던 경비병 둘도 순식간에 소리 없이 처리됐다. 그러자 아홉 명은 일사불란하게 탁 트인 뜰을 쏜살같이 가로질러 안쪽에 있는 두 번째 벽을 올랐다.

그들은 모두 자신의 목표와 요새의 구조를 정확히 파악하고 있었다. 요새를 지은 건 바로 아이오니아인들이었고, 녹서스인들은 요새를 잠시 빌린 자들에 불과했다.

안쪽 벽을 기어오른 그들은 보초병 두 무리의 눈을 가까스로 피해 벽을 넘었다. 그들은 파엘로어에 인접한 돌출된 바위 절벽의 그림자 속에 숨어 어둠과 하나가 되었다.

그때 부두 쪽에서 고함 소리가 울려왔다.

오킨이 낮게 욕을 내뱉었다. “제길, 놈들이 눈치챘어.”

“생각보다 시체를 빨리 찾았군.” 시리크가 말했다. “그래도 바뀌는 건 없어. 계획대로 간다.”

첫 번째 외침이 다른 외침으로 번지며, 요새 전체에 종소리가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소란 좀 피워볼까.” 시리크는 눈을 감고 내면의 생각을 잠재웠다. 그녀는 마음의 눈으로 녹서스 전함의 갑판 밑에 숨겨 둔 검은 수정을 찾아 그것에 힘을 불어넣었다.

시리크는 주술사나 정신을 다루는 마법사는 아니었지만, 여러 아이오니아인들처럼 단순하고 특별할 것 없는 방법으로 대지의 마법을 약간 다룰 수 있었다. 그녀의 재주는 농작물 따위에 마법을 거는 동네 농부들의 재주와 다를 바 없는, 시시하고 평범한 재주일 뿐이었다. 외부인들에게는 놀라운 능력이겠지만, 시리크의 동족에겐 흔한 것이라 대단해 보일 것도 없었다. 휘파람을 불거나 혀를 마는 것처럼 누군가는 할 수 있지만, 누군가는 못 하는 그런 재주 말이다.

시리크는 숨을 깊게 쉬며, 화염석을 자극하기 위해 무언의 힘을 한층 강렬하게 불어넣었다.

그녀의 재주는 사소할지 몰라도, 그 작은 불씨가 만들어 낸 결과는 그렇지 않았다. 물론 그녀의 타고난 힘보다 화염석 수정의 불안정한 성질이 더 큰 역할을 했지만, 어쨌든 결과는 엄청났다.

아래쪽 항구에서 녹서스 전함 ‘붉은 사냥꾼’이 폭발했다. 뿜어져 나오는 불길이 어두운 밤을 밝혔다. 파엘로어의 경보 종소리를 듣고 서두르던 군사들은 가던 길을 멈추고 불길 쪽으로 몸을 돌렸다.

시리크가 눈을 떴다. “가자.”
양쪽에 경비병을 대동한 칼란은 세 꼬리를 거칠게 흔들며 석조 부두를 향해 성큼성큼 걸었다.

“아이오니아 공작원들의 짓인 것 같습니다, 지휘관님.” 초조해 보이는 장교가 잰걸음으로 칼란의 뒤를 따랐다. “아마 흑색화약으로 폭발을 일으켰을 겁니다.”

칼란은 멈춰서 아수라장이 된 부두를 살피며 눈살을 깊게 찌푸렸다.

‘붉은 사냥꾼’은 이미 수면 아래로 모습을 감췄고, 남아 있는 목재는 여전히 불타고 있었다. 근처에 있던 배 세 척은 불길에 휩싸여 선원들이 불을 끄려 노력하고 있었지만, 칼란이 보기에 적어도 그중 한 척은 가망이 없었다. 그는 분노로 이빨을 드러내며 으르렁거렸다.

“부두는 사수했고, 현재 다른 배들도 철저히 수색하고 있습니다.” 장교가 말했다. “폭발물이 더 있다면 찾아낼 수 있을 겁니다.”

칼란은 눈을 가늘게 뜬 채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다. 한쪽 무릎을 꿇은 그는 바닥을 긁더니 코에 손을 갖다 대고 냄새를 맡았다.

“놈들이 아직 여기에 있다면 찾을 수 있을 겁니다.” 장교는 상관의 침묵에 불안한 기색이 역력했다. “이미 달아났을 것 같긴 합니다만...”

일어선 칼란의 시선은 바다에서 부두를 지나 성벽을 향했다.

“이건 비겁한 짓입니다.” 장교가 덧붙였다. “정면돌파는 불가능하니 잔꾀를 부린 거겠죠. 그렇다고 물러설 녹서스가 아닙니다! 녹서스는—”

“조용.” 칼란이 으르렁거렸다. 그는 노란 눈을 끔벅하지 않은 채 처음으로 장교를 쳐다봤다. 장교는 그 시선에 창백해졌다. 구멍으로 도망치는 두꺼비처럼 살짝 움츠러든 것 같기도 했다. “흑색화약이 아니라 화염석이다. 그리고 놈들은 아직 여기에 있어. 이건 비겁한 짓이 아니야.”

장교는 낚아 올린 물고기처럼 아무 말 없이 입을 떡 벌렸다. “그렇습니까…?” 그는 갈라진 목소리로 간신히 말했다.

“그래.” 칼란은 몸을 돌려 파엘로어의 요새를 바라봤다. “이건 눈속임이다.”

칼란은 속을 부글부글 끓였다. 저 얼간이는 나중에 처리할 것이었다. 지금은 훨씬 더 중요한 일에 집중해야 했다.

“꿈꾸는 연못으로 갈 속셈이군.” 그가 으르렁거렸다.
시리크는 녹서스 병사의 입을 막고 있다가, 그의 몸부림이 멈추자 바닥에 내려놓았다. 병사의 옷에 단검을 깨끗이 닦은 그녀는 탑 아래층에서 남은 녹서스 병사들을 처리하고 있는 동생과 다른 이들을 둘러보았다.

