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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1-27 18:42:57

안케패스 전투

안케패스 전투
파일:external/www.vietvet.pe.kr/anke-9.jpg
베트남 전쟁
날짜
1972년 4월 11일 ~ 26일
장소
남베트남 꾸이년 인근 서쪽 60km 지점
교전 국가 및 세력 [[틀:깃발|
기 명칭
대한민국
]][[틀:깃발|
깃발 명칭
대한민국
]][[대한민국 제3공화국|
대한민국 제3공화국
대한민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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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베트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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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베트남 민족해방전선|
남베트남 민족해방전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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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휘관 [[틀:깃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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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틀:깃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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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세호|]] (파월 국군 사령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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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틀:깃발|
깃발 명칭
]][[틀:깃발|]] 정득만 (맹호사단장)
불명
결과
대한민국 육군남베트남군승리, 그러나 손실이 극심함.
병력 대한민국 육군 수도사단 기갑연대 1,400명
베트남 공화국군 제2군단 제22사단 제44, 47연대
제3사단 제12연대
지역 베트콩
피해규모 전사 75명, 부상 222명 (공식#[1])
전사 173명 (비공식#)
전사 705명 (근거희박), 노획화기 79정

1. 개요2. 평가3. 편성4. 전개
4.1. 638 고지 전투
4.1.1. 4월 11일4.1.2. 4월 12일4.1.3. 4월 13일4.1.4. 4월 14일4.1.5. 4월 15일~16일4.1.6. 4월 17일4.1.7. 4월 18~20일4.1.8. 4월 22~23일4.1.9. 4월 24일4.1.10. 4월 25~26일
5. 638고지 전투외6. 그 후7. 여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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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안케패스 작전은 1972년 4월 11일부터 4월 26일까지 맹호부대(수도사단) 기갑연대가 치른 전투이다.

2. 평가

가장 치열한 전투이자 당시 구정공세이후 유일하게 연합군이 선전하여 전과를 냈던 전투이다라는 것이 공식 주장이다. 그러나 실제로는 베트남 전쟁 중 한국군에서 가장 많은 사상자가 나온 전투이다.

인터넷을 검색해 보면 안케패스 작전 당시 한국군의 많은 삽질로 인해 군 수뇌부를 비판하는 내용으로 가득한 참전용사들의 글을 쉽게 찾을 수 있다. 가장 최악의 지휘로는 1대대가 고지에서 총알이 하도 쏟아져 진격이 힘들자 드럼통에 흙을 채워 굴리면서 밀고 올라가라는 지시를 내린 것이었다. 군대는 까라면 까는 것이어서 흙으로 채운 드럼통이 현장에 투입되긴 했는데 밀고 올라가긴 커녕 굴러 내려오는 상황이 발생하자 현장 지휘관이 곧장 그만 두었다.

참전용사들이 이정도로 심하게 비난하는 전투는 안케패스 전투 외에는 거의 찾기 힘들다. 한마디로 한국군 최악의 졸전으로 알려진 짜빈박 전투보다 더 많이 죽었다. 1972년 한해 동안 발생한 한국군 전사자는 448명(순직 등을 포함한 전체 사망자는 513명)임으로 단일 교전에서 그 해 사상자의 16%가 발생한 것으로 결코 작은 피해가 아니었다.

'안케패스 작전'하면 지역 내 638 고지에서 있던 전투가 전부로 오인되어 양자를 헷갈리는 경우가 종종 있다. '안케패스 작전'의 일부가 638고지 전투이자 가장 중요한 작전이며 대부분의 피해가 나온 전투이다. 작전 자체가 기갑연대 1중대 관할인 638고지에 숨어든 적군이, 1중대를 기습하자 우발적으로 일어난 작전이 바로 안케패스 작전이다.

당시 참전용사들은 '안케패스 전투'라고 하면 일반적으로 이 638 고지 전투를 생각한다. 인터넷 참전 수기에서 '안케패스 전투'라고 하면 638고지와 무명고지 전투가 주로 다뤄진다. 그에 비해 19번 도로를 개통하기 위해 3대대 치른 전투는 앞선 전투에 비해선 상대적으로 덜 알려져 있다.

