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맹산군 출신 독립운동가, 안영호
성명 | 안영호(安永浩) |
본관 | 순흥 안씨 |
생몰 | 1895년 ~ ? |
출생지 | 평안남도 맹산군 지덕면 덕화리[1] |
사망지 | 미상 |
추서 | 건국훈장 애족장 |
안영호는 1895년경 평안남도 맹산군 지덕면 덕화리에서 태어났다. 그는 태극단(太極團)에 가담했고, 1925년 4월 15일 방석홍과 함께 38식 보병총과 탄환 5발, 러시아식 군총과 탄환 5발을 휴대하고 함남 영흥군에 거주하는 문태봉(文泰鳳)의 집에서 군자금 300원을 모집했다. 이어 1925년 7월 1일에는 안경준, 방석홍과 함께 평남 덕천군 덕천면 산양리에서 군자금을 모집하다가 맹산경찰서에 체포되었다. 이후 1925년 9월 25일 평양지방법원에서 총포화약취체령 위반 혐의로 지역 6년을 선고받았고, 1928년 칙령 제270호에 의해 징역 3년 9개월로 감형되어 옥고를 치렀다. 이후의 행적 및 사망년도, 사망지는 기록이 미비해 알 수 없다.
대한민국 정부는 2014년 안영호에게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2. 강서군 출신 독립운동가, 안영호
성명 | 안영호(安永浩) |
본관 | 순흥 안씨 |
생몰 | 1895년 ~ ? |
출생지 | 평안남도 강서군 |
사망지 | 미상 |
추서 | 건국포장 |
안영호는 1895년 평안남도 강서군에서 태어났다. 그는 안창호의 사촌동생으로, 1905년 안창호의 초대를 받고 부친 안교점과 함께 하와이로 이민했다. 그는 12살 때 감리교회에서 운영하는 학교에 다녔고 15살 때는 재봉 일을 배웠으며, 1915년에 샌프란시스코로 이주했다. 그는 쌀 농사를 하기도 했고 트럭 운전사를 하면서 생계를 꾸렸고, 1925년 조앤 김과 결혼했다. 이 결혼식에는 안창호와 안총호의 부인 이혜련이 참석했다.
1937년, 안영호는 대한인국민회 오클랜드지방회에 가입해 1945년까지 활동하며 독립운동자금을 지원했다. 그는 1937년 오클랜드지방회 지방집행위원 겸 실업부원을 역임했고, 1940년 오클랜드집아회 선전위원, 집행위원장 등에 선출되었다. 1941년 8월 29일에는 국치기념식을 주관했고 그해 11월 17일에는 순국선열기념식을 주관했다. 또한 1942년에 독립금을 모집하고 국민회 창립기념식, 3.1절 기념식, 국치기념식, 임시정부 대일선전 1주년 기념식을 주관했다. 1943년 오클랜드지방회 집행위원장ㆍ중앙집행위원, 1944년 오클랜드지방회 총무, 1945년 실업위원으로 활동했다. 또한 1917년부터 1945년까지 여러 차례 독립운동자금을 지원했다. 그러나 1945년 이후의 행적 및 사망년도, 사망지는 기록이 미비해 알 수 없다.
대한민국 정부는 2014년 안영호에게 건국포장을 추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