이제 거의 다 왔다. 저편 뜰 위로 바위 절벽이 밤하늘로 솟아 있었다. 시리크의 눈이 그 꼭대기를 향했다. 별을 가리는 돌출된 구조물이 그들의 목표를 나타냈다.

파엘로어 전역에 경보 종소리가 울려 퍼지고 있었다.

뜰로 나온 시리크는 절벽에 나 있는 돌계단을 향해 앞장서 내달렸다. 발각되든 말든 상관없었다. 속임수는 더 이상 통할리 없었고 빠르게 움직이는 것 말고는 방법이 없었다.

위쪽에서 고함 소리가 들려오자, 공터를 내달리는 그들에게 화살이 날아왔다. 화살은 빗나가 발밑 자갈에 떨어졌다. 근처 출입구에서 경비병 몇이 나타나 그들에게 달려들었다. 아이오니아인들은 곡도, 낫, 독화살, 칼날 부채를 꺼내면서도 속도를 늦추지 않았다. 그들은 주저하지 않고 병사들 사이로 뛰어들었다. 맹렬한 공격을 미끄러지듯 피하고 공중제비를 돌며, 그 사이에서 춤을 추듯 적들을 쓰러뜨렸다.

그때 첫 번째 아이오니아인이 육중한 미늘창에 맞아 쓰려졌다. 시리크는 치미는 슬픔을 억누르며 동생과 함께 돌파했다. 이들이 지나간 자리에는 병사 몇 명만 쓰러져있을 뿐이었다.

그들은 울퉁불퉁한 돌계단에 도착했다. 요새보다도 훨씬 오래된 계단이었다. 그들은 한 번에 세 칸씩 오르며 꼭대기를 향해 전력 질주하기 시작했다. 계단 양쪽 바위의 봉헌 등불은 꺼져 있었다

녹서스가 이 신성한 곳을 빼앗기 전까지는 밤낮으로 켜져 있던 등불이었다.

또 다른 아이오니아인의 가슴에 화살 두 개가 날아들었다. 그는 소리 없이 뜰 아래로 떨어졌다. 남은 이들은 절벽 꼭대기까지 나 있는 나선형 통로를 쉬지 않고 달려 올라갔다. 화살이 더 날아왔지만 다행히 시리크의 동지들을 비켜 옆 벽을 맞고 떨어졌다.

그들은 나선형 통로를 빠르게 돌아 올라갔다. 어둠 속에서 금속의 반짝임만으로 위험을 감지한 시리크는 본능적으로 몸을 날려 굴렀다. 굉음을 내며 날아온 거대한 창이 그녀를 가까스로 비껴 나가 뒤에 있던 동지에게 명중했다. 그는 공중으로 떠 절벽 아래로 추락했다.

경비병 두 명이 절벽 꼭대기의 성지로 이어지는 입구를 지키고 있었다. 엄청난 근육과 육중한 검은 갑옷으로 무장한 이들의 짐승 같은 손에는 거대한 방패와 묵직하고 들쑥날쑥한 손도끼가 쥐여 있었다.

남은 여섯 명의 아이오니아인들은 칼날을 번쩍이며 이들을 향해 일제히 달려들었다.

시리크가 빠른 속도로 절벽을 두 번 밟고 달려나가 뛰어올랐다. 그녀의 단검이 남자 경비병의 목을 노리는 동시에 오킨은 아래쪽을 공격했다. 경비병이 도끼를 크게 휘두르자 오킨은 굴러서 경비병 뒤쪽으로 피했다. 그가 다리를 공격하자 경비병이 휘청거렸고, 시리크가 검을 찌르자 경비병의 두꺼운 목에 깊은 상처가 생겼다.

그러나 그는 쓰러지지 않았다. 시리크가 균형을 잡기 위해 한 손으로 바닥을 짚으며 몸을 웅크려 가볍게 착지하자 경비병은 포효하며 거대한 방패로 아이오니아인 한 명을 바닥에 내동댕이쳤고, 시리크가 손을 쓸 틈도 없이 쓰러진 그를 가격했다.

여자 경비병 역시 해치우기 힘든 건 마찬가지였다. 보통 사람이라면 버티지 못 할 상처를 입고도 다친 황소처럼 울부짖으며 거칠게 날뛰었다.

오킨은 여자 경비병의 육중한 흉갑 바로 옆 늑골 부분을 마구 공격했다. 그리고 적이 자신을 향해 몸을 돌리자 옆으로 가볍게 피했다. 그때 시리크가 달려들어 또다시 단검을 휘둘렀다. 이번에는 그녀를 향해 몸을 돌리자 다른 동지가 똑같이 뒤를 공격했다. 그들은 마치 거대한 사냥감을 물어뜯는 들개 무리 같았다. 마침내 여자 경비병이 무릎을 꿇었다. 그녀는 욕을 내뱉으며 잠시 몸을 곧게 세웠지만, 결국 앞으로 고꾸라진 후 움직이지 않았다.

남자 경비병은 슬픔과 분노로 포효하며, 아이오니아인 한 명을 향해 손도끼를 사정없이 휘둘렀다. 그러고 나서 쓰러진 동지에게 달려가 무릎을 꿇고는 거대한 팔로 그녀를 부드럽게 감싸 안았다. 마치 싸움을 잊은 듯, 그는 밤하늘을 향해 격렬하고 비통하게 울부짖었다.

오킨과 다른 이들이 끝을 내기 위해 그를 둘러쌌지만, 시리크는 고개를 저었다. “그냥 둬. 우린 할 일이 있잖아.”

경비병은 그녀의 말을 이해하지 못했지만, 그들의 의도는 눈치챘다. 그는 슬픔이 가득한 눈으로 그들을 올려다보고는 다시 일어나 무기를 집었다. 그리고 고함을 지르며 시리크를 향해 달려들었다. 그 자신도 예상했겠지만, 그는 몇 걸음 못가 여자 경비병 옆에 쓰러졌다. 그는 마지막 순간까지 그녀를 향해 손을 뻗고는 숨을 거뒀다.

적이었던 그의 죽음은 시리크를 슬프게 했다. 이 둘은 가족이었을까? 연인? 친구? 시리크는 깊은숨을 쉬며, 눈앞의 임무에 집중할 수 있도록 사사로운 감정을 한구석으로 몰아냈다.