3. 편성


사상자 교환비는 이번에도 한국군 전사 75명 대 베트남군 전사 700 명으로 압도적인 교환비를 내기는 했다. 9대1에 이르는 교환비인데, 참전용사들은 75명이 축소되었다고 주장하며 173명으로 추정하고 있다.# 그러나 '''문제는 월맹군 전사자 700명은 실제로 발견한 적군 시신과 노획한 화기 숫자를 감안하면 다소 과장되었다는 것이 전사 연구자들의 공통된 입장이며 이는 당시 작전에 투입된던 인원들의 증언에서도 꾸준히 반복되었다.

양자를 비교하면 알겠지만 안케패스 작전에 참가한 16개 중대중에서 7개 중대가 638고지 전투에 참가했으며, 적 사살, 노획화기, 아군 피해의 절반 이상이 638 고지에서 나왔다. 638 고지 전투를 요약 하자면 한국군 1개 소대가 1971년 8월 폐쇄한 638고지 상의 진지를 규모 미상의 적군이 점령 하였고, 이를 회복하기 위해 한국군 7개 중대가 공격했다가 큰 피해를 입은 전투이다. 특히 공격의 선봉을 담당한 1연대 8중대의 경우 95명중에서 전사 17명(중대장 김용강 대위 포함), 부상 30명으로 상당한 피해를 입었다. 24일, 1대대 4중대가 대신 진격해보니 적은 이미 다 철수한 상태로 진지에는 적 시신 4구만 확인할 수 있었다.

당시 안케패스 전투는 638고지 전투, 무명고지 전투, 19번 도로 개통 작전으로 총 3개의 전투가 동시에 일어났으며 이는 춘계대공세간 월남군 2군단에 대한 보급 차단으로 월맹군의 공세 여건 보장을 위해 실시된 것이다. 당시 적은 사전 638고지를 점령한 인원을 포함해 그 일대에 연대급 제대를 투입하였기에 700여명의 사살이 현실적으로 불가능하지 않다. 애초에 안케패스 전투는 638고지라는 한정된 위치에서 발생한 교전이 아닌 7.5km에 달하는 19번 도로 축선을 끼고 진행된 작전이었다. 다만 전과가 전반적으로 과장되었으며 근거가 부족하다는 점 또한 분명하다 할 수 있다.

주월한국군의 사상 첫 정규전이었으며 최악의 피해를 입은 만큼 수많은 훈장이 수훈되었다. 최고의 훈장인 태극 무공 훈장만 2명 받았고 (2중대 1소대장 고 임동춘 중위, 4중대 3소대장 이무표 중위), 졸렬한 지휘를 하여 푸짐하게 욕들어 먹은 연대장 김창렬 연대장을 포함하여 4명에게 을지 무공훈장, 충무 무공훈장 6명, 화랑 무공훈장 13명, 인헌 무공훈장 약간 등 50여명에게 훈장이 쏟아 졌다.
1971년 11월 19일에 부임한 맹호 사단장 정득만 소장은 적 박격포 사정거리를 고려하여 "기지 주변2킬로 미터 이내를 매일 반복 수색 하라"라고 지시를 내리며 이는 일일 수색 계획으로 매일 사단에 보고 되었다. 그런데 1중대는 이를 보고만 하고 시행하지 않았다. 특히 72년 3월 중순 638 고지를 적군이 점령해서 진지를 구축하는데 20일간 모르고 있었다.[3] 4월에는 중대장이 교체되었는데 후임 중대장인 김종식 대위도 계속 허위보고만 일삼았다.

4. 전개

4.1. 638 고지 전투

4.1.1. 4월 11일

안케패스 정상 19번 도로에서 약 200여미터 높은 지역인 600고지 1중대는 중대본부, 1소대, 화기소대 및 연대지원중대에서 파견온 106밀리 무반동포 병력이 배치 되어 있었다. 1중대 기지는 중앙에는 관망대가 있으며, 기지 360도 방면으로 1미터 깊이의 교통호로 연결된 유개호와 무개호가 5미터 간격으로 36개가 구축되었고, 5중 철조망에 수많은 지뢰 및 크레모아로 우주방어를 자랑했다. 1개 소대 병력으로 적 1개 연대를 수일간 막아낼 수 있게 만들었는데, 문제는 방치해둔 638 고지도 마찬가지라는 거다.

