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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0-02-23 16:53:56

십자군/연표/힘의 균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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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힘의 균형2. 이집트를 얻는 자,3. 살라흐 앗 딘 유수프4. 하틴의 뿔

1. 힘의 균형

2. 이집트를 얻는 자,

3. 살라흐 앗 딘 유수프

4. 하틴의 뿔



[1] 토그릴 2세의 아들 아르슬란 샤의 아타베그[2] 이해 시토 수도회의 피에트로 수도원의 수사들이 그들 중 한명인 디에고 벨라스케스의 주도로 칼라트라바의 특별 지휘권 얻음. (알폰소 7세가 그누구든 무슬림들로부터 방어할 수 있는 사람이 가지라한 상태) 칼라트라바 기사단 창단. 다만 평화 중시여기는 다른 시토회 수사들과 갈등. 1163년 그 지도자인 피에트로 수도원장이 사망하자 대부분의 '무장 수사'들은 본업으로 돌아감 / 한편 보두앵의 동생이자 자파-아슈켈론의 영주 아모리가 조슬랭 3세의 누이 아그네스 (8촌지간이라 성직자들은 그 정당성의 의문을 품었지만)와 결혼. 추후 분쟁의 발단[3] 티그리스 강 동안으로 철수하고 양쪽을 잇는 다리 파괴함[4] 누르 앗 딘, 부카이아 고개를 넘어 베카 협곡 따라 남하함. 바알벡 총독 (아이유브의 후임자)이 왜 반기를 들었는지는 미상[5] 갈릴리 호 북안에 위치한 Jacob's ford. 다만 훌레 호수에서 싸웠다고도 함. 이때 보두앵 낙마. 87명의 템플러와 3백여명의 기사들이 희생해가며 (죽거나 포로됨) 시간 벌어주는 동안 보두앵은 사페드로 피신. 대주교 아샤르 드 나자렛을 콘스탄티노폴리스로 파견해 마누일에게 황실 신붓감 요청. 마누일, 조카 테오도라 (이사키오스의 딸)와 지참금으로 10만 히피르피론과 결혼식 비용 1만 히피르피론 제안. 그리고 그녀의 지참금으로는 아크레가 주어지는 것으로 합의. (과부될시 소유). 사절단 귀환, 보두앵 역시 동의[6] 이로써 셀주크-장기 왕조의 동맹 결렬됨[7] 정확한 달은 아님. 다만 6월 말엽 가능성.[8] 7월 3일이라는 기록도[9] 하란에선 땅이 갈라져 고대 유적이 솟아오르기도 했다고. 십자군 무슬림 모두 부서진 성벽 복구에 집중해야함. 특히 알레포, 홈스, 하마 등 오론테스 강가 피해 막심[10] 시타델에서 왕자의 할례 축하 잔치 도중 몰살됨. 공주 한명과 외지에 있던 우사마 이븐 문키드만 생존. 하마에서도 선생이 화장실 갔다가 교실 와보니 학생들 다 죽어있어 부모들에게 어떻게 말할까 고민하며 마을 향했는데 그 부모들 역시 대부분 사망한 상태였다는 이야기도 있음[11] 본래 보두앵은 샤이자르를 티에리에게 주려함. 근데 포위 도중에 도착한 안티오크의 르노가 샤이자르의 문키드 왕조가 안티오크 공국에 조공했으므로 티에리 역시 자신의 봉신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 (아니면 도시를 넘기거나) 이에 티에리는 비천한 태생의 모험가에 대한 조공 거부.[12] 동시에 부관 시르쿠를 다마스쿠스에 봉하였음. 나스르 앗 딘이 알레포를 넘겨받기 위해 도착하자 시타델 지휘관 이븐 앗 다야가 인계 거부. 시민들이 폭동, 누르 앗 딘이 시내 유력자들을 불러 자신의 건재함을 보이고 진정할 것을 요구. 이후 서서히 회복[13] 교황 아드리아노 4세의 중재, 시칠리아 측이 요안니스 두카스와 알렉시오스 브리엔니오스 등의 포로 석방. 한편 마누일 1세는 1156년 르노의 키프로스 점령에 대한 응징으로 원정 준비. 늦여름 무렵 출정, 빠른 속도로 남진. 우선 제국으로부터 자립하고 르노의 키프로스 정복을 도왔던 킬리키아의 토로스 2세가 목표[14] 요단강 동안은 길르아드 지역이라 불림. 하비스 얄두크의 라틴 명칭은 cave de sueth. 말그대로 동굴 성채임. 한편 보두앵의 양동작전에 누르 앗 딘은 포위 풀고 다마스쿠스로 향함[15] 십자군은 적군이 더 적다고 판단해 진격했는데 한 십자군 귀족이 보두앵이 누르 앗 딘에게 선물해준 노새를 알아보고 누르 앗 딘의 본군이었음을 알아차림. 그럼에도 전투 나섰고 아픈 누르 앗 딘이 먼저 철수하자 사기가 저하된 무슬림 군대 무너짐[16] 처음엔 다른 십자군 국가들과 연대해 맞서려 했으나 동로마와 인척 맺은 보두앵이 반대하자 황제는 정복이 아닌 복속으로 만족할 것이라는 라타키야 주교 제라르의 조언대로 싸움 포기하고 안티오크 열쇠 보내고 동로마 주둔 허용. 그리고 항복 요구하자 르노는 마미스트라 (모프수에스티아) 밖의 동로마 군영으로 찾아가 무릎 꿇음. 키프로스 주교 아모리, 복수로 그의 폐위 주장하나 마누일은 (요안니스와 달리) 복속과 안티오크의 정교회 대주교 선임으로 만족[17] 알레포에는 가톨릭 사제가 없어 야곱파 사제에게 고해성사 / 플랑드르 백 티에리, 재차 본국 귀환. 아내 시빌라는 멜리장드의 베타니 수도원 들어감[18] 정확한 달은 아님. 토로스, 맨발과 맨머리로 찾아와 먼지 속에서 제국 문장이 휘날리는 연단 앞에 엎드려 사과. 마누일, 그를 사면하고 킬리키아 일부 통치 허락. 그밖에 보두앵은 키프로스의 아모리를 안티오크 대주교로 선임 제안, 수용됨[19] 보두앵, 안티오크 귀족들의 마누일 암살 계획 거부, 마누일과 함께 성당에서 미사 드리고 궁전으로 향해 연회와 마상시합 (토너먼트) 즐김[20] 안티오크의 르노, 아르메니아의 토로스 2세도 파병[21] 이후 혼란 이어져 알렉산데르 3세는 9월 18일에야 자주색 도포를 받을 수 있었고 9월 20일에야 즉위. 9월 27일 빅토르 파문. 이후 콘스탄티노폴리스로 추기경들 파견해 마누일 1세에게 도움 청함[22] 이해 템플 기사단은 포르투갈의 본부로서 토마르 성채 건설. 우쥐 드 발벵이 구호기사단장 취임[23] 총회는 2월 11일 종결. 파비아 성당 주변 행진하고 프리드리히가 교황의 대한 예를 갖춤. 한편 마누일 1세의 사절이 파비아에 당도하여 프리드리히와 이탈리아 분할 논함. 안코나-아풀리아 일대 동로마 영토로 요구. 이후 프리드리히도 대시칠리아 동맹 논하기 위해 콘스탄티노폴리스로 사절 파견[24] 이후 모술의 쿠트브 앗 딘에게 사로잡혀 있다가 1161년 4월 살해되어 하마단에 매장됨, 10월이라는 기록도[25] 1161년 11월이라는 기록도. 양치기들은 마라쉬 인근의 아마누스 산지에서 겨울을 나기 위해 유프라테스 유역으로 이동 중이었다. 마즈드 앗 딘은 누르 앗 딘과 같은 유모를 둔 '젖형제'. 르노의 몸값 협상은 거부되고 (보두앵도 급한 사안으로 여기지 않음) 15세의 보에몽 3세 대신 모후 콩스탕스가 공국 이끔[26] 정확한 달은 아님. 한편 비슷한 시기 마누일은 안티오크 공가와의 결혼을 통해 영향력 확대 꾀함. 콘토스테파노스와 테오필라크트를 안티오크로 파견해 콩스탕스의 딸 마리아와 자신의 결혼 주선하게함. 보두앵, 동로마의 지나침 영향력을 우려해 트리폴리 백작 레몽 3세의 누이이자 자신의 외사촌인 멜리장드를 대신 추천. 사절단, 트리폴리에서 그녀를 만나지만 출신의 비밀? (친부가 누구인가) 대한 소문 들음. 이에 실망한 마누일은 결혼 취소. 레몽 3세는 이를 알지 못한채 결혼 준비 이어나감[27] 이때 쓰인 함대 중 하나는 멜리장드와 함께 콘스탄티노폴리스를 향할 20여척의 선단 중 하나였다고 한다. 한편 동로마의 보복이 두려워진 보두앵은 트리폴리로 향하여 레몽 진정시키고 안티오크로 향하여 마리아와 마누일의 결혼 주선. 이해 마누일은 프리드리히가 십자군에 종군, 그 도중에 동로마 공격할 것이라는 소문 들음. 룸 술탄 클르츠 아르슬란 2세 등의 무슬림 지도자들에게 편지 보내 경고[28] 다만 죽기 직전 시트 알 쿠수르와 그녀가 파견한 세명의 흑인 암살자들을 붙잡아 처형시키고 아들들을 불러 샤와르를 상이집트 총독에 봉한 것, 빌바이스에 엄청난 자금을 투자하고도 십자군 대한 원정에 쓰지 않은 것, 카이로 성밖에 후세인 모스크를 세워 도시 공격 시에 기지로 쓰일 수 있게 된 것 등을 털어놓고 후회함. 