그녀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고는 남은 네 명의 아이오니아인들을 이끌고 동족들이 ‘다엘레 아히라’라고 부른 성지, 꿈꾸는 연못으로 향했다.
파엘로어는 본래 요새로 지어진 게 아니었다. 그보다는 아이오니아 각지의 젊은이들이 타고난 재능을 더 잘 다루기 위해 찾던, 평온과 가르침을 상징하던 곳이었다. 그 모든 게 끝난 건 시리크가 태어나기 몇 년 전이었다. 한때 평화롭고 활기찬, 학구열로 가득했던 섬은 척박한 감옥과 다름없는 곳으로 변해 버렸다. 지금은 요새 주변에서 거의 풀 한 포기도 찾아볼 수 없으며 말라서 바스러질 듯한 가시덤불과 잿빛 이끼만이 자라날 뿐이었다. 많은 새와 야생 동물은 이곳을 피해 근처 섬에 둥지를 틀었다. 이곳에는 녹서스인들과 함께 찾아온 기분 나쁜 까마귀만이 있을 뿐이었다.

침공이 있기 전, 시리크가 이곳에 있던 시절에는 그녀와 다른 경비병들이 다엘레 아히라를 지키며 보초를 섰다. 그들의 임무는 그 안에 붙잡혀 있는 자가 절대 나오지 못하도록 지키는 것이었다.

시리크는 빛나는 너울날개로 가득한 유리구를 높이 들어 올려 길을 밝히며, 어둠 속으로 앞장서 내려갔다. 깊숙이 들어갈수록 기온이 떨어지자 몸이 떨리고 소름이 돋아났다.

돌계단은 습기로 미끄러웠다. 그녀는 발밑을 조심하며 신속하게 내려갔다. 얼마 안 있어 녹서스의 대규모 병력이 들이닥칠 것이었다. 이 임무에서 살아 돌아갈 수 있으리라 생각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중요한 건 이곳에 온 목표를 완수하고, 꿈꾸는 연못에 갇혀 있는 그자를 완전히 끝장내는 것이었다.

그들은 울퉁불퉁한 바위를 미끄러져 내려와 아래에 깔린 얕은 물 위로 착지했다. 드디어 다엘레 아히라에서 가장 깊숙한 곳에 도달한 것이다.

한때 이곳은 아름다운 성지였지만, 지난 몇 년 동안 재앙으로 그 빛이 바랬다.

이곳에는 그들이 그렇게 오랫동안 감시해온 자가 갇혀 있었다.

시리크는 이제 그자를 죽이려 한다.

2.2. 2막

칼란은 바위 절벽의 꼭대기를 향해 힘차게 뛰어 올라갔다. 한 번에 열 계단씩 오른 탓에 병사들과의 거리가 순식간에 벌어졌다. 홀로 정상에 도착한 그는 그곳에 있는 시신을 보고 분노로 으르렁거렸다. 녹서스인 둘과 아이오니아인 둘이었다.

그는 부하들을 기다리지 않고 다엘레 아히라 안으로 뛰어들었다. 그의 고양이 같은 눈은 즉시 어둠에 적응했다. 그는 공기 중에 떠도는 인간들의 냄새를 따라갔다.

어둠 속으로 조용히 사라진 칼란은 사냥을 시작했다.
점점 깊어지는 숲은 아름다움으로 가득했다. 하지만 구불구불한 길을 쿵쿵거리며 걸어가는 소녀의 눈에는 그 어느 것도 보이지 않았다.

빛나는 너울날개들이 빛의 흔적을 남기며 황혼 속에서 춤췄지만, 소녀는 그 아름다움을 의식하지 못한 채 얼굴에서 그것들을 내쫓아 버렸다. 눈을 내리뜬 소녀는 돌멩이를 차서 길 건너에 뒤틀린 뿌리 너머로 보내 버렸다. 우거진 나뭇가지 사이로 언뜻 보이는 황홀한 일몰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활짝 핀 밤붓꽃의 여린 자주색 꽃잎들이 따스한 저녁 공기에 그 빛나는 꽃가루를 내뿜었지만, 소녀는 지나가며 손을 뻗어 줄기에서 꽃을 꺾어 버렸다.

소녀의 얼굴은 수치심과 분노로 타올랐다. 어머니가 야단치는 소리가 여전히 귓가를 맴돌았고, 형제와 다른 이들의 웃음소리도 계속 자신을 따라오는 듯했다.

소녀는 걸음을 멈추더니 고개를 돌려 길 위에 떨어져 있는 꽃잎을 바라보고 눈을 찡그렸다. 이 모든 게 뭔가 이상할 정도로 익숙했다… 마치 예전에도—

소녀의 주변에 검은 형체들이 나타났다. 소녀는 그것들을 또렷이 보기 위해 고개를 돌렸다. 검은 형체는 총 네 개였지만, 똑바로 바라보지 않아야만 알아볼 수가 있었다.

혼란스러운 듯 소녀가 이마를 찌푸렸다. 이건 잘못됐다.

뭔가가 아주 잘못됐다.
시리크와 세 명의 아이오니아인들은 둥글게 서서 물속 깊숙한 곳을 내려다봤다. 수면 아래에는 한 여자가 누워 있었다. 새하얗고 긴 머리카락이 그녀의 주변을 느릿하게 떠다니고 있었다.

‘신드라.’ 그녀의 이름이었다. 가장 어두운 공포와 분노로 통하는 파멸의 대명사이자, 여전히 여러 지역에서 저주하는 이름이었다.

시리크는 얼굴을 가리고 있던 검은 두건을 벗어 한쪽으로 던져 놓았다. 눈 주위를 둘러싸고 있는 정교한 남색 문신은 그녀가 높이 들고 있는 유리구 속 너울날개들의 빛이 일렁이자 마치 몸부림을 치는 듯이 보였다. 다른 이들도 머리를 덮고 있던 것을 벗었다. 얼굴에 모두 비슷한 문신이 있었다. 파엘로어의 수호자를 나타내는 표식이었다. 그들은 모두 굳은 표정으로 신드라를 내려다봤다.