04시를 기점으로 안케패스의 최고로 중요한 638고지에 매복해있던 적군은 북쪽 500미터 지점에 있던 기갑연대 1중대를 기습공격하였다. 10시에는 베트남군의 공격으로 19번 도로의 교량과 3m 크기의 도로대화구를 만들어서 도로가 일부 파괴되어서 사단의 공병중대가 즉각 복구를 하게 된다.(14시에 현장 도착하여 17시에 복구완료.)

이때까지만 한국군은 큰 저항이나 적의 공세라고 예측하지도 않았고 철군준비 때문에 병사들 자체도 많이 경계심이 풀어져있는 상태였다. 그러나 이것은 한국군의 최악의 실책으로 작용하게 된다. 16시를 기점으로 월남군 44연대에서 베트남군의 연대급 병력이 안케패스로 들어온 것으로 추정된다는 첩보를 접했지만 사태관망만 하고 있었다. 게다가 638고지는 매복 후 철수한 상태였다.

하지만 다시 17시에 매복조를 투입하기 위해서 638고지로 1개 분대 병력을 보냈다가 638고지에서 적과의 교전이 벌어진다.(1명 실종)[4] 한국군 기갑연대 1중대가 보유한 화력을 총동원하여 매복 및 수색조를 지원했으나 매복조를 지원하던 1중대 1소대장 임만철 중위는 적이 1개 중대급 병력이라는 보고와 함께 638고지에서 퇴각하게 된다. 실제로는 급한데로 적이 1개중대라고 말했을 뿐이지 끝까지 적의 규모는 미상이었다.

4.1.2. 4월 12일

한국군의 탐색전과 다르게 이미 4월 12일 07시를 기점으로 베트남군은 교량 2개소 도로 3개를 폭파하여 19번 도로를 차단하고 638 고지를 장악한 상태였다. 게다가 638고지보다 38m 아래있던 한국군 1중대를 향해서 75mm 무반동총과 82mm 박격포등의 공격을 가하게 된다. 그로 인하여 한국군 기갑연대 수색중대는 638 고지의 적을 파악하기 위해 탐색전에 들어갔지만 결과는 실패로 끝나면서 혼란상황이 된다.

게다가 이날 아침에 19번 도로 개통을 위해 출동했던 수색중대(임규섭 대위)가 큰 피해[5]를 입고 그날 밤 1중대 기지로 퇴각하였고, 이어 기갑 3중대(고정소 대위)140여명도 사상자를 내고 따라 들어오며 상황은 초기 중대급 작전이라 생각했던 작전이 대대급 작전으로 확대 된다.

4.1.3. 4월 13일

13일 09시30분을 기점으로 3중대가 638고지를 향해서 재차 공격을 하지만 역시 실패(3명 전사 9명 부상)하면서 기갑연대 1대대의 대대급 작전은 완전히 실패하게 된다. 이런 사태가 계속되자 정득만 사단장과 강원채 주월부사령관이 헬기를 타고 참모들과 직접 1중대 기지에 방문하지만 적의 82mm 박격포 공격에 작전참모 구경희 중령이 중상을 당하여(1중대원도 1명 전사) 급히 철수하는 상황까지 발생하게 된다.

이때부터 1중대가 있는 600고지에 곡사포와 박격포가 떨어졌다. 1중대 OP는 638고지에 비해 직선거리 275미터에 38미터 낮다보니 정확히 관측당한채 사격을 받게 된 것이다. 게다가 소대급인 1중대 OP에 수색중대, 2중대(진무웅 대위), 3중대가 다 몰려들어와 순식간에 식수와 식량이 고갈됐고 좁은 곳에 병력들이 하도 많이 들어와 벙커에는 50~70명씩, 유개호 초소에는 7~8명씩 엎드린 사람 위로 또 엎드려 있었으며 통로조차 사람으로 가득했다. 이때부터 638고지 전투가 끝나는 16일간 1중대 OP는 수천발의 포격을 당했는데, 적을 보지 못해 총 한발 못 쏴보는 비참한 상황이었다.