그 예언들은 모두 적중..[29] 1157년 남편 티에리를 따라왔다가 베타니 수도원에 들어가서 멜리장드의 수양딸이됨. 그녀는 1165년 사망[30] 정확한 달은 아님. 황제의 최종 결정을 알린 것. 보두앵, 제국과의 관계 악화를 우려해 결국 그녀를 콘스탄티노폴리스로 보냄[31] 그외에 알렉산드리아 대주교 소프로니오스, 안티오크의 명목상 대주교 아타나시오스가 소집되어 동방에 대한 마누일 1세의 의지를 상징[32] 기욤 드 티레에 의하면 레몽 3세가 파견한 시리아 정교도인 의사 바라크가 준 약을 먹고 악화되었다고 한다[33] 감옥에서 석방된 안드로니코스가 킬리키아로 향하여 토로스의 동생 스테파노스를 연회장으로 불렀는데 도중에 살해되자 안드로니코스의 사주라 여긴 토로스가 반란. 마미스트라 장악하고 아나자르부스 점령, 동로마 수비대 학살. 이에 마누일이 안드로니코스 대신 콘스탄티노스 칼라마노스 파견. 토로스와 평화조약[34] 섭정권 주장하기 위해서였으나 이미 장성한 보에몽 3세를 지지하는 귀족들에 의해 라타키야로 추방되어 이듬해 사망[35] 누르 앗 딘, 정권 교체기에 공격하자는 가신들의 요구에 향후 관계를 고려하여 거부[36] 친족혼이라는 이유. 당시 아모리는 26세. 이미 아그네스와의 사이에서 태어난 장녀 시빌라와 2살 아들 보두앵의 후계자 지위 인정하고 아그네스는 백작 부인으로써 자파와 아슈켈론의 세금 일부를 받는다는 조건[37] 그외에 캔터베리 대주교 안셀무스는 토마스 베켓의 시성 요청. 성직자들의 법학 및 자연 물리 탐구 금지됨[38] 파티마 왕조가 조공 16만 디나르의 납부하지 않은 것이 빌미. 디르감, 빌비아스에 당도. 관개 시설의 둑 하나 파괴해 홍수 내자 십자군 철수[39] 아모리가 이집트 원정에 나선 틈을 타 트리폴리 백국 침공, 크락 데 슈발리에 포위. 이에 트리폴리 백작 레몽 3세가 안티오크 공 보에몽 3세에 도움 청함. 킬리키아 총독 칼라마노스와 순례 후 돌아가던 위그 드 뤼지냥, 지오프리 드 앙굴렘이 이끈느 무장 순례단도 동참. 포위 중이던 누르 앗 딘의 진영 습격. 알레포 군대의 공격 격파하고 일단의 십자군은 누르 앗 딘의 막사를 향함. 누르 앗 딘, 뒷문으로 나와 말을 타고 도주하려 했는데 급하게 나온 틈에 아직 말이 매여 있는 것을 못봄. 옆에 있던 쿠르드 병사가 그 줄을 잘라 탈출 성공. 그 병사는 살해됨. 홈스로 피신한 누르 앗 딘은 후에 그 쿠르드 인의 가족들을 찾아내어 후하게 보상. 한편 홈스에서 한 아미르가 십자군이 공격해올 수 있으니 이동을 제안하자 누르 앗 딘은 병사 숫자는 중요하지 않다며 복수하기 전까지는 그늘에 앉지 않겠다고 신에게 맹세. 이후 다마스쿠스와 알레포로 수하들을 보내 보급과 물자를 공수해와 생존자들에게 나눠줌. 죽은 병사들의 몫은 유가족들에게 분배. (직계 없다면 친척에게라도) 이후 십자군 측이 누르 앗 딘에게 휴전 제안했으나 거부. 이후 십자군은 크락 데 슈발리에의 수비대 보충하고 퇴각[40] 그외에 기사단까지 참전하면 추가로 선물 주겠다고함[41] 8월 12일이라는 기록도. 누르 앗 딘, 연합군 다가오자 포위 풀고 철수. 이후 하림 성주 르노 드 생 발레리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십자군은 보에몽 3세의 주도로 추격. 토로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돌격했다가 튀르크 군의 거짓 후퇴에 당해 포위되고 대패. 누르 앗 딘, 완벽한 기회임에도 동로마의 속령인 안티오크 공격안하고 오히려 칼라마노스 풀어줌. 누르 앗 딘에겐 보에몽 3세가 더 쉬운 적수.[42] 특히 이집트 대한 협공 제안. 한편 그에 앞서 동로마 사절이 안티오크 당도해 아모리에게 황제의 허락도 없이 제국령 도시에서 뭐하는 거냐고 추궁. 이에 아모리가 해명하는 겸 사절 보내 결혼 동맹 물색. 한편 마누일의 몸값 지불로 풀려난 보에몽 3세는 황제에게 감사와 돈을 되갚기 위해 콘스탄티노폴리스 향함. 마누일 명대로 아타나시오스 2세를 안티오크의 대주교로 봉하고 대성당의 라틴 사제들을 정교회 사제들로 교체 / 한편 교황 알렉산데르 3세가 새로운 십자군 제창했으나 호응 저조함[43] 이해 '포르투갈의 엘 시드' 기랄두가 이보라 점령. 이후 아비즈 기사단의 본부됨. / 마누일 1세가 킬리키아 총독 요안니스 악수흐 해임. 사촌 안드로니코스 봉함 / 플랑드르 백 티에리, 본국 귀환[44] 마누일, 교황에게 사절 보내 시칠리아 대한 동맹 확인하고 굴리에모 1세의 동생 옹립할까 고민[45] 십자군측 기록엔 1166년이라함. 무이에트라는 바알벡과 비블로스의 교통로 상에 위치한 요새. 시르쿠는 그 외에도 동굴 성채인 샤키프 티툰과 시돈 인근의 칼라트 알 닌하 점령. / 아모리가 콘스탄티노폴리스에 보낸 사절단이 2년만에 동로마 황실의 마리아 (마누일의 형 이사키오스의 손녀)와 귀환 / 보두앵 3세, 마누일에게 키프로스 총독 안드로니코스가 임지 버리고 안티오크에서 아내 필리파와 꾸물거린다고 불평. 마누일, 안드로니코스 해임하고 칼라마노스 재선임. 안드로니코스, 귀환 명령 어기고 예루살렘으로 망명. 아모리, 그에게 베이루트 영지 하사 / 한편 프랑스의 생 펠릭스 드 카라망에선 카타리파 공의회 열림. 알비, 카르카손, 툴루즈, 롬바르디아 등지의 주교들이 불가리아인 주교 니케타스의 주재 하에 모여 조직과 교리 등 논의. 비슷한 시기 베즐레에선 7명의 카타리파 화형됨[46] 샤와르가 아모리 진영 찾아와 시르쿠 떠날 때까지 머물러 달라며 40만 베잔트 바침. 카이사레아 영주 위그와 템플러 지오프리가 카이로 궁정 방문, 칼리파 알 아디드에게서 동맹 확인받음. '불신자'들과의 맨손 악수 일화[47] 한편 위그 드 이벨린이 샤와르의 아들 카밀을 돕기 위해 카이로에 있게 되었는데 시민들 공포에 질림[48] 이후 '살라흐 앗 딘' 유수프는 1천의 병력과 함께 투석기 폭격이 이어지고 식량난과 질병에 시달리는 도시를 몇달간 떠맡게됨. 그에게도 트라우마가 된 듯[49] 시르쿠가 조카에게 포위 풀만한 병력 데려가기 힘들 것 같다고 한 편지 당도하자 협상에 나선 것. 카이사레아의 위그는 협조 거부, 투르베셀의 아르눌프가 협상 맡음[50] 파티마 조가 예루살렘 왕국 속국 되는 것 승인[51] 이후 동로마 사절인 기오르크 팔라이올로고스와 마누일 콤니노스와 함께 예루살렘으로 향하여 긴밀한 동맹 논의[52] 토마스는 토로스의 누이가 프랑크인과 결혼해 낳은 아들. 한편 토로스의 동생 믈레는 누르 앗 딘에게 망명. 한편 아모리가 이집트 협공 제안 위해 콘스탄티노폴리스로 파견했던 콘베르사노 백작 알렉산데르, 미카일 디 오트란토, 그라비나 백작 등이 예루살렘 귀환. 해군 파견 대가로 안티오크 대한 제국의 직접 지배 승인 조건. 아모리, 사제 기욤 드 티레를 재차 파견. 펠라고니아에서 세르비아 원정 중인 마누일 알현. 한편 베이루트의 안드로니코스는 아내 필리파 버리고 친척인 아모리의 과부 테오도라와 바람나서 그녀를 아크레에서 불러들임. 분노한 마누일이 즉시 귀환 명령. 안드로니코스, 아모리 역시 그 명에 따를 것으로 보이자 순응하는척 하며 혼자 아크레로 옴. 테오도라가 갑자기 당도, 둘은 다마스쿠스의 누르 앗 딘에게 망명. 제국의 망신[53] 샤와르의 아들 카밀이 시르쿠와 접촉하고 유수프의 여동생과의 결혼까지 제안하는 등 반십자군 노선 견지하고 카이로 주민들이 주둔군 대한 폭동 일으킬 것 같자 개입 결정. 다만 이어진 전략회의에서 구호 기사단장 길베르는 속전속결 주장, 템플러는 펠루시움을 구호 기사단에게 준다는 것에 불만 품어 종군 거부. 아모리는 동로마 지원군 당도 후 원정할 것을 주장하나 투표 패배. 한편 느베르 백작 사망, 그 기사들의 사기 저하[54] 십자군에게 철수 요구하기 위해 사절을 두번 보냄. 첫 사절인 베드란은 십자군측 뇌물 받고 돌아감. 