고대 나무의 뿌리가 신드라의 팔다리를 휘감고 있었다. 이미 반은 무너진 이 동굴이 붕괴되지 않도록 나무만이 거대한 돌들을 지탱하고 있었다. 뿌리는 아이를 안은 엄마처럼 그녀를 보호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고, 그녀가 풀려나지 않도록 붙잡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죽은 것처럼 보였지만, 그녀의 가슴은 숨을 쉬듯 안정적으로 오르내리고 있었다.

신드라는 전혀 위험해 보이지 않았지만, 시리크는 그것이 얼마나 잘못된 판단인지 잘 알고 있었다. 그녀는 파엘로어의 중심에 있던, 한때 평화로웠던 사원을 파괴한 자였고, 대지의 영혼이 그녀를 이곳으로 끌어당겨 이 기이한 상태로 옭아매고 나서야 그녀를 통제할 수 있었다.

시리크는 한때 왜 신드라를 살려 두느냐고, 그냥 죽이면 잠에서 깨어날 일도 없지 않겠냐고 물었다. 시리크의 늙은 스승은 웃으며, 땅이 그녀가 죽길 원했다면 왜 그녀를 살게 하겠냐며 되물었다. 시리크는 대답하지 못했다. 그때도 그랬지만 지금은 더더욱 그랬다. 늙은 스승은 균형에 관해 얘기했지만, 이 잠자는 여인의 감시자로 복무하던 대부분의 이들과 함께 녹서스인의 손에 목숨을 잃었다. 하지만 그녀는 여전히 살아 있다. 이것을 균형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일까?

신드라는 살아 있는 한 위험한 존재였다. 시리크와 다른 이들이 다엘레 아히라를 지키는 동안은 억눌려 있었을 뿐이다. 하지만 녹서스인들이 이곳을 지배하고 있는 지금은… 그 얼간이들이 실수로든, 그녀의 파괴적인 힘을 이용하려는 어리석은 생각을 하든, 그녀가 풀려날 가능성이 높았다.

그렇게 돼서는 안 된다. 감당하기엔 너무 큰 위험이다. 신드라는 죽어야만 한다. 오늘 밤에.

시리크는 너울날개로 가득 차 빛나는 구체를 동생에게 넘기고, 검을 뽑아 더 깊은 곳으로 발을 내디뎠다.

“잠깐.” 오킨이 말했다.

“시간 없어. 곧 놈들이 들이닥칠 거야. 지금 끝내야 해.”

“근데, 우리가 신드라를 이용할 수도 있지 않을까.”

그 말을 들은 시리크는 굳어버렸다. 그녀는 동생을 향해 천천히 몸을 돌렸고,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어쨌든 같은 아이오니아인이잖아.” 오킨이 말했다. “든든한 아군이 될 수도 있어. 신드라가 있으면 녹서스를 확실히 몰아낼 수 있다고!”

“그 후에는? 신드라를 통제할 수 있을 것 같아?”

“통제할 필요 없어.” 오킨이 열정에 찬 목소리와 함께 앞으로 나섰다. “함께 녹서스의 본토를 공격하면 돼! 우린—”

“어리석구나.” 시리크가 조소에 찬 낮은 목소리로 말을 잘랐다. 그녀는 뒤로 돌아 미동조차 없는 신드라를 향해 물을 헤치고 나아가기 시작했다.

“내가 가만히 있지 않을 거야. 아니, 우리가 가만히 있지 않을 거야.”

그제야 시리크는 동생과 다른 두 명의 동지가 무기를 꺼낸 채 자신의 주변을 에워싸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가만히 있지 않겠다고?”

“누날 다치게 하고 싶지 않아.”

시리크는 그들을 번갈아 보며 거리를 쟀고, 그들이 자신을 막기 전에 신드라를 죽일 수 있을지 가늠했다. 아슬아슬할 듯싶었다.

“난 그러라고 한 적 없어. 우린 신드라를 끝장내러 온 거지 풀어주러 온 게 아니야.”

“이건 우리에게 기회가 될 수도—”

“아니.” 시리크가 말했다. “모르겠어? 이런 분열 때문에 아이오니아가 무너지고 녹서스인들의 손에 놀아나는 거야. 우리는 서로 함께해야 할 때 싸우고 반대하면서 분열됐어.”

“그럼 우리와 함께하자.” 오킨이 간청했다.

시리크는 미동 없는 신드라의 모습을 가리켰다. “신드라는 녹서스보다 훨씬 위험한 존재야. 절박함에 빠져 어리석은 생각하지마.”

“이번 한 번만이라도 그 고집 좀 꺾어 봐!”

“날 설득할 생각 마.” 시리크가 말했다. “그래서, 날 죽이기라도 하려고?”

“제발, 그러고 싶지 않아.” 오킨이 말했다.

네 명은 잠시 꼼짝하지 않고 서 있었다. 아직은 아무도 상황을 악화시킬 준비가 되지 않은 듯 했다.

그때 어둠에서 살기를 띈 그림자 하나가 떨어져 나와 그들에게 달려들었다.

시리크는 고함을 치며 경고의 신호를 보냈다. 그 움직임에 놀란 오킨과 나머지 둘은 그녀가 공격하는 줄 알고 무기를 들었다. 그중 하나가 본능적으로 투척 단검 한 쌍을 날렸다.

시리크는 몸을 돌려 첫 번째 단검을 피했지만, 두 번째는 피하지 못 했다. 고통스러운 신음을 내며 뒷걸음질 치던 그녀는 맥없이 물속으로 쓰러졌다.

시리크를 공격한 아이오니아인은 진짜 적이 뒤에 있다는 사실을 너무 늦게 깨달았다. 그림자는 그를 기습했고 구석으로 내던져버렸다. 그리고는 검을 버린 채 오킨에게 달려들었다.

그는 녹서스의 갑옷을 입은 바스타야였다. 그는 입을 크게 벌려 날카로운 이빨을 드러내며 포효했다. 그 소리는 동굴 안에 날카롭게 울려 퍼졌다.

