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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0-20 01:32:58

신지비사



神誌秘詞

1. 개요

삼국유사, 고려사에 언급한 책. 현전하지는 않는다.

편찬시기는 불명이나 고려의 3경을 언급하는 대목으로 보아 안동대도독부가 동경으로 승격되면서 고려 3경제가 완성된 987년[1]~ 1097년[2] 사이에 편찬되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이후 삼국유사에 일부 내용이 인용되었고, 여말선초의 인물 권근이 언급한 신지비설이 신지비사의 이명으로 보인다.

일제강점기에 활동한 신채호조선왕조실록 중 세조실록 기록에서 개인이 소장할 수 없는 책 목록 중 하나로 언급된 고조선비사(古朝鮮秘詞)가 신지비사와 동일한 책이라는 의견을 제시했다.

2. 기록

≪당서≫에는 “개소문이 스스로 막리지(莫離支)라고 했으니, 중서령(中書令)과 같다”고 하였다. 또 ≪신지비사(神誌秘詞)≫의 서문에는 “소문(蘇文) 대영홍(大英弘)이 서문과 아울러 주석하다”고 했으니, 즉, 소문이 곧 직명인 것은 문헌으로 증명되지만, 전기에 이르기는 “문인(文人) 소영홍(蘇英弘)의 서문”이라고 하였으니, 어느 것이 옳은지 알 수 없다.
唐書云, “盖蘇文自謂莫離攴猶中書令.” 又按神誌秘詞序云, “蘇文大英弘序并注.” 則蘇文乃職名有文證, 而傳云 “文人蘇英弘序”, 未詳孰是.
삼국유사 제3 흥법(興法第三) 보장봉로 보덕이암(寶藏奉老 普德移庵)
또 「신지비사(神誌秘詞)」에서 말하기를, ‘저울추[秤錘]와 저울접시[極器]에 비유하자면 저울대[秤幹]는 부소(扶疎)이며, 저울추는 오덕(五德)을 갖춘 땅이고, 저울머리는 백아강(百牙岡)이다. 〈이곳에 도읍을 정하면〉 70개 나라가 항복하여 조공을 바칠 것이며 〈땅의〉 덕에 힘입어 신기(神氣)를 수호할 수 있을 것이다. 〈저울의〉 머리와 꼬리를 정밀하게 하여 수평을 잘 잡을 수만 있다면 나라를 융성하게 하고 태평성대를 보장받을 것이고, 만약 비유로 들은 세 곳의 땅을 버린다면 왕업은 쇠퇴할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생략)
고려사 열전 권제35 방기 김위제
《삼국유사》에,는 “단군이 처음에는 평양(平壤)에 도읍을 정했고, 또 백악산(白岳山) 아사달(阿斯達)로 옮겼다.” 하고
또, “아사달은 또 백악(白岳)이라고도 하는데, 백주(白州) 지금의 배천(白川)이다. 에 있다. 혹은 개성(開城) 동쪽에 있다고 하는데 지금 백악궁(白岳宮) 지금은 미상 이 바로 그것이다.”
하였으나, 모두가 확정되지 않은 말이다. 《고려사》 김위제전(金謂磾傳)에서는 신지선인(神誌仙人)의 비사(秘詞)에 있는 백아강(白牙岡)에 대한 설을 인용하여 서경(西京)평양(平壤) 을 거기에 해당시켰다. 신지(神誌)는 단군 때 사람이라고 세속에서 전한다. 권남(權擥)의 응제시(應製詩) 주(註)에 보인다.(생략)
동사강목 부록 하권 지리고(地理考) 백악고(白岳考) 부(附) 아사달(阿斯達)
[국도] 성현(成俔)의 《용재총화(慵齋叢話)》에 이르기를, “우리 태조가 개국하자 도읍을 옮기자는 의논이 있었다. 먼저, 계룡산(鷄龍山) 남쪽에서 도읍할 만한 땅을 보았는데, 얼마 안 가서 공사를 중지하고 다시 한양(漢陽)에 도읍을 정하였다. 삼각산(三角山) 서쪽 연서역(延曙驛) 들은 땅이 아름답기는 하나 후에 다시 보니 모든 산이 밖으로 등지고 달아나는 형세라, 백악산(白岳山 북악) 남쪽과 목멱산(木覓山 남산) 북쪽이 제왕(帝王)의 만 년 터가 되어 하늘과 더불어 다함이 없는 것만 못하였다. 항간에서 전하는 말에, “송경(松京)은 산곡(山谷)이 둘러싸서 포장(包藏)하는 형세이므로 세상에 권신(權臣)의 발호(跋扈)가 많았으며, 한양은 서북쪽이 높고 동남쪽이 낮으므로 장자(長子)가 가볍고 지자(支子)가 중하게 된다고 한다.” 하였다. 양촌(陽村) 권근(權近)이 말하기를, “《신지비설(神誌祕說)》에 저울로 세 서울[三京]을 비유하였는데, 삼각산 남쪽으로 오덕구(五德丘)를 삼아서 저울추에 비유하였다. 오덕(五德) 가운데 면악(面岳)이 있어 원형(圓形)이니 토덕(土德)이요, 북쪽에 감악(紺岳)이 있어 곡형(曲形)이니 수덕(水德)이요, 남쪽에 관악(冠岳)이 있어 첨형(尖形)이니 화덕(火德)이요, 동쪽에 양주(楊州) 남행산(南行山)이 있어 직형(直形)이니 목덕(木德)이요, 서쪽에 수주(樹州) 북악(北岳)이 있어 방형(方形)이니 금덕(金德)이다.” 하였다.
신증동국여지승람 제2권 경도

[1] 서경은 921년에 승격되었다.[2] 김위제가 숙종에게 도선기와 함께 신지비사를 거론하며 함께 남경천도론을 주장한 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