두번째 사절인 샴스 앗 딘 칼리파가 아모리의 배신을 거론하자 아모리는 카밀이 시르쿠와 연락한게 먼저 배신이고 2백만 디나르 배상금 요구 (사실상 싸우자는 것..)[55] 아모리는 포로로 잡힌 주민들의 몸값 대주며 민심 진정시키려 했으나 이미 늦음. 이후 곧바로 풀이 죽은 카이로 공격하는 대신 빌바이스에서 함대 기다림. 시기 놓침[56] 한편 십자군 함대는 파티마 측이 나일 강 하구에 설치한 방해물 제거하며 나아가느라 지연됨. 샤와르는 누르 앗 딘에게 편지보내 십자군에게 항복하느니 카이로마저 태워버리겠다고 장담 자랑이다[57] 아모리, 함대 없이 카이로 포위할 수 없자 집사 밀레 드 플랑시의 조언대로 비공식 사절을 샤와르에게 보내 '막대한 뇌물'에 철수할 것을 시사. 샤와르, 아들 타이의 석방까지 포함하여 10만 디나르 제안함. 다만 더 큰 금액 줄 수 있음을 시사하며 협상 지연시키고 누르 앗 딘의 군대 기다림. 이젠 확실히 십자군 보단 누르 앗 딘의 지배를 택한듯, 그러면서도 시르쿠 군대가 다가오자 아모리에게 그 사실 알림. 이에 아모리가 시나이 반도의 이스트무스에서 공격하려 했으나 시르쿠는 그보다 남쪽으로 우회하여 나일 강 유역 당도. 한편 협상 중 아모리는 성모 마리아와 요셉이 어린 예수와 헤롯 왕의 위협을 피해 이집트로 피신했을 때에 묵었다고 전해지는 마타라의 시카모어 숲에 주둔[58] 기사단 내부에서 제기됨. 한편 협상 제안한 밀레 역시 비난받음[59] 본래 총대주교 애므리, 카이사레아 대주교가 잉글랜드의 헨리 2세, 프랑스의 루이 7세, 시칠리아의 마가렛, 그리고 플랑드르, 블루아, 트루아 백작등에게의 사절단과 함께 출항했으나 풍랑으로 회항. 사기 저하되자 티레 대주교 프리드리히가 바니아스 주교 장, 구호 기사단의 기베르를 대동하고 대신 나선 것. 등에게 사절단 파견됨. 하지만 호응 저조 / 아그네스의 남편 위그 드 이벨린,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 순례 중 사망[60] 이렇듯 시르쿠는 음모에 종교를 이용할만큼 현실적이었다. 영묘의 순례객으로 오려면 군대 대동하지 못하는 것 노림. 칼리파만 믿고 소수의 호위대와 향하던 샤와르를 유수프가 무장 해제시킴. 이후 칼리파 앞에 데려감. 시르쿠의 뜻대로 사형 판결. 이후 시르쿠는 군중들에게 샤와르의 관저 습격하게 하고 그 틈에 궁전을 장악양동작전 기록에 따라 유수프가 샤와르 처형 주도했다고도 함[61] 당시 31세. 유수프의 경험 미숙과 튀르크-쿠르드의 분열 조장 가능성 등을 주목한 파티마 대신들의 지지로 선임됨. 다만 대부분의 시리아 아미르들도 그의 공로를 인정, 자신들의 대표로 승인. 살라흐 앗 딘, 포도주 마신거 등 회개하고 종교적인 모습 보이겠다고 선언[62] 이후 교황의 지지 편지와 프랑스 향함. 루이 7세, 빠른 답변 회피. 한편 파티마 칼리파 알 아디드의 대내관 알 무타민이 예루살렘에 편지 보내 아모리에게 도움 청함. 그리고 누르 앗 딘은 동생 쿠트브 앗 딘이 죽어가는 모술의 상황 주시하느라 살라딘 돕지 못함[63] 동로마 제독 콘토스테파노스, 킬리키아에 정박. 아모리에게 사절 보내 그의 군대가 아직 준비되지 않았음을 밝힘[64] 누비아 군대가 봉기하여 알 아딜 (사이프 앗 딘)을 묶어둠. 이에 살라흐 앗 딘이 푸스타트의 누비아 병영에 방화. 이에 누비아 인들이 불길로부터 가족과 재산 구하기 위해 돌아가자 알 아딜이 추격하여 학살함. 칼리파는 살라흐 앗 딘 지지. 한편 누비아 측과 공모했던 아르메니아 용병들은 그들을 돕지 못함. 살라흐 앗 딘, 어쨋거나 그들 병영 역시 방화하여 숙청.[65] 한편 다미에타 수비대의 방해물로 동로마 함대는 나일 강 진입 못함. 이에 아모리는 팔레스타인에서의 지연 이후로 자신의 식량이 부족해지고 있다는 콘토스테파노스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다미에타 공격 연기함. 한편 십자군은 공성탑을 만들어 다미에타 성벽의 강력한 부분..에 배치. 몰랐겠지 근데 그방면이 성모 마리아에게 봉헌된 성당 (헤롯의 위협 피해 요셉, 예수와 이집트로 피신하던 중 휴식 취했다고 전해지는 장소)이 위치한 곳이라 현지 콥트교도들과 동로마 군대의 정교도들이 분노함. 흥미로운 일화[66] 함대 일부가 침몰하거나 해안가로 쓸려가버림[67] 이후 마누일에게 십자군의 행실 보고[68] 누르 앗 딘에게 망명했던 아르메니아 왕공 루펜 2세의 숙부 믈레가 시리아 군대를 이끌고 복귀하여 '프랑크' 혈통의 섭정인 사촌 토마스를 축출하고 조카 루펜마저 살해한 후 자신이 즉위. 이후 동로마령 킬리키아 침공하여 아다나, 마미스트라, 타르수스 점령. 동시에 템플러 성채인 바그라스 성채 포위. 이에 안티오크 공 보에몽 3세가 아모리의 도움으로 개입. 아모리, 킬리키아 영토를 수복하고 동로마 총독 칼라마노스에게 돌려줌. 동로마와의 신의 강화. / 아모리의 아들이자 후계자인 보두앵의 개인교사 기욤 드 티레가 그의 나병 기질 발견 (보두앵이 친구들과 피부에 못 넣는 게임?! 하는데 고통 무감각한 것 보고 판단) 이후 그렇게 진단됨. 요절하거나 통치에 적합하지 않을 가능성. 이에 아모리가 교회법 어기고 친족 결혼 강행한 것에 대한 신의 징벌이라는 소문 퍼짐. 한편 아모리는 서유럽에 도움 청하러 간 티레 대주교 프리드리히에게 상세르 (루아르 지방) 백작 에티엔을 초대할 것을 부탁. 딸 시빌라의 남편과 자신의 사위이며 동시에 아픈 보두앵의 후계자 될 인물에 대한 물색에 나선 것. / 마누일 1세의 조카 에우도키아가 로마의 귀족 오도 프랑기파니와 결혼. 교황 알렉산데르, 베롤리에서 열린 결혼식 참석. 이후 프랑스 국왕 루이 7세에게 편지 보내 그의 딸 아그네스를 프리드리히 1세 대신 '더 나은' 동맹인 마누일 1세의 아들과 혼인시킬 것을 권고 / 카스트 드 뮈롤이 쥘베르 다쌀리에 이어 구호기사단장 취임 / 아모리와 위그 드 이벨린의 과부 아그네스, 시돈 영주 르노와 재혼[69] 살라흐 앗 딘과 칼리파의 요청. (살라흐 앗 딘으로 하여금 파티마 칼리파 폐위하도록 압박하기 위해) 누르 앗 딘의 대리자로 파견됨. 군대와 함꼐 카라반 무역상들까지 대동. 도중에 요르단의 카라크 성채 잠시 공격. 이후 카라반은 다마스쿠스로 돌아감[70] 콘스탄티노폴리스 시장 바실리오스 카마테로스가 제노바 구역 설정하자 베네치아 인들이 반발. 그러자 마누일이 도시 내의 베네치아 재산 압류. 그러자 베네치아가 동로마 제품 불매운동. 결국 도제가 마누일의 사절단의 설득으로 세바스티아노 지아니와 오노 마스트로피에트로를 파견해 협상하게 함[71] 대지진으로 알레포, 하마, 홈스, 그리고 트리폴리, 비블로스, 크락 데 슈발리에 등지의 성벽 붕괴됨. 복구 공사위해 세력권 막론하고 휴전. 이때 안티오크 성당에서 미사 드리던 정교회 신도들도 사망. 안티오크 공 보에몽 3세, 코사르에서 대주교위 주장하던 애므리를 대주교로 임명. 라틴 교회 복원됨[72] 정확한 달은 아님. 늦가을. 모술은 두고 자지라 원정하여 신자르를 마우두드에게 떼어주고 나머지 자신의 영토에 편입시킨 것[73] 다론 성채는 예루살렘 왕국 남쪽 국경을 방위하는 중요한 요새임. 따라서 아모리는 콘스탄티노폴리스 방문하려던 계획 연기하고 급히 구원에 나선 것[74] 당시 가자는 템플 기사단이 수비. 아모리가 그들 대부분 데리고 남하하여 다론 구원. 한편 살라흐 앗 딘이 다론 포기하고 수비대 거의 없는 가자 공격하자 간단히 함락됨. 시타델 버팀. 살라흐 앗 딘, 아모리가 다가오자 동쪽으로 철수. 이후 네게브 사막 건너 시나이 반도 종단[75] 교황 특사 자킨토 (미래의 첼레스티노 2세)의 주재 하에. 초대 단장은 페드로 페르난데즈. (1184년 사망) 4대조까지 귀족이어야 입단 가능. 단일 기사단장 휘하에 카스티야, 아라곤, 포르투갈 각지에 군사 지휘관 둠[76] 바알벡의 시타델 (옛 유피테르 신전)은 누르 앗 딘의 십자군 포로 수용소. 포로들이 봉기, 간수들 제압하고 성채 장악함. 