힘겹게 다시 일어서려던 시리크는 당연히 그를 알아봤다. 동족과 아이오니아를 배신하고 적과 손을 잡은 플레시디엄의 반역자, 칼란이었다. 그는 파엘로어를 포상으로 받았다. 주인에게 복종하는 충성스러운 개에게 던져진 뼈다귀였다. 시리크와 오킨은 그의 손에 적잖은 동지를 잃었다.

“녹서스의 앞잡이!” 오킨이 검을 세우고 자세를 낮추며 말했다. “넌 우릴 배신하고 조국을 버렸다!”

칼란은 오킨을 향해 걸으며 씁쓸하게 웃었다. 그가 손에 힘을 주자, 손끝과 팔뚝 옆을 따라 긴 발톱이 튀어 나왔다.

“아이오니아는 없다.” 칼란이 으르렁거렸다. “물론 과거에도 없었지. 천 개의 인간 문화가 각자 다른 믿음과 관습, 역사, 갈등을 갖고 최초의 땅 전역에 흩어졌다. 너희는 애초에 서로 단결한 적도, 하나였던 적도 없었어.”

“그렇다면 이제부터 달라질 거야.” 오킨이 말했다. “넌 편을 잘못 선택한 것 같군.”

“잘못 선택해? 전쟁은 아직 안 끝났단다, 꼬마야.”

투척 단검에 맞은 시리크는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잔잔한 바람에 흔들리는 붉은 띠가 물속에 흩날렸다. 그녀는 단검을 공중에 던져 한 바퀴 돌린 후 검날을 잡았다. 그리고 손목을 재빠르게 놀려 오킨에게 다가가고 있는 배신자를 향해 단검을 던졌다.

단검은 그의 목 옆에 깊은 상처를 냈지만, 시리크는 조준이 살짝 빗나간 것에 아쉬워했다. 그를 죽이기에는 역부족이었다. 하지만 오킨과 마지막으로 남은 동지가 그 순간을 놓치지 않고 그에게 덤벼들었다.

칼란은 자신을 향해 돌진한 오킨을 손바닥으로 밀쳐낸 후 발로 걷어 차버렸다. 아이오니아인 동지는 칼날 부채로 공중을 가르며 그의 측면에서 빠르게 접근했지만, 칼란은 다친 상태에서도 너무 빠르고 강했다.

그는 칼날 부채가 다가오자 몸을 돌려 요리조리 피했다. 그리고 앞으로 달려들어 양손으로 그녀의 옷을 붙잡고는 벽에 내동댕이쳤다. 벽에 머리를 부딪친 그녀는 끔찍한 소리를 내며 쓰러졌다.

칼란의 고양이 같은 노란 눈이 다시 오킨을 향했다.

시리크는 오킨을 도와주기엔 거리가 너무 멀다는 것을 바로 깨달았다. 대신 그녀는 뒤로 돌아 힘겹게 신드라에게 다가가기 시작했다. 이곳에 온 목표를 달성할 참이었다. 어차피 이 여정에서 살아남아 탈출하리라곤 기대하지도 않았지만, 자신들의 죽음이 헛되어서는 안 됐다.

동생의 처절한 절규와 바스타야의 포효가 들렸지만 돌아보지 않았다. 더 깊은 물 속으로 들어가 손을 아래로 뻗어 신드라의 목을 감싸 쥐었다. 그녀의 피부는 따뜻했다. 시리크는 그녀의 숨통을 끊기 위해 다른 한 손으로 검을 뽑았다.
이건 잘못됐다.

뭔가가 아주 잘못됐다.

소녀는 여전히 자신을 둘러싼 밤의 숲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양치식물과 뒤틀린 뿌리, 머리 위에 우거진 나뭇가지 너머로 비치는 노을의 마지막 빛깔도 볼 수 있었다.

하지만 동시에 고함과 포효 소리가 약하게나마 들려왔다. 마치 멀리서 들려오는 소리처럼… 아니면 여긴 물속인가?

그 순간 소녀는 목에 액체가 차오르는 걸 느꼈다. 갑자기 공포감이 몰려들었다. 소녀는 물에 잠겨 있었다! 하지만 그건 불가능했다. 이곳은 땅거미가 지고 있는 마을 밖 숲이었다. 근처 어디에도 물은 없었다.

소녀의 앞에 그림자 같은 형상이 나타났다. 마치 악몽이 실체 없는 형상으로 나타난 것 같았다. 갑자기 목이 졸리는 느낌이 들었다. 소녀는 숨을 쉬기 위해 몸부림쳤다.

소녀의 눈이 깜빡였다. 소용돌이 문신으로 뒤덮인 젊은 여자의 얼굴이 언뜻 보였다. 마치 물속에서 바라보는 것처럼 이상하고 흐릿한 모습이었다. 여자는 소녀의 목을 움켜쥐고 조르며, 검을 들어 내리—

아니다.

소녀는 다시 숲으로 돌아왔다. 끔찍한 환영 같은 것이 보였다. 소녀는 수치와 분노로 뺨을 물들인 채 이곳을 달릴 뿐이었다. 유령 버드나무가 있는 곳으로 가서 차오르는 분노를 가라앉힐 것이다.

아니, 그건 이미 했다. 수십만 번을 되풀이한 일이었다. 그 순간은 계속해서 반복되었다.

만약 이게 꿈이고 아까 본 것이 현실이라면?

신드라의 안에서 증오와 분노로 인한 어둠이 치솟았다.

그리고 그녀는 끝없는 꿈속에서 깨어났다.
시리크는 신드라의 눈이 번쩍 떠지는 것을 봤다.

시리크가 필사적인 외침과 함께 검을 내리찍었지만,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보이지 않는 힘에 갑자기 공중으로 끌려간 탓이다. 힘에 저항하며 격하게 몸부림쳤지만, 차라리 밀려오는 파도에 맞서는 것이 더 쉬울 정도였다. 그녀는 어미의 입에 물린 새끼 고양이만큼 무력했다.

