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모에 미러 (일반/어두운 화면)
최근 수정 시각 : 2018-05-01 14:10:24

아비일로

불가리아 구국의 영웅이자 잔다르크의 선배

1. 개요

이바일로는 불가리아의 평범한 주민이었다[1]. 그런데 그의 인생을 180도 바꾸는 대 사건이 발생하는데 당시 바투수부타이가 이끌던 몽골군이 동유럽을 침공하면서 시작된다.
몽골은 킵카스 지역에서 명장 다비트나린에게 패했지만 러시아의 맹주 키예프 공국을 갈아버리고, 폴란드 레그니차에서 경건공 헨리크 보즈와니가 이끄는 유럽의 기사단을 박살 내고 동유럽의 강자 헝가리의 수도 부다페스트를 불바다로 만드는 등 동유럽에서 무시무시한 군대로 통했다. 그 때문에 이바일로의 나라인 불가리아도 타겟이 됐고 불가리아도 몽골의 침입을 받게 된다.

불가리아는 끝까지 싸웠지만 중과부적으로 몽골군이 주둔하고 조공을 바치는 조건으로 협정을 맺으며 전쟁을 끝낸다. 그때 이바일로는 신이 몽골군을 조국인 불가리아 밖으로 쫒아내라는 게시를 받았다며 의용군을 조직, 당시 세계 최강의 군대이던 몽골군을 상대로 연승을 하면서 몽골군을 불가리아 국경 밖인 도나우강 너머로 밀어냈다. 이 업적으로 조국인 불가리아에서는 구국의 영웅으로 평가되고 동유럽에서는 경건공 헨리크2세와 더불어 동유럽의 영웅이며 동유럽의 잔다르크로 평가된다.

2. 생애

2.1. 거병

이바일로가 살던 북동부 불가리아 지방은 킵차크 칸국의 무거운 조공에 시달리고 있었다. 이에 이바일로는 몽골의 침입을 격퇴하고, 그들에게 굴복한 귀족들을 숙청하고자 마음먹고, 1277년 불만을 품던 사람들을 모아 의용군을 조직했다.
의용군은 북동부 불가리아를 약탈하던 몽골군을 공격, 그 해 가을에 완전히 몽골군을 축출 하였다. 당시 불가리아 정규군도 몇십 년 간 몽골군을 당하지 못하였기에 이바일로는 추종자들로부터 사실상 황제로 대접 받았다.

1277년 말, 불가리아의 차르 콘스탄틴 티흐는 이바일로의 의용군을 반란군으로 규정하고 이들에 대한 토벌을 개시하였다. 하지만 당시에 콘스탄틴은 통풍을 앓고 있었고, 이 때문에 토벌군은 느리게 진군 했다. 충분히 시간이 있었던 이바일로는 차르의 군대를 매복, 공격하였고, 차르와 그 측근을 처형하고 나머지 병력을 자신의 휘하에 귀순 시켰다.
이 승리 이후 이바일로는 불가리아의 다른 도시들을 공격했고, 이 지역은 항복하며 그를 황제로 인정하였다. 남은 것은 콘스탄틴의 황후 마리아가 대신 통치하고 있는 수도 터르노보만 뿐이었다.

불가리아 차르의 전사는 동로마 황제 미카일 8세에게 충격을 안겨 주었다. 그는 처음에 불가리아의 위기를 자국에 유리하게 이용하려 했지만, 이바일로의 군대가 계급 투쟁적인 면모가 명확하자, 이런 풍조가 동로마까지 확산될 것을 우려, 불가리아 귀족들을 지원하기 시작했다.
미카일 8세는 비잔티움에 머무르던 불가리아의 전 황제 미초 아센의 아들 이반을 불가리아의 차기 왕위 계승자로 내세웠다. 이반은 미카일의 딸 이레네 팔라이올로기나와 결혼하였고, 이반 아센 3세라는 이름으로 불가리아의 차르를 자처했다. 그리고 동로마 제국은 군대를 북방으로 파병하고, 황후 마리아에게 왕좌를 포기할 것을 설득하였다.