하지만 주변 무슬림들이 포위, 현지인이 알려준 비밀 통로로 들어와 진압함 / 마누일, 프리드리히 1세에게 자신의 딸 마리아와 그의 아들 하인리히의 결혼 제안. 한편 오도 드 생타망이 필리프 드 밀리의 뒤를 이어 템플 기사단장 취임 / 폰투스 지방 기근. 마누일, 룸 술탄 클르츠 아르슬란 2세와 다니슈멘드 대한 동맹 체결 / 마누일, 루이 7세에게 사절 보내 자신의 아들 알렉시오스와 그의 딸 아그네스 결혼 제안. 한편 상세르 백작 에티엔이 루이 7세의 대표자인 부르고뉴 공 위그 3세와 우투르메르 당도했으나 시빌라와 결혼하지 않고 돌아감[77] 한편 살라딘은 쿠르드인 알 파질을 이집트의 카디로 임명[78] 아모리, 아크레 주교, '궁정 원수' 제라르 드 퐁기, 그리고 근래 은퇴한 템플기사단장 필리프 드 밀리 등의 사절단이 갈리폴리 당도. 아모리의 장인이자 마누일의 사촌 요안니스 콤니노스의 환대. 헤라클레아 거쳐 콘스탄티노폴리스의 보우콜레온 항구 입항. 환영식, 연회, 경기, 무용 공연 등을 즐기고 보스포루스를 따라 마누일에 의해 더 큰규모로 증축된, 황제가 가장 좋아하는 블라케르나이 황궁에서 환대 받음. 여기서 아모리가 봉신 서약하자 형식상으로나마 시리아 해안이 동로마 제국에 수복됨[79] 파티마 칼리파 알 아디드의 이름 대신 압바스 칼리파 알 무스타디의 이름을 예배에 넣으라는 것[80] 동시에 이집트의 아미르들 중 그에 반발하는 이들 숙청. 칼리파 알 아디드에게는 그들이 그에 대한 반란 꾀했다고 고함[81] 몽레알은 시리아와 이집트 교통로 상에 위치. 누르 앗 딘은 카라크 공격하려 남하하던 것; 살라흐 앗 딘, 동생들의 누비아 기독교 왕국 대한 공격 도와야 한다며 합류 못하고 후퇴한다고 전함. 누르 앗 딘의 의심 증폭됨. 이에 아이유브의 조언대로 간곡한 편지 보냈더니 누르 앗 딘이 용서. 아마 압바스 칼리파로 예배 드리겠다고 약속한 듯[82] 그랬는데도 아무런 제지 안받음. 살라딘은 죽어가는 칼리파에게 이를 알리지 말라고 함[83] 향년 21세. 임종 전 어린 자녀들 부탁하기 위해 살라흐 앗 딘 불렀으나 그는 왕당파의 음모가 있을까 두려워 응하지 않음. 살라흐 앗 딘의 무리가 칼리파 독살했다는 소문. 아사신 분노[84] 9월이긴 한데 파티마 칼리파의 사망으로 살라흐 앗 딘과 누르 앗 딘의 오해가 어느정도 풀린 이후로 추정해 '말'로 추정.[85] 누르 앗 딘은 레몽의 몸값 중 5만 디나르 납부되자 풀어줌. 하지만 복귀한 레몽은 나머지 3만 디나르 모으는데 실패. 한편 마누일 1세은 자신의 딸 마리아와 시칠리아 국왕 굴리에모 2세와의 결혼을 직전에 파토냄. 타란토에서 신부 기다리던 굴리에모 2세는 복수 다짐 / 이해 잉글랜드의 왕자 리처드 (리샤르)가 아키텐 공에 봉해짐 / 베네치아의 폭동. 도제 미카일이 군중에게 살해됨. 세바스티아노 지아니 계승 / 시리아의 조베르가 카스트 드 뮈롤의 뒤를 이어 구호기사단장 취임 / 카타리파 의혹의 사제가 아라스에서 화형됨[86] 1171년이라는 기록도. 다뉴브 강의 선박 난파와 동로마 영토에서의 비적떼 습격 견딤[87] 한편 프리드리히 1세의 사절인 보름스 주교 콘라트도 합류해 삼자회담.[88] 아모리가 자신의 딸 시빌라와의 결혼 제안했으나 거절하고 귀로에 오름. 이후 아르메니아 측의 안전 보장에도 안티오크에서 보에몽 3세의 선박 제공받아 타르수스 상륙. 이후 룸 술탄 클르츠 아르슬란 2세의 초대를 받아 튀르크 군의 호위로 콘야 향함. 극진한 대접과 선물. 3차 십자군 당시 프리드리히 1세의 협상에 선례로써 도움됨[89] 누르 앗 딘이 침공에 대비한 피난처 찾기 위함. 여름. 누비아 군대가 카이로에서 피신해온 아르메니아 용병들과 함께 아스완 공격. 그 아미르는 살라흐 앗 딘에게 도움 청함 이에 살라딘 동생 동생 투란 샤가 파견됨. 누비아인 철수, 이후 재차 공격해왔으나 격퇴됨. 이후 투란 샤는 누비아 마을 이브림 점령. 콥트교도 학살. 한편 살라딘의 조카 타키 앗 딘이 트리폴리 정복. 무와히드 조와 국경 맞댐 / 1169년 시리아 아사신들의 새 지도자 된 라시드 앗 딘이 파티마 조의 멸망에 의지를 잃고 (혹은 복수를 위해) 아모리와의 동맹 제안한 것. 아모리, 이에 동의하고 타르투스의 템플러들에게 현지의 친아사신 (누사이리파) 마을의 조공 면제해 줄 것을 요청. 하지만 수입 감소에 불만 품은 템플러들이 동맹 결렬시키기 위해 왈터 드 메스니의 주도로 돌아가던 아사신 사절단을 시리아 산지에서 매복하여 학살. (기사단장 지시였을 수도) 아모리, 재판 위해 템플기사단장 오도에게 왈터 넘길 것을 요구하나 오도는 기사단 규율에 따르면 교황만이 심판할 수 있다며 거절. 아모리, 시돈에서 열린 템플러 모임에 군대 이끌고 나타나 오도가 머무는 건물 진입. 왈터에게 칼 겨눈채로 납치해 데려옴. 이후 아사신은 아모리의 사과 수용 (개종은 무산). 아모리, 교황 알렉산데르에게 오만하고 독립적인 템플러 대한 해체 요구하기로. / 룸 술탄 클르츠 아르슬란 2세가 누르 앗 딘에게 사절 파견해 동로마 대한 동맹 제의. 다니슈멘드에게 세바스테아 (시바스) 반환 약속[90] 동로마-독일 협상 결렬된 후에 벌어진 일. 이탈리아 주둔 동로마 군은 로마의 프랑기파니 가문과 함께 구원 나섬[91] 아모리가 동로마 대신하여 킬리키아 침공. 아르메니아의 믈레와 맞섰으나 별 성과 못거둠. 한편 아모리의 부재에 누르 앗 딘이 요르단 침공, 살라흐 앗 딘 소환. 카라크의 영주인 에티에네트의 둘째 남편 밀레 드 플랑시가 부재한 틈에 성채 포위. 이후 갈릴리의 음프헤 2세가 구원 나서자 병을 핑계로 (누르 앗 딘 오기 전에) 철수. 이후 누르 앗 딘이 당도하여 포위 이어나갔으나 역시 철수, 원정 실패의 이유로 합류하지 않고 가버린 살라흐 앗 딘 비난하며 이집트 침공 계획. 이에 살라흐 앗 딘, 주군에게 6만 디나르와 직물, 코키리 한마리 바침. 그 사이에 예루살렘 왕국 변경 습격해 십자군의 길잡이 노릇을 할 수 있는 베두인들 축출함. 한편 조공에도 누르 앗 딘이 양이 적다며 전쟁 준비에 박차를 가하자 새로운 도피처 물색[92] 토로스 2세의 동생 스테파노스의 아들이자 믈레의 조카인 루펜 3세가 그를 폐위시키고 아르메니아 왕공으로 등극 (누르 앗 딘이 사망하자 믈레의 입지 축소. 이후 수도 시스에서 수하에게 살해됨) / 마누일의 조카 에우도키아 (이사키오스의 딸), 아라곤 왕실과의 결혼 위해 티레니아해로 향해. 그녀는 알폰소 2세 대신 그의 동생인 프로방스 백작 라몬 베렝게르 3세 선택해 약혼. 하지만 그의 명목상 주군인 신성로마제국의 프리드리히 1세에 의해 약혼 파기됨[93] 한편 살라흐 앗 딘은 예멘 망명까지 고려. 이후 다마스쿠스 총독 이븐 알 무카담이 앗 살리흐를 '보호'. 도시에 잡아둠. 한편 누르 앗 딘의 이집트 원정 도울 준비하던 모술의 사이프 앗 딘은 그의 죽음 틈타 니시비스 일대 수복하고 우르파 (에데사) 접수. 그후 누르 앗 딘의 측근이던 이븐 앗 다야의 아들들이 장악한 알레포에 부관 귀무슈테킨을 파견해 장악, 그를 총독으로 봉함. 귀무슈테킨은 다마스쿠스의 이븐 알 무카담과 섭정권 두고 다툼[94] 대략적인 시기. 6월은 확실[95] 이후 밀레의 정적인 원수 음프헤 2세와 시돈의 르노가 그들이 지지하는 트리폴리 백작 레몽 3세를 섭정으로 주장. 레몽은 보두앵의 사촌이고 최근 갈릴리의 에스키바 (음프헤 2세의 친족인 것으로 보임)와 결혼한 상태. 한편 지참 영토인 나블루스로 은퇴한 아모리의 과부 마리아 콤니니는 라믈라의 영주 위그의 동생인 발리앙 드 이벨린과 결혼. 위그와 발리앙은 마리아와 아모리의 4살 딸 이사벨라의 계승권을 주장하며 보두앵의 모후인 아그네스와 장녀 시빌라와 대립. 예루살렘 왕국의 두 파벌 성립[96] 어떤 기록은 가을, 다른 기록은 8월이라 함[97] 이들은 본래 시칠리아 함대와 협공 시도했으나 한발 늦게 봉기함[98] 본래 이븐 알 무카담은 모술의 사이프 앗 딘과 연대하려 했으나 그가 거절하자 살라흐 앗 딘에게 도움 청한것[99] 이후 밀레는 아크레의 좁은 골목길에서 암살됨. 