오랜 세월 팔다리를 감고 있던 뒤틀린 뿌리에서 빠져나온 신드라는 숨을 크게 들이쉬며 모습을 드러냈다. 그녀가 수면 위 공중으로 높이 떠오르자 몸에서 물이 흘러 떨어졌다. 물은 그녀의 아래에서 은은히 빛나며 고동치고 있었다. 시리크를 무력하게 공중으로 높이 들어 올린 신드라의 한쪽 손은 어둠의 힘을 내뿜고 있었다. 신드라의 눈은 차가운 불꽃으로 타올랐다.

시리크가 믿을 수 없다는 듯 겁에 질린 채 바라보자 신드라의 머리 위에 투구가 생겨났다. ‘왕관’ 같기도 했다. 그것은 살아있는 어둠처럼 신드라의 이마를 휘감더니 휘어진 뿔 한 쌍이 되어 높이 솟아났다. 그 중앙에는 순수한 어둠의 구슬이 생겨 원석만큼 단단해졌다. 구슬은 그녀에게서 흘러나오는 힘과 같은 힘으로 타오르고 있었다.

시리크가 공중에서 몸부림치는 사이에 오킨이 칼란의 손아귀에서 벗어났다. 오킨은 그와 동시에 경외감에 사로잡힌 표정으로 신드라를 바라봤다. 칼란은 충격에 휩싸인 듯 눈을 부릅뜨고 이빨을 드러낸 채 그녀를 경계했다.

무언가 빨아들이는 무시무시한 소리와 함께 공중에서 완전한 암흑으로 된 구체 세 개가 형성되더니 신드라를 중심으로 천천히 돌기 시작했다. 구체는 동굴 속의 희미한 불빛마저 삼키고 시리크의 영혼을 끌어당기는 듯했다. 혐오와 절망의 끔찍한 감각이 시리크를 움켜쥐었다.

“얼마나 되었지?” 신드라가 오랫동안 사용하지 않아 불안정하게 갈라진 목소리로 물었다. “내가 이곳에 갇힌 지 얼마나 되었지?”

“수년.” 시리크가 내뱉듯 말했다. “수십 년은 되었지. 진작에 널 죽였어야 했는데.”

시리크는 속에서 찌르는 듯한 통증과 함께 신드라의 증오가 치솟는 것을 느끼고는 숨을 들이켰다. 신드라는 분노에 가득 차 으르렁거리더니, 손짓으로 시리크를 멀리 날려 버렸다.

한참을 날아가 벽에 세게 부딪힌 시리크는 첨벙거리는 소리와 함께 바닥으로 떨어졌다. 그러자 신드라의 어두운 시선이 오킨과 칼란에게 향했다.

시리크는 고통스러운 듯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몸을 똑바로 일으키려다가 움찔한 그녀는 왼쪽 다리와 늑골이 적어도 하나 이상 부러졌다고 판단했다. 그녀는 동생이 간청하듯 두 손을 든 채 비틀거리며 신드라를 향해 걸어가는 것을 보고 비명을 질렀다.

“안 돼, 오킨…” 시리크는 힘없는 목소리로 간신히 말했다.

“난 적이 아니야!” 오킨이 외쳤다. “우린 같은 아이오니아의 자식이지! 우리와 함께하자!”

신드라는 힘이 뿜어져 나오는 시선으로 그를 내려다보았다.

“녹서스인들이 우리의 땅을 침략하고 동족을 학살했다!” 그는 계속해서 말했다. “놈들은 물러났지만, 아직도 조상 대대로 내려온 이 땅에 발을 딛고 있지. 놈들은 이대로 물러나지 않을 거야! 아이오니아는 분열되었고 힘을 잃은 상태다. 그러니 우리가 녹서스놈들의 폭압에 맞설 수 있게 도와줘!”

“네가 말하는 녹서스인들이라는 게 누구인지 모르겠군.” 신드라가 답했다. “하지만 동족을 학살했다면 그들에게 감사해야겠어. 나에게 폭압을 휘둘렀던 건 내가 한때 동족이라고 불렀던 자들뿐이니까.”

오킨은 경악을 금치 못했다. 자신의 어리석음을 드디어 깨달은 것 같았다. 좌절한 그는 무릎을 털썩 꿇었다.

소름 끼치게 찢기는 소리와 함께 신드라가 또 다른 검은 구체를 만들어 냈다. 그녀의 모든 고통과 원망, 분노가 분명한 형태를 드러내고 있었다. 구체는 신드라의 손 위에 떠서 천천히 회전했다.

“네가 아이오니아인이라면, 내 적이겠군.”

시리크는 비명을 질렀지만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신드라는 손을 휙 튕겨 구체를 날렸다. 구체가 오킨의 몸을 공격하자 그의 숨이 멎었다. 그리고 그는 물속으로 가라앉았다.

그때 발톱을 길게 꺼낸 칼란이 그림자에서 뛰어올라 신드라를 공격했다. 하지만 그녀가 또 다른 손짓으로 자신의 주변을 선회하던 세 구체를 날리자 그가 뒤로 날아갔다.

“넌…” 신드라는 그가 누구인지 확인하려는 듯 고개를 옆으로 기울이며 말했다. “낯익은 얼굴이군. 내 꿈을 악몽으로 만든 자...” 그녀의 표정이 더욱 어두워졌다. “감시자. 날… 날 이곳에 붙잡아 둔 감시자였어.”

시리크는 칼란이 한쪽 무릎을 꿇으며 몸을 일으키는 것을 보았다.

“넌 괴물이야.” 그가 낮게 말했다.

신드라가 손을 찌르듯 내밀자 으르렁거리던 칼란이 공중으로 떠올랐다.

꿈꾸는 연못의 물이 요동쳤다. 시리크는 신드라를 붙잡고 있던 뿌리가 그녀를 되찾기 위해 뻗어 나가는 것을 놀라운 눈으로 바라보았다.

“그렇다면 날 죽여!” 칼란이 으르렁거리듯 말했다. “하지만 넌 영원히 평화로울 수 없을 것이다. 모든 세상이 널 증오하고 쫓을 것이야. 넌 절대 자유를 되찾을 수 없어.”