그러나 이런 처사에 빡친 마리아는 이바일로와 협상을 하여 그에게 불가리아의 제위를 정식으로 제의하였다. 그녀는 권력에 대한 욕구가 강하였고, 삼촌 미카일 8세에 대한 반감도 컸다. 이바일로는 마리아의 아들 미하일 아센 2세를 자신의 후계자로 보장하는 조건으로 공동 통치를 승락하였다. 사실 이바일로는 처음 마리아의 제의를 꺼렸지만, 장기간 내전으로 나라가 혼란에 빠지는 걸 피하기 위해 이를 받아들였다.

2.2. 몽골, 동로마 제국과 전투

1278년 여름 이바일로는 수도 토르보로에 입성한 후 정식 차르로 즉위 했다. 그 사이 미카일 글라바스가 이끄는 동로마 제국군이 침공해 왔지만, 불가리아군은 그들을 두 차례나 무찔렀다. 이에 미카일은 몽골에 원군을 요청하였다.
이쯤 이바일로는 귀족들의 지지를 얻지 못하였고 황후 마리아와 자주 싸웠지만, 그럼에 불구하고 침공해온 몽골군을 도나우 강 이북으로 축출 했다. 그 사이 동로마 제국군은 쉬프카 가도와 흑해 방면에서 공격하여 빈집털이를 시도했지만, 이바일로의 부하 밈칠, 쿠만, 담얀, 칸초, 스탄 등이 이를 격퇴했다.

이후 이바일로는 남부 지역을 안정시킨 후, 그는 북쪽의 몽골군과 맞서 싸웠다. 이전과 달리 몽골군은 정예병으로 구성되어 있었고, 이바일로는 패배하여 드러스터르 요새로 피신, 3개월 간 포위를 당하게 되었다. 이 사이 수도의 귀족들은 이반 아센 3세를 내세워 반란을 일으켰고, 황후 마리아는 폐위 되어 콘스탄티노폴리스로 추방 당했다.

그런데 몇 달 후 이바일로가 몽골군의 포위를 격파하고(!) 수도 교외에 나타나 귀족반란군들을 포위하였다. 동로마 황제 미카일 8세는 사위를 보호하기 위해 1279년 여름 무린 장군이 이끄는 10,000명의 강병을 파병하였다. 이바일로는 수적 열세에 불구하고 데비나에서 동로마 제국군을 격파하였다. 이에 미카일 8세는 이번엔 아프린이 이끄는 5000명의 군대를 다시 파견하였다. 그러나 이들 역시 이바일로에 패배하였고, 아프린 역시 전사하고 만다.

2.3. 최후

이 사이 이반 아센 3세는 터르노보에서 도주하였고, 불가리아 귀족들은 당시 가장 영향력 있던 귀족 중 한 명인 체르벤의 귀족 게오르기 테르테르를 차르로 추대했다. 한편 이바일로는 연전연승을 거두었지만, 계속 된 전쟁으로 그의 군대는 사기가 꺾였고, 그를 지지하던 농민과 민중도 전쟁에 지쳤고, 귀족과 왕위 쟁탈에 연연하는 이바일로에게 실망하게 되었다.
국내에 세력이 약화된 이바일로는 일부 충성스런 신하들과 함께 과거의 적인 몽골의 노가이 칸에게 망명, 도움을 요청하였다. 노가이 칸은 처음에는 이바일로를 환대했지만, 미카일 8세의 사주로 결국 그를 암살하고 말았다.

3. 의의

이바일로는 사후에 불가리아 민중들의 기억 속에 정의, 자유, 평등의 투사로 남았다. 또한 당대 및 후대에 가짜 이바일로들이 주도하는 봉기가 연달아 일어나기도 했다.
그의 사후 20년 간 제 2차 불가리아 제국은 몽골의 끊임없는 내정 간섭과 봉건귀족들에 의한 중앙집권 붕괴로 쇠퇴의 정점을 찍었다. 그러는 사이 동로마 제국은 미하일 8세의 의도대로 불가리아가 차지하던 트라키아의 대부분을 점령하였다. 불가리아는 1300년이 되어서야 토도르 스베토슬라프의 등장과 함께 재흥의 기틀을 마련한다.
[1] 도브루자 출신의 돼지치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