요르단의 에티에네트는 재차 과부됨[100] 11월 26일에 당도, 27일 입성했다는 기록도. 또 10월 28일 당도했다는 기록도 있다[101] 하마의 아미르는 살라흐 앗 딘의 편에 선다는 뜻을 밝혔지만 하마 다다르자 살라흐 앗 딘은 그를 사로잡음. 아미르의 동생이 도시 넘기고 항복[102] 이때 수블라에움 성채 신축되고 도릴라리움 성채 재건됨. 니카사르와 아마시아 대한 공격은 튀르크 인들의 강한 저항으로 실패. 이후 아나톨리아에서 룸 셀주크 축출 위해 교황에게 자신이 지휘하는 새 십자군 관한 편지 보냄 / 한편 안드로니코스와 테오도라는 후원자인 누르 앗 딘이 사망한 후 다마스쿠스를 떠나 폰투스로 향해 현지 튀르크 인들로부터 트라브존 인근 성채 주어짐 / 한편 셀주크 술탄 아르슬란 2세 사망. 아들 토그릴 3세 계승[103] 5월 11일이라고도 함. 아사신은 시아파 칼리파국을 없앤 살라흐 앗 딘에 대한 원한이 깊었음, 알레포 포위 중이던 살라흐 앗 딘 막사에 13명의 아사신 암살자가 침투. 이전에 그들과 대면해봤던 아부 쿠바이스 (이전 아시신 요새) 성주 나시흐 앗 딘 쿠마르테킨이 암살자 발견하고 경보 울림. 다만 나시흐 앗 딘은 그들과 싸우다가 사망. 이후 호위대 모임. 암살자들 중 한명은 호위대에게, 나머지는 도주 중 잡혀 살해됨. 다만 그 과정에서 병사들 역시 꽤 희생됨. 살라흐 앗 딘은 다치지 않음[104] 이후에 살라흐 앗 딘은 이를 '민중의 마음을 여는 승리였다'고 평가[105] 이후 르노는 요르단의 에티에네트와 결혼하고 주전파 제후들 주도. 보두앵의 외숙 조슬랭 3세가 연대하여 발리앙 드 이벨린의 당파와 맞섬[106] 군대 양분, 본인은 살라흐 앗 딘에 동맹한 신자르의 동생 마우두드 공격하러 대군 이끌고 향함[107] 다마스쿠스와 이집트만 지키려 한 것. 하지만 살라딘을 과소평가한 사이프 앗 딘은 이집트로 돌아가라고 답변[108] 살라딘, 병력 열세인 것을 파악하고 영토 할양 협상하며 조카 파루크샤와 타키 앗 딘의 지원군 기다림. 전투 시작되고 언덕 위의 살라딘 진영을 이즈 앗 딘이 공격. 살라딘 측이 열세일 때 조카들의 지원군이 언덕 아래 당도. 연합군 포위, 섬멸됨. 살라딘 : '용감하나 전쟁에 대해 무지한 자' 이후 사촌 무함마드 이븐 시르쿠를 홈스-팔미라-라흐바에, 시하브 앗 딘 알 하리미를 하마에, 그리고 이븐 알 무카담을 바알벡 총독에 봉함[109] 마라트 알 누만 포함. 이후 동전과 쿠트바 앗 살리흐 대신 자신 이름 넣음. 한편 살라흐 앗 딘은 칼리파에게 누르 앗 딘과 같은 책봉 청했으나 현재 지배 영토에 대한 영주 (아미르) 칭호와 예루살렘 공격 열중하라는 답변[110] 시토회 규범 따르는 다른 기사단들과 달리 덜 엄격한 아우구스티노회 규범 따름[111] 봄. 동로마와 혼사 거절당한 굴리에모 1세, 그전에 제안했었던 잉글랜드의 공주 조앤과의 결혼 약속함[112] 그리고 1년 내로 예루살렘 탈환할 것이라는 덕담?도 해줌. 실제로 그렇게 될 뻔[113] 이날은 살라딘에 강력히 반대한 인물이라 함. 만비즈 포위 전에 비자아 점령. 점점 알레포 주변 하나씩 점령[114] 5월 11일이라고도. 첫 암살자가 살라흐 앗 딘의 목을 노렸으나 갑옷에 막힘[115] '산의 장로' 라시드 앗 딘이 직접 살라딘의 막사에 들아와 '너는 우리 수중에 있다'라는 글귀 남기자 기겁하여 철수, 이후로 아사신 영토 건들지 않았다는 일화가 있다[116] 이후 그의 목은 술탄에게 보내짐. 마누일은 복수를 위해 수블라에움에서 콘야 향해 진군. 트지브리체 고개 끝의 미리오케팔론 성채에서 튀르크 군과 대치. / 살라딘, 동생 투란 샤에게 시리아 맡기고 최측근만 대동하고 이집트 향함[117] 이후 마누일은 굴욕적이게도 튀르크 군의 호위 받으며 귀환. 수블라에움은 파괴하나 도릴라리움은 비티니아 방위에 필수적이라 여겨 그대로 둠[118] 루이 7세의 6촌뻘 친척. (루이의 외조모 지젤라가 기욤의 친조모. 루이의 추천으로 결혼 성사되었을 가능성.[119] 이해 교황 알렉산데르가 자신의 주치의 필리프를 필두로 인도 방면에 있을 것으로 추정되는 프레스터 존에게 사절단 파견, 무슬림 대해 십자군 국가 원조 부탁하는 자신의 친서 전달하게함. 사절단, 예루살렘 당도. 프레스터 존이 아시아가 아닌 아프리카에 있다고 판단, 이집트로 향함. (에티오피아 사제와 만나거나 소문 들은 것으로 추정됨) 나일강 거슬러 올라갔다는 것이 마지막 소식 / 연초. 마누일, 메안데르 협곡 따라 반격. 튀르크 군 철수. 마누일의 사촌 안드로니코스 앙겔로스 (마누일의 이모 테오도라의 아들)와 마누일 칸타쿠제노스가 차락스로 파견되어 추격 맡음. 후자는 협곡의 주요 성채인 콜로사이 (차오나이) 점령. 전자는 후자와 떨어지자 당황, 튀르크 분견대를 본대로 착각해 추격. 마누일, 안드로니코스 여장시켜 수도 행진시킨다고 협박 / 마누일, 예루살렘 왕국에게 재차 이집트 원정 함대 지원 약속 / 로제르 드 물렝이 조베르에 이어 구호기사단장 취임[120] 필리프의 외조부가 보두앵의 친조부인 풀크로 같음. 다만 외조모와 친조모는 서로 다름[121] 보두앵, 필리프에게 이집트 원정 이끈다면 섭정 맡기겠다고 제안하나 필리프는 어려운 전쟁 홀로 이끌러 온게 아닌 순례 목적이라며 사양. 보두앵, (혼자 책임지는게 부담이라면) 르노 드 샤티용과 공동 지휘 제안. 하지만 필리프는 (천한 출신의) 르노 불신해 역시 거절. 이에 제후들이 그를 둘러댄다며 고발하고 진의 추궁. 필리프, 참사회에서 로베르 드 베튄의 아들들 (필리프가 그들의 후견인)과 보두앵의 여동생들 (아모리의 딸들) 결혼 제안. 발리앙 드 이벨린의 주도로 부결됨. 한편 당대인들은 레몽과 보에몽이 플랑드르 십자군을 자신들의 영토에서 쓰기 위해 필리프에게 이집트 원정 나서지 말도록 설득했다고 비난[122] 그 전에 프랑스 국왕 루이 7세에게 군사 개입 청함. 군대 대신 피에르 드 생 크리스고노와 부르주, 푸아티에, 나르본, 바스 등의 주교들과 연대기 작가 로제르 등의 선교단 파견됨. 이후 시토회 수도원장 총회에 카타리파 이단의 확산 경고. 시토회의 클레르보 수도원장 앙리 드 마시에게 선교단 동참, 그 공과로 1179년 라테란 공의회에서 추기경 겸 알바노 주교로 서임됨[123] 추정 시기. 9월일 가능성. 동로마 사절들, 십자군의 저조한 의지에 분노. 이후 아모리가 겨우 성사시킨 동로마-십자군 연대 사실상 와해됨[124] 홈스 주변 약탈하였으나 회군 도중 반격을 받아 다 빼앗김[125] 십자군이 홈스, 하림 등 북쪽에 있는 틈에 남부 유대 지방 공격한 것.[126] 이에 살라딘은 안심하고 분견대 파견해 예루살렘 왕국의 각지를 공격하게 함. 그중 일부는 예루살렘 성문 앞까지 당도. 2만의 아이유브 군대에 비해 보두앵은 375명의 기사들과 수천의 보병이 전부. 아이유브 군대가 템플러의 가자를 포위한 덕에 단지 84명의 템플러만 합류.[127] 라말라 부근인 텔 앗 사피 인근의 시내를 건너는데 10일간의 폭우로 불어난 물에 아이유브 군대의 보급이 지체됨. 그리고 보두앵, 르노, 조슬랭 3세의 십자군이 참십자가 내세우고 (보두앵은 아픈 몸에도 부축 받아 말에서 내려 참십자가 앞에서 기도) 기습해오자 그렇지 않아도 분산된 아이유브 군대 혼란. 일부는 보급품의 무기 찾으러 가기도. 말 역시 긴 여정에 지친 상태. 혼전 와중에 타키 앗 딘의 아들 전사. 살라딘, 반격 나섰으나 맘루크 호위대마저 괴멸되자 도주. 보두앵, 해질녘까지 살라딘 추격하다가 아슈켈론 귀환. 아이유브 군대는 텔 앗 사피에서 7km 떨어진 텔 알 헤시에서 재집결, 살라딘과 이집트 귀환. 베두인들의 습격 당하며 행군한 결과 카이로 와보니 오직 1/10만 모임. 그럼에도 12월 초 카이로에는 승전보가 먼저 도착; 한편 보두앵은 전승 기념 위해 전장에 알렉산드리아의 성 카트린느에 봉헌된 베네딕토회 수도원 건립. 축일은 역시 11월 25일. 한편 전투 중 아이유브 군대의 저항으로 십자군 측도 1100명 전사, 850명 부상. 템플기사단장 로제르 드 물랭 역시 전사. 전투 직후 십자군이 하림 포위함, 살라딘은 패전 직후라 구원 못함. 