“죽이라고?” 신드라가 분노로 입술을 일그러뜨리며 말했다. “아니, 그건 너무 시시하잖아.”

신드라는 팔을 휘둘러 칼란을 물속으로, 꿈틀거리고 있는 뿌리의 손아귀 속으로 처넣었다. 뿌리는 반사적으로 그의 팔다리를 옥죄어 그를 물속에 잡아 두었다. 그가 소리를 지르자 그의 주변에서 공기 방울이 떠올랐다… 그리고 모든 게 잠잠해졌다.

시리크는 곧 자신도 죽을 것이라는 생각에 반항적으로 신드라를 노려봤다. 하지만 놀랍게도 신드라는 시리크를 전혀 신경 쓰지 않은 채 천장을 바라보았다. 신드라가 소리를 지르며 어둠의 기운으로 둘러싸인 양손을 높이 치켜들자 동굴 천장이 갈라지면서 먼지와 돌덩이가 웅덩이로 떨어졌고 물이 사방으로 튀어 올랐다.

신드라가 팔을 거칠게 가르자, 귀청이 터질 듯한 폭발음과 함께 천장이 산산조각이 났다. 거대한 돌덩이가 요란한 소리를 내며 그녀의 주변에 떨어졌다. 시리크는 필사적으로 뒤로 물러났다. 움직일 때마다 다리와 옆구리에 타는듯한 고통이 느껴졌다.

아득히 높은 하늘에서 별이 깜박였다. 신드라는 자유를 향해 떠오르기 시작했다. 그녀는 고개를 돌려 뿌리에 휘감긴 채 미동조차 없이 물에 잠겨 있는 칼란의 모습을 한 번 내려다봤다.

“이제 네가 꿈을 꿀 차례다.” 그렇게 속삭인 신드라는 양팔을 휘둘러 무너진 바위로 그를 완전히 파묻어 버렸다.

시리크는 움직일 때마다 고통에 움찔거리면서 밖을 향해 기어갔다. 그녀 역시 자칫하면 바위에 깔릴 수 있었기에…
섬에는 지진이라도 난 것처럼 낮은 굉음이 울려 퍼졌다. 그 울림은 영원히 그치지 않을 듯이 계속되었다.

그리고 마침내 소리가 그치자 파엘로어에는 불안한 침묵이 내려앉았다.

밖으로 기어 나와 신선한 공기를 들이쉰 시리크는 충격에 휩싸인 듯 휘둥그레진 눈으로 주변을 둘러봤다. 요새의 절반이 족히 사라졌다.

그녀의 시선이 위로 이끌렸다. 별이 있어야 할 곳에는 어둠만이 있었다. 하지만 곧 현실을 깨달은 시리크는 말을 잊지 못 했다. 그녀가 본 것은 밤하늘에 매달려 있는 거대한 탑들과 성벽의 윤곽이었다. 섬에서 뜯겨 나간 그것들은 바다로 떨어지지 않고 공중에 떠 있었다.

그녀는 입을 크게 벌린 채 바라보았다. 신드라가 강력하다는 건 알았지만, 이건 상상조차 하지 못한 수준의 힘이었다.

눈앞 광경에 몸이 굳은 시리크는 아래쪽 항구에 정박한 녹서스 전함 한 척이 하늘로 떠오르고 있는 것을 보았다. 배가 더 높이 올라가자, 병사들이 개미 떼처럼 갑판에서 떨어져 암초로 추락했다. 이어 전함이 다른 선박 두 척 위로 떨어졌다. 두 선박은 완전히 산산조각이 났다. 재앙이나 다름없는 광경이었다.

폐허가 되어 하늘에 떠 있던 성이 북쪽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여명의 첫 번째 빛줄기가 수평선 위로 떠오를 때까지, 시리크는 홀로 산산이 부서진 다엘레 아히라의 꼭대기에서 성이 떠나가는 것을 바라보았다.

그날 밤의 일은 시리크를 무겁게 짓눌렀다. 동생과 파엘로어의 마지막 수호자들이 죽었다. 그녀만 살아남았다.

다른 때였다면 녹서스인들이 파멸했다는 사실에 크게 기뻐했겠지만, 그녀의 마음은 무거웠다.

신드라가 세상에 돌아왔다.

그들은 실패한 것이다.
칼란은 예언자가 말할 때까지 기다리며 아무 말 없이 가만히 무릎을 꿇고 있었다. 그녀는 보라색 피부를 지닌 신비로운 존재였다. 그녀의 이마에는 진줏빛 뿔 하나가 돋아나 있었다. 그녀를 칼란의 혈통인 바스타야샤이레이의 후손으로 오해하는 자도 있겠지만, 그랬다면 동족들이 알았을 것이다.

예언자는 칼란의 조상들보다도 더 먼 과거에 살았던 종족의 일원이었다.

그녀가 눈을 떴다. 그 황금색으로 얼룩진 기이하고도 다정한 눈은 눈으로 볼 수 있는 그 이상의 것을 봤다. 슬픔에 잠긴 눈을 본 칼란의 가슴이 내려앉았다.

“난감한 선택에 직면했구나.” 그녀가 단풍이 바스락거리듯 조용한 목소리로 말했다.

“제가 해야 할 일을 말씀해 주십시오.” 칼란이 말했다.

“이건 내가 결정할 일이 아니다. 네 앞에는 두 길이 놓여 있지만 단 한 길만 선택할 수 있지. 경고하자면, 두 길 모두 비극과 슬픔으로 이어질 것이다.”

칼란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말씀하십시오.”

“첫 번째 길이다. 넌 녹서스인들과 싸운다. 나보리의 플레시디엄에서 대전투가 일어날 것이고, 많은 이들이 피를 흘리겠지만, 아이오니아는 승리한다. 넌 영웅으로 떠받들어질 것이고, 너와 네 심장 빛은 오랫동안 행복하게 살 것이다. 하지만 네 자식들은 둘 다 수명보다 일찍 세상을 떠나게 될 것이고, 넌 그들의 죽음을 지켜봐야 할 것이다.”

칼란은 숨을 깊게 들이쉬었다. “다른 길은요?”