알레포의 앗 살리흐가 나섬[128] 그 수비대는 앗 살리흐가 알레포 총독 귀무슈테킨을 처형했다는 것에 반발. 사기가 떨어짐 혹은 반란 일으켰다고도함[129] 그리고 '그들 공통의 적' 살라흐 앗 딘이 시리아로 진격해온다는 정보가 제공된 것도 한몫 했다. 한편 군대 이끌고 온 앗 나시르가 하림을 확고히 장악하고 돌아간 것인지는 의문. 다른 기록에 의하면 앗 살리흐가 진격해오자 십자군이 포위 풀고 철수했다고도 함[130] 노는거 좋아하고 동시에 관대한 동생 투란 샤가 다마스쿠스 총독으로써 흉작과 채무에 직면하자 살라딘은 그에게 다른 곳으로 전임 요구. 투란 샤, 바알벡 청함. 하지만 현직 총독인 이븐 알 무카담이 자신을 봉한 것은 살라딘이라며 거부. 6개월 넘게 바알벡 성벽 앞에서 살라딘과 대치.[131] 이때 3백여명이 살해되고 많은 수가 포로가 되어 마요르카 (알 마유르카)로 끌려감. 1185년에 석방됨[132] 신자들의 땅을 약탈했다는 이유로. 항상 관대한건 아님.. 지하드 전사 이미지 강조하려는 의도였다고도[133] 1178년 10월과 1179년 4월 사이. 이에 살라흐 앗 딘이 건설 중단 대가로 6만 디나르 제안, 보두앵이 거절하자 10만 디나르로 액수 올렸으나 역시 퇴짜맞음[134] 프리드리히 1세, 프로방스 백작 라몬과 마누일의 조카 에우도키아의 약혼 취소시킨 후 그녀와 몽펠리에 영주 기욤 8세 맺어줌. 라몬은 1181년 4월 5일 몽펠리에 인근 지나다 암살됨. 한편 몽펠리에로 파견된 동로마 사절이 시빌라의 장인인 몽페라토 후작 기욤과 만나 그의 다른 아들 르니에와 마누일의 딸 황녀 마리아와의 약혼 합의. 프랑스와의 결혼 협상 성공. 가을, 몽펠리에의 전함 23척이 루이 7세의 딸 아그네스와 콘스탄티노폴리스 당도. 마누일의 아들 알렉시오스와 약혼, '안나, 개명[135] 보두앵이 모후인 아그네스의 연인이라고 한다. 한편 살라딘의 이집트의 알 아딜에게 기병 1500 파견 요청[136] 십자군이 파루크샤의 습격대를 따라잡아 패배시킴. 이후 레몽과 템플러들이 더 진격하다가 요단강에서 살라딘의 본대와 마주침. 템플러들이 돌격하나 실패 후 퇴각. 남겨진 레몽 군대 붕괴. 십자군은 보포르 성으로 도주. 그 과정에서 템플기사단장, 발리앙의 동생 보두앵, 위그 드 티베리아스 사로잡힘. '바가지 몸값' 책정됨. 패잔병들이 구원 나선 시돈 영주 르노 만류.[137] 보두앵 4세의 여동생 시빌라와 결혼하려 했으나 그녀는 일단 몸값 마련될 때까지 결혼할 수 없다고 통보. 한편 기사단장 오도는 기사단 약화시킬 것 우려해 석방 협상 거부, 다마스쿠스에서 옥사[138] 이후 마누일 도와 셀주크 원정 나섬. 이에 룸 술탄 클르츠 아르슬란 2세는 독일의 프리드리히 1세게에 사절 파견해 자신의 딸과 그의 아들 결혼시키는 대가로 대동로마 동맹 제안[139] 이후 살라딘의 명으로 성벽 허물어짐. 석공들과 노동자들은 포로. 이후 살라딘이 십자군 대한 군사 원정 할때마다 이곳을 통해 아크레와 예루살렘 방향 진출[140] 아놀드 드 토레이라가 템플기사단장으로 취임 / 가을. 안티오크의 보에몽 3세, 마누일 1세 사망하자 그의 조카인 아내 마리아 콤니니 쫓아냄. 이에 파문당함 / 교황 알렉산데르 3세, 추기경이자 알바노 주교인 앙리 드 마씨에게 프랑스 중남부의 이단들에 대한 십자군 설교 지시[141] 한편 비슷한 시기 보두앵 드 발리앙은 시빌라와 결혼하기 위해 마누일에게 몸값 부탁하기 위해 북상[142] 한편 그의 형 몽페라토의 코라도가 동생의 결혼식 참석[143] 한편 아모리는 발리앙의 조카이자 보두앵 드 이벨린의 딸인 에스키바와 결혼한 상태. 그의 연인이었던 태후 아그네스는 기를 자신의 딸 시빌라와 결혼시켜 이벨린 가문과 맞서고자 함. 이에 시빌라 역시 보두앵 돌아오기 전에 기와의 혼인 합의. 르노-뤼지냥-쿠르트네 (조슬랭) 파벌의 레몽-이벨린 파벌에 대한 승리.[144] 이때 군대 데려오자 보두앵은 자신을 폐위하려 한다 여기고 본래 생각하던 부르고뉴 공 위그 3세 (그 역시 쿠르트네 가문의 인척이라 레몽이 반대) 대신 서둘러 기 드 뤼지냥과 시빌라의 결혼 추진함[145] 아이유브 군대의 갈릴리 습격 이후 제안. 살라딘, 겨울의 기근 겪던 터라 합의.[146] 살라딘 본인은 부카이아 고개 넘어 타르투스 공격. 레몽, 허를 찔려 군대 모을 수 없자 아르카 성채로 피신. 이집트 함대는 해상으로 타르투스 앞 루아드 섬 점령. 휴전 성립 후 철수[147] 안드로니코스의 애인 테오도라를 납치하자 그 역시 항복한 것. 미끼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쇠사슬에 묶인 채로 과장된 연기를 보이며 마누일 앞에 엎드려 용서를 구하고 참회. 마누일, 용서하고 폰투스의 오이노이 총독으로 파견[148] 하지만 섭정 알렉시오스가 '프랑크인' 모후 마리아가 친서방인 정책을 펴고 권력을 집중시키자 마누일의 딸인 마리아와 남편 요안니스 (르니에르) 부부가 반발. 마리아와 알렉시오스 간의 염문설까지. 음모자들은 알렉시오스 암살 꾀했으나 일당 중 한명이 불어 무산됨. 이후 그들은 하기아 소피아로 도주해 총대주교의 보호 받고 이탈리아, 조지아 병사들 고용[149] 6월이라고도. 룸 술탄 클르츠 아르슬란 2세와 그의 사위인 마르딘의 아미르 누르 앗 딘간의 분쟁 조정[150] 헤라클리우스가 아그네스의 연인이라는 설. 참사회가 제안한 두 후보 중 나머지는 누구였는지 추가바람[151] 르노, 순례로 상에 위치한 타이마 오아시스까지 약탈. 살라딘, 조카 파루크 샤에게 요르단 약탈하게 하고 보두앵에게 협정 위반 항의했으나 그는 르노에게 약탈물 반납하도록 하지 못함. 이에 살라딘은 풍랑으로 다미에타 부근에 좌초한 1500명의 기독교 순례자들을 체포하여 보상 받을 때까지 인질로 구류. 한편 명령 불복에 분노한 보두앵은 레몽의 영향력 복구시킴. / 봄. 아르메니아 왕공 루펜 3세, 예루살렘 순례. 음프헤 2세와 에티에네트의 딸 이사벨라와 결혼 / 가을. 십자군-아이유브 왕조 휴전[152] 이후 6월, 황녀 마리아는 당숙 안드로니코스에게 개입 청하는 편지 보내어 분란 재개의 불씨를 제공[153] 봄에 교황의 명으로 (Cor Nostrum) 십자군 조직. 알비 자작 로제르 2세의 부인 아들리아데가 수비 맡음[154] 향년 18세. 독살로 추정됨.[155] 다만 하마의 아미르가 제안한 대살라딘 동맹은 거절. 휴전을 먼저 깰만큼 (전쟁의 빌미 제공) 자신은 없었던듯[156] 안드로니코스 앙겔로스와 해군 제독 콘토스테파노스가 반군 가담해 성공. 섭정 알렉시오스 실명되어 수도원행. 여자와 아이들까지 학살당함. 살아남은 라틴인들은 선박으로 도주, 도중에 보복으로 프린스 제도 습격. 이탈리아의 반동로마 정서 강화됨[157] 아그네스와 조슬랭 3세가 거절하도록 보두앵 설득. 이에 레몽은 베이루트에 머뭄. 다만 다른 귀족들의 설득으로 결국 레몽 예루살렘 진입. 이어진 회의에서 르노 드 샤티용이 이집트에서 북상하는 살라딘 습격 주장. 레몽은 왕국 방어병력 부족해진다고 반대했으나 결국 강경파가 득세.[158] 알레포의 사령관 쿠크부리의 압박에 의한 것. 모술로 돌아감. 한편 마우두드가 자신을 경계하자 쿠크부리는 히신 카이파, 비르칙의 아르투크 왕조와 동맹하고 비밀리에 살라딘과 결탁[159] 이후 이집트로 돌아오지 못함.[160] 십자군이 요단강 건너편 (몽레알-카라크)에 묶여 있는 틈에 홈스, 보스라, 바알벡 군대와 함께 공격한 것. 5백여 여인 사로잡힘. 티베리아스 인근의 동굴 성채인 하비스 잘두크의 현지 기독교도들로 구성된 수비대는 별 저항 없이 항복. 한편 티베리아스에 당도한 레몽은 와병[161] 보두앵이 성채 근처이 진영 세우자 다음날 살라딘이 접근해 전투. 십자군이 방어 태세 취하면 튀르크 군대가 뚫을 수 없다는 것을 재차 증명.[162] 이집트의 무슬림들이 성지 순례할 때에 출항하던 항구[163] 다마스쿠스 외곽의 모스크를 파괴하려 했으나 현지 기독교도들이 그런다면 바알벡 총독 이븐 알 무카담이 시내 교회 파괴할 것이라 만류[164] 10월이라는 기록도. 봄 무렵 나사렛에서 크게 아픈 후 겨우 회복했음에도 반신불구 면치 못함. 예루살렘만 직접 지배하고 나머지 기에게 넘김. 제후들 승인. 한편 기욤 드 티레, 교황에게 복권 청하러 로마 향함 / 아르메니아의 루펜 3세, 경쟁자인 램프론의 하이톤 가문의 영토 병합 / 알레포의 마우두드, 십자군과 동맹 / 잉글랜드 국왕 헨리 2세의 아들 헨리, 십자군 종군 서약. 다만 부왕의 불허와 요절로 무산됨 / 자라, 헝가리의 도움으로 베네치아에 반란[165] 알 하우라, 얌바 등 메디나의 항구 도시들 습격당함. 메카의 항구인 아르 라깁 (제다?) 역시. 순례자 대상 행렬 마주치자 학살 자행. / 보두앵, 왕국 제후들에게 2% 세금 거둠[166] 그외에 마르딘 측의 자금 지원, 아르메니아 샤의 지원군까지 합세[167] 이집트 총독 알 아딜이 알렉산드리아와 카이로의 함대를 홍해로 옮겨놓음. 메디나에서 하루 거리인 알 하우라의 산지에서 생포된 두 장교들은 핫지 기간 메카의 희생제 장소 미나에서 공개 처형됨. 살라딘, 나머지도 모두 처형할 것 명령[168] 살라딘의 동생 타즈 알 물크가 포위 중이었으나 살라딘 본인이 오고나서야 항복[169] 이에 요안니스 (르니에르)의 형제들인 몽페라토의 코라도, 보니파시오는 동로마 대한 반감 가짐. 4차 십자군 이후 르니에르에게 주어졌던 테살로니카 주장[170] 9월 29일이라는 기록도[171] 10월 1일이라는 기록도. 당시 고드프루아 드 브라반트, 라울 드 물랭 등의 귀족들이 예루살렘 방문 중이었음. 그외에 르노 드 시돈 등도 참전.[172] 그리고 보두앵이 티레와 예루살렘 바꾸자는 제안 해오자 거절[173] 르노의 부인 에티에네트가 음프헤 3세와의 사이에서 낳은 아들.[174] 1184년이라는 설도. (결혼, 포위 모두). 결혼을 주관하는 에티에네트가 살라딘에게도 음식 보내자 살라딘이 위치 알아내고는 그 방면은 공격 중단시킴. 한편 르노는 기사 한명이 해자 위의 다리 막는 동안 입성[175] 발리앙 드 이벨린이 보두앵 5세와 성묘교회로 동행, 총대주교 헤라클리우스가 대관식 주관[176] 보두앵은 가마를 타고서라도 출정. 귀족 회의에서 섭정직 박탈 의결됨. 이후 기는 아내 시빌라와 다툰 후 아슈켈론의 영지로 귀환[177] 기사단장들과 총대주교 헤라클리우스가 기를 위해 탄원하였으나 보두앵은 그들을 궁정에서 쫓아냄. 이후 그들은 십자군 청하러 서유럽으로 향함 / 마누일의 조카 요안니스 두카스의 아들 알렉시오스 등이 시칠리아 왕국에 당도. 굴리에모 2세에게 동로마 원정 부탁[178] 그럼에도 기는 아슈켈론에서 버팀[179] 프랑스 국왕 루이 6세의 막내 아들. 라틴 제국 황제 피에르 1세의 부친[180] 이후 6월 8일 함께 출발해 6월 20일 군영의 살라딘 알현[181] 8월 13일이라는 기록도[182] 진영과 투석기 불태우고 60km 북쪽의 히스반으로 향하여 십자군의 동태 파악. 십자군은 전투 회피, 카라크 입성. 살라딘, 나블루스 습격, 약탈하고 방화. 주민들 학살 혹은 노예화. 이후 자카리야의 성지인 세바스테아 당도. 그곳에 갇혀 있던 무슬림 포로들 풀어줌. 그후 제닌 습격, 파괴하고 떠남[183] 정확히 말하면 속죄 더는 것. 빈자들은 기도로 대신[184] 요안니스 2세의 장남 이사키오스의 외손자, 동로마 황제 안드로니코스 1세와 템플러의 몸값 지불로 아르메니아로부터 석방되었지만 두려운 나머지 킬리키아로 향함, 위조된 칙령 내밀며 총독 자칭. / 시칠리아 국왕 굴리에모 2세의 사촌 탕크레드 디 레체가 이끄는 350척의 함대가 출항. 안드로니코스 1세, 다비드 콤니노스에게 테살로니카 방어 맡기고 사위 로마노스와 요안니스 브라나스를 디라키움으로 파견. 하지만 탈영자 속출[185] 헨리 2세는 예루살렘 국왕을 지냈던 풀크의 증손자.[186] 다만 레몽은 보두앵이 사망하면 자신이 사주했다고 여겨질까봐 후견인은 사양, 조슬랭 3세가 임명됨. 만약 후계자 보두앵이 10세 이전에 사망할 경우 후계는 헨리 2세, 필리프 2세, 프리드리히 1세, 교황의 중재 (시빌라 vs 이사벨라)에 맡기고 그동안은 레몽이 섭정. 기사단장들과 총대주교도 동의[187] 귀족들은 헨리가 대관식 때 봉신들 보호하겠다는 서약 일깨우며 양위 반대. 한편 헨리의 막내인 존이 후보로 고려되었으나 제후들과 부왕의 반대로 무산됨[188] 이에 요안니스 두카스의 동로마 군대가 파견되나 탈영자 속출해 무산됨. 이에 대원수 알렉시오스 기두스가 파견되나 포위 풀지 못함[189] 알레포의 알 아딜이 의사들 파견하나 유서까지 작성. 이후 아흘라트 태수는 팔라반과 결혼 동맹 맺음.[190] 이후 시칠리아 함대 이끌고 마르마라 해 진입한 탕크레드 디 레체, 프린스 제도의 프린키포 섬 습격했으나 격퇴됨. 그후 니코메디아만 습격. 동로마 해군의 반격으로 철수[191] 1185년 가을 살라딘이 아팠을 때에 그가 사망하면 그 가문을 제거하고 자신이 시리아 장악하려 했음. 살라딘이 암살했다는 설이 유력[192] 레몽에게 티베리아스에서 귀족 회의 소집하라고 보낸 후 베이루트와 티레 장악. 한편 템플러들은 보두앵 5세의 시신을 예루살렘으로 호위. 르노 드 샤티용도 가세. 한편 레몽은 이벨린 가문과 나블루스에서 제후 소집해 쿠데타에 반발. 이사벨라, 라말라의 보두앵 드 이벨린, 시돈의 르노, 카이사레아의 발터, 음프헤 4세 등 모임.[193] 레몽, 예루살렘에 시토회 수도사 둘을 파견해 참사회의 승인 없는 대관식은 보두앵 4세의 뜻에 위배된다고 항의. 그럼에도 총대주교 헤라클리오스의 여론 몰이로 시빌라 대관식 거행. 구호기사단장 로제르는 대관식 예복함 열쇠 제공 거부, 템플기사단장 제라르가 제공. 한편 시빌라의 대관식 전에 시빌라는 총대주교와 남편 기에게 왕관 수여. 이에 레몽은 살라딘의 도움으로 이사벨라 옹립하려 함. 그러자 내전 두려워한 음프헤 4세는 예루살렘 향해 시빌라에게 충성 서약. 이후 레몽은 보두앵 2세의 외손이라는 점을 들어 왕위 칭할까 생각. 기 드 뤼지냥, 아크레의 귀족 회의에서 레몽을 반역자로 선포하고 베이루트 영지 압수. 이에 레몽은 아내 에스키바의 갈릴리 영지로 은퇴. 발리앙 드 이벨린도 충성 서약 거부, 아들 토마스에게 영지 물려주고 안티오크 향함[194] 9월 혹은 1187년 1월이라는 기록도. 한 포로가 휴전 기간 상기시키자 르노는 '너희의 무함마드한테나 와서 풀어달라 그래라'라는 망언[195] 다만 기 드 뤼지냥은 예법대로 사절 맞이하고 르노에게 포로 석방 명하나 르노는 불입권 내세우며 거부. 이에 살라딘은 휴전 종료 선포[196] 1183 ~ 1186년간 알레포 총독 맡았다가 다시 이집트 맡음. 치열한 전투 끝에 자파 점령. 저항 대가로 주민들 노예로 끌고감 / 아르멩가드 드 아스페가 구호기사단장 취임[197] 기의 의붓 장인? 발리앙 드 이벨린이 티베리아스 공격은 십자군을 분열시켜 살라딘의 개입 초래할 것이고 레몽의 군대가 더 우세하다고 중재 시도. 하지만 레몽이 베이루트 돌려줘야 협상 응한다고 하자 기가 거부하며 결렬됨. 한편 레몽과 보에몽 3세는 살라딘과 휴전 체결.[198] 사절단이 늦게 출발했는지 나블루스에서 하루 묵음. 한편 이미 살라딘의 장남 알 아프달의 선발대는 바니야스에 주둔[199] 발리앙은 다른 일로 나블루스 남고 나머지 사절은 갈릴리 향해 떠남. 기사단장들은 라 페브 성채 당도. 하지만 이미 알 아프달의 선발대가 야곱의 여울에서 요단강 건너 진군. 레몽, 해를 끼치지 않는 대가로 다음날 갈릴리 통과 허용. 레몽, 기사단장들에게 경고. 발리앙, 다음날 성 야고보의 날 미사 위해 세바스테아로 향하여 그 주교 소환. 저녁, 레몽의 사절이 라 페브 당도. 템플기사단장 제라르, 현지 템플러 소환. 카쿤의 자크 드 마일리가 90여명의 기사들과 합류[200] 발리앙, 예배 후 라 페브 향함. 한편 레몽의 경고에도 출정한 기사들은 나사렛 인근 사푸리야의 크레송 샘에서 말들의 목을 축이던 아이유브 군대 발견. 구호기사단장 로제르와 템플기사단의 지휘관 자크의 만류에도 기사단장 제라르는 공격 결정. 