“넌 녹서스인들 편에 서서 싸운다. 네 심장 빛은 물론이거니와 아이들도 두 번 다시 보지 못한다. 널 배신자라고 부르며 네 이름을 저주할 것이다. 어둡고 씁쓸하며 모욕적인 길이다. 동족들은 널 증오하고 녹서스인들은 널 경멸할 것이다. 그들이 플레시디엄에서 패배하면, 넌 꿈꾸는 동굴을 지키며 파엘로어의 섬에서 밤낮으로 경계해야 한다. 그곳이 네가 있을 곳이다.”

“제 아이들은요?”

“아이들은 세상 어디에 있든 행복하게 살 것이다. 하지만 넌 아이들의 얼굴을 다시는 보지 못한다. 또한 이 어두운 길에서 벗어나려고 한다면 아이들을 잃게 될 것이다.”

칼란이 고개를 끄덕이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는 사무치는 슬픔을 억눌러 마음속 깊은 곳으로 밀어 넣었다.

그는 예언자의 성지를 자세히 둘러보다가 뭔가가 이상할 정도로 익숙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전에 이곳에 와 본 듯한 느낌이 어렴풋이 들었다. 마치 이 지독한 슬픔과 상실감을 여러 번 느꼈던 것처럼.

그는 고개를 저었다. 이 저주받을 순간에 영원히 갇히는 건 죽음보다 더 끔찍한 운명일 것이다.

“딱하구나.” 예언자가 말했다. “정말 괴로운 선택이 될 것이니.”

“아니요.” 칼란이 말했다. “전 이미 결정했습니다.”

3. 구 설정

3.1. 구 단문 배경

"힘이란 그걸 마음대로 다룰 수 있는 자에게 어울리는 것이지." ~ 신드라

무시무시한 어둠의 마법사 신드라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강대한 힘을 자유자재로 다룬다. 아이오니아 출신으로 마법의 힘을 타고났으며, 어렸을 때부터 제멋대로 마법을 쓰고 다니는 바람에 마을 장로들을 아연실색하게 만들었다. 장로들은 신드라를 외딴 곳에 보내 엄격한 통제 하에 훈련을 받게 했다. 하지만 신드라는 얼마 안 가 스승을 뛰어넘었고, 스승이 그 동안 자신의 힘을 억제시켰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비겁한 수법에 배신감을 느끼고 격분한 신드라는 스승을 처치해 버렸다. 그리고 어둠의 구체를 조종하는 자신의 능력을 억제하려는 자는 모조리 파멸시키겠다고 마음먹었다.

3.2. 구 장문 배경

강대한 마력을 타고난 신드라는 자신의 힘을 잠시도 썩히고 싶어하지 않는다. 마법을 사용해 자신의 힘을 스스로 확인하고 타인에게 각인시킬 때야 비로소 그녀는 기쁨이란 감정을 느낄 수 있다. 깊이를 알 수 없는 신드라의 잠재력은 하루하루 점점 더 강력하고 파괴적인 힘을 그 손에 쥐여주지만, 그녀는 오로지 제 힘에 흠뻑 취해 균형이나 자제 따위는 생각조차 않는다. 만약 상급자들이 그녀의 마력을 억지로 제어하려 든다면 신드라는 그들 모두를 몰살시켜 버리는 한이 있더라도 자신의 힘을 절대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

아이오니아 출신인 신드라는 어렸을 때부터 마을의 장로들을 종종 아연실색하게 만들었다. 자신이 강력한 마력을 타고났다는 것을 깨달은 뒤부터 내키는 대로 마법을 사용하고 다녔기 때문이었다. 근심이 끊이지 않았던 장로들은 결국 이 말썽꾸러기를 외딴 사원의 늙은 마법사에게 맡기기로 의견을 모았다. 신드라는 풀이 죽은 채로 사원에 도착했으나, 그곳의 늙은 마법사는 사실 그 사원은 일종의 마법 학교이며 자신이 손수 그녀의 재능을 한 단계 발전시킬 수 있도록 지도해 주겠노라 약속했다. 뜻밖의 선물을 받은 신드라는 더할 나위 없이 기뻐했고 그 후 늙은 마법사 밑에서 오랫동안 수련을 쌓았다.

그런데 무언가 석연치 않았다. 어린 시절엔 자신이 매 순간 더 강해지는 것을 체감할 수 있었는데, 지금은 아무리 수련을 해도 힘이 커지지 않았던 것이다. 점점 절망의 나락으로 빠져들던 신드라는 결국 스승과 대면하여 그 이유를 묻기에 이르렀고, 더 이상 진실을 숨길 수 없어진 스승은 자신을 제어하는 법을 깨우치도록 하기 위해 그녀의 마법을 약화시켰다는 사실을 털어놨다. 신드라는 배신감에 몸서리치며 스승에게 당장 자신을 억누르고 있는 주문을 풀어내라며 소리를 지르기 시작했다. 놀라 뒷걸음질치던 그 늙은 마법사는 이토록 자제력이 부족하다면 영원히 마법을 쓰지 못하게 힘을 빼앗을 수밖에 없다며 신드라를 타일렀다. 그러나 그 말은 그녀를 진정시키기는커녕 불에 기름을 부은 격이었다. 신드라는 분노에 가득 차 자신이 가진 모든 힘을 끌어 모아 늙은 스승을 벽에 내동댕이쳤다. 이윽고 스승의 숨이 끊어지자 몇 년 동안이나 속박되어 있던 마력이 물밀듯 차오르기 시작했다.

비록 다시 자유를 찾긴 했지만, 신드라는 자신의 재능을 앗아가려 했던 사회로 돌아가는 대신 이제껏 자신을 가두고 있던 이 감옥을 요새로 삼기로 결심했다. 그녀는 마력을 발휘해 건물을 바닥부터 통째로 들어 올려 공중에 띄웠다. 이제 마음껏 힘을 키워나갈 수 있게 된 신드라의 다음 목표는 바로 약해 빠지고 어리석은 아이오니아의 지도자들과 그녀의 위대함에 감히 족쇄를 채우려 하는 참견꾼들을 파멸로 몰아넣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