그리고 제라르가 비겁하다고 놀리자 자크 역시 돌격 동참. 하지만 아이유브 군대가 버티며 우세한 숫자와 궁병들로 반격해오자 패배. 아이유브 군대가 추격해 사상자 늘어남. 제라르와 2명의 템플러 만이 나자렛 당도. 이븐 알 아시르에 의하면 기사들은 몰살당하고 템플러 지휘관 한명만 겨우 도주했다고. 기사들의 수급은 살라딘에게 보내짐. 나머지 템플러들은 사로잡힘. 한편 라 페브 당도해 패전보 접한 발리앙은 부상당한 제라르의 치료 지원하고 대주교와 티베리아스 당도. 레몽에게 기독교 지도부 통일을 위해 기에게 용서 구하자고 설득, 수용됨. 한편 아이유브 군대는 별 저항받지 않고 갈릴리 횡단해 살라딘의 본진과 합류[201] 한편 템플러들은 기에게 헨리 2세가 토마스 베켓 살해의 속죄금으로 지불한 돈 전달. 안티오크 공 보에몽 3세의 아들이 50여명의 기사들과 합류[202] 한편 그 전에 살라딘은 페트라 방면으로 향하여 메카 순례 마치고 돌아오는 누이 및 조카들의 카라반 마중나감[203] 총대주교 헤라클리오스가 갑자기 와병 호소하여 성묘 교회의 원장이 대신 가져옴[204] 다마스쿠스에서 서남쪽으로 40여 km 떨어진 곳. 조카 타키 앗 딘이 우군, 쿠크부리가 좌군, 본인이 중군 맡음[205] 시빌라의 전남편인 기욤의 동생. 아랍인들은 그를 알 마르키슈로 부름[206] 벨부아 성채의 구호기사단이 포착했으나 소수라 그냥 지켜봄[207] 르노 왈, 레몽의 영토를 구하려는 것을 레몽은 막지 마라. 레몽이 살라딘 뇌물 받았다고 주장. 저녁 때 레몽의 아내 에스키바의 편지 당도하자 재차 회의. 레몽, 성채 버틸 수 있으니 안티오크 지원군 기다리며 살라딘 군대 땡볕에 놓아두어야 한다고 주장. 이에 기도 동의. 하지만 템플기사단장 로제르가 사석에서 재차 설득. 결국 기는 다음날 전투 결정[208] 레몽이 선발대, 기가 중군, 르노와 기사단이 후군. 튀르크 기병대 및 궁수들의 소규모 공격. 한편 언덕 아래에서 올라오는 연기에 시야 방해. 하틴 앞두고 템플러들이 중무장 갑옷 호버크 때문에 지쳐 멈춤. 하틴에서 3km 떨어진 루비에 (marescalcia) 일대에 진영 세움. 기대와 달리 수자원 전무. 샘 있다는 레몽 주장대로 그곳까지 왔다는 기록도. 레몽, 호수까지 진격 주장[209] 갈증에 시달리던 십자군, 다음날 기의 결정으로 포위 뚫고 호수 향함. 하지만 기병대는 불길 때문에 우회하다가 아이유브 군대에 막힘. 한편 보병대는 명령 어기고 언덕 위로 향했다가 아이유브 군대에게 포위되어 학살됨. 십자군은 이를 구하지 못함[210] 패색이 짙어지자 레몽은 기의 명령도 없이 휘하의 트리폴리, 갈릴리 기사들과 포위망 향해 돌격. 그를 알아본 타키 앗 딘이 퇴로를 열어주었다함. 한편 발리앙과 이벨린 군대도 탈주 성공. 다만 기, 르노, 기사단은 하틴 언덕으로 밀려남. 아이유브 군대, 십자군 진영 진입. 아크레 주교 등 전사. 기, 아모리 드 뤼지냥, 르노 드 샤티용, 템플기사단장 제라르 등 포로. 구호기사단에 의하면 1천 기사들 전사, 2백 도주.[211] 살라딘, 기를 자신의 막사에서 공손히 맞음. 다만 르노에게 물 건내려 하자 제지. 손수 르노의 어깨 내리침. 이후 처형됨. 기사단원들은 무슬림 광신도들에 의해 학살됨. 포로들은 다마스쿠스로 운송됨. 몸값 낼 수 없다고 판단되는 가난한 기사들은 노예 전락[212] 7월 7일 혹은 9일이라는 기록도. 상인들 떠난 후 무슬림 병사들이 상점 약탈[213] 피신해 있던 발리앙의 병사들은 며칠간의 협상 후 항복. 이벨린 성채는 하루간의 저항 후 항복[214] 본래 목적지인 아크레 당도하자 이상한 낌새 느끼고 하선 거부. 무슬림 상인으로 가장한 채로 사실 파악하곤 티레로 향함. 그의 당도에 힘을 얻은 시민들은 살라딘의 르노에게 성벽에 내걸라고 보낸 문장 2개를 해자에 내던짐. 이후 르노는 영지인 시돈 방어 위해 떠나고 발리앙이 당도해 코라도 도움. 살라딘, 하틴 전투에서 사로잡은 코라도의 부친 기욤 인질로 항복 요구하나 코라도가 화살로 응수하자 티레 공격 대신 북상[215] 살라딘, 자신의 포로인 위그로 그 영지인 비블로스 항복 얻음. 이후 약속대로 위그 석방함.[216] 8월 9일이라는 기록도[217] 그의 아내가 동로마 황녀 마리아 콤니니 (아모리 1세의 과부)였기에 동로마 건드리지 않으려는 살라딘의 호의. 이후 약속 어기고 나블루스에서 예루살렘 들어가지만 살라딘은 이역시 허용. 예루살렘에는 겨우 2명의 기사만이 남아있는 절망적 상황. 성안의 16세 이상의 남자들과 30명의 상인들 기사로 서훈. 여왕 시빌라는 살라딘의 허가 하에 예루살렘 떠나 나블루스에서 기 기다림 한편 안티오크 대주교 애므리는 바그라스 주교를 파견해 헨리 2세에게 친서 보냄 (예루살렘 왕가와 가까운 친척) 그리고 티레 대주교 요시야스는 안티오크에서 시칠리아 거쳐 프랑스 향해 하틴의 비보 전하러 감[218] 8월 10일이라는 기록도. 이때 아이유브 군대가 호위. 한편 그날 밤 예루살렘에서 아슈켈론으로 사절 당도. 살라딘과 협상하나 항복 거부[219] 협상 도중에도 더 유리한 조건 위해 양측간 접전 이어짐. 결국 1인당 성인 남성은 10 디나르, 여성은 5 디나르, 아이는 1 디나르의 몸값 책정. 제대로 하면 3만 디나르인데 발리앙의 요청에 7천 디나르로 대폭 할인[220] 시칠리아 사절단과 함께. 하틴 전투의 비보도 전하지만 더 중요하게도 참십자가 상실이 더 큰 소식[221] 남은 두 성채인 카라크와 몽레알의 항복 대가로 살라딘과 협상해 음프헤 석방시킴. 하지만 그의 항복 요청에도 기사단이 거부하자 음프헤는 다시 살라딘 군영으로 되돌아감.[222] 몸값 지불 혹은 면제된 자들은 서쪽 성문으로, 몸값 못내고 노예된 자들은 동쪽 성문으로 향함. 기사단은 자신 멤버 아닌자들 대한 몸값 지불 거부. 총대주교 헤라클리우스 역시 재산 다 챙겨감. 알 아딜, 1천 포로 석방. 헤라클리우스는 7백, 발리앙은 5백 포로 선별해 몸값 없이 데려감. 살라딘의 관용과 반대로 일부 아이유브 병사들이 몸값 바가지 씌우기도. 피난민 무리는 안전히 티레 당도. 입을 덜기 위해 일부는 트리폴리 향함.[223] 일부 주장에도 살라딘은 성묘교회 보존. 예루살렘의 정교도들은 몸값 및 지즈야 납부 대가로 남아있을 수 있음. 한편 동로마 황제 이사키오스 2세는 살라딘과 협상하여 예루살렘의 기독교 성지 대한 동방 정교회의 관할권 인정받음. / 티레와 트리폴리 시민들이 예루살렘의 낙오자들 입성 거부. 이에 그들은 안티오크로 향함[224] 9월 혹은 12월이라는 기록도. 향년 47세. 레몽 3세의 외조부와 레몽 4세의 외고조부는 예루살렘 국왕 보두앵 2세로 같음. 따라서 6-7촌뻘[225] 29일이라는 기록도. 십자군 떠나는 이들의 재산은 교회의 보호 하에 놓이고 5년간 매주 금요일마다 단식, 수요일과 토요일에 육식 금함. 기독교권에 7년간 평화 제안됨. 한편 우르바노 3세 이후 유력한 교황 후보였지만 사양한 앙리 드 마시가 십자군 설교 맡게됨[226] 12월이라는 기록도[227] 살라딘, 하틴 전투에서 포로가 된 코라도의 부친 기욤 5세를 성벽 앞에 데려와 그와 도시 교환 제안. 하지만 코라도가 직접 석궁 들고 부친을 겨냥하며 거부하자 무산됨. 이후 기욤 5세는 이듬해 타르투스에서 석방되어 1191년 여름 티레에서 사망[228] 포위군은 17개 공성탑 주조하여 성벽 공격. 이에 십자군 함대의 궁수들과 투석기들이 포위군 폭격하며 대응. 이에 살라딘은 아브드 앗 살람 알 마그리비 휘하 10척의 이집트 함대 소환[229] 포위군의 공세 모두 실패하고 포위 장기화되었는데 수비대 중 스페인 출신의 '녹색 기사' 산초 마르틴이 수차례 포위망 습격해 성과 올림. 그의 용기와 능력을 가상히 여긴 살라딘은 그에게 이슬람으로 개종하고 자신의 편에서 싸운다면 큰 보상을 내어주겠다고 제안하나 그는 거절하고 습격 이어감[230] 필리프가 헨리 2세와 전쟁 중이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