그리고 6중대(정태경 대위) 95명이 인근지역으로 헬기 투입되었는데, 헬기 착륙이 가능한 곳 마다 월맹군들이 매복하고 있어 큰 피해를 입는다.

이와는 별도로 10중대(정석병 대위)는 안케패스 서쪽, 11중대(조승옥 대위) 97명은 1중대 기지 후사면 19번 도로에 투입된다.

4.1.4. 4월 14일

전투가 잠시 소강상태가 되나 했더니 06시에 다시 베트남군 박격포 공격에 1중대의 탄약고가 피격되어서 피해(4명 부상)가 나자 당일 08시부로 3중대가 다시 638고지를 공격, 12시에 9부 능성까지 올라가지만 역시 실패한다.(2명 전사 13명 부상)

6중대는 인근 350 고지를 확보하는 과정에서 중대장 정태경 대위와 3소대장 손창윤이 부상을 입고 2소대장 강희수가 전사 하였다. 이에 장교가 부재하여 하사가 중대를 지휘하는 비참한 상황이었다. 6중대는 완전히 고립되었고, 월맹군의 강력한 대공 사격에 헬기 보급마저 계속 실패하였다.

이에 6중대를 구출하기 위해 5중대(안영소 대위) 90명을 390고지 인근으로 투입한다. 5중대에서는 안영소 대위 부상, 3소대장 이강열 사망.(19일엔 5중대 배속 관측장교 한정삼 중위 사망) 장교들 다 죽겠다 이놈들아!

2일간에 걸친 탐색전에서 아무런 소득도 없고 대대급 작전의 공세도 완전히 실패하자 한국군은 15~16일간 연대의 가용화력과 사단포병(61/628포병대대) 그리고 미 제7공군의 증원을 받아서 화력제압을 하기로 결정한다.

4.1.5. 4월 15일~16일

2일간 모든 공세작전이 중지되고 638고지에 대한 대대적인 화력제압이 실시된다. 한국군은 수도사단 직할 61/628포병대대가 2일간 2,909발의 포격을 퍼부었으며 미 7공군에서 143,000발의 포탄을 쏟아붓게 된다.

15일에는 APC 4대로 구성된 사단장갑차 중대(권혁원 대위)가 투입 되었다. 막 도착하자 마자 월맹군의 B-40 척탄통 수십발의 집중 사격을 받고 APC는 계곡으로 굴러떨어지며 5명 사망에, 중대장등 7명 부상을 입었고, 가장 뒤에 있던 1대만 후진하여 퇴각한다.

4.1.6. 4월 17일

이 때를 기점으로 보급로가 차단된 월남군 2군단은 사실상 고립되어서 고전하는 상황이 된다. 그로 인하여 사단본부에서는 지휘관 문책까지 경고할정도로 상황이 심각해졌지만 한국군은 지난 전투동안 적의 규모조차 파악을 못하고 있었다. 월남군 22사단 47연대에서 적의 규모가 1개 연대급 이상의 병력이라고 첩보를 보냈지만 한국군 수도사단과 기갑연대는 월남군에 대한 정보를 믿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월남군의 그 동안의 정보에는 허탕이 많았고 적에게 첩보가 너무 많이 노출되어 있었기 때문에 쉽게 믿을 수 없었던 현실이긴 했지만 불행하게도 월남군이 가져다준 2차례에 걸친 첩보는 정확하게 맞았다.

4.1.7. 4월 18~20일

결국 18일부터 연대급 작전으로 완전히 전환하면서 기갑연대가 총동원되기 시작한다. 08시부터 기갑연대 2대대(8중대)와 3대대(9중대) 병력이 안케패스 지역으로 대거 배치가 시작되면서 본격적인 연대급 작전을 수행하게 된다. 앞서 1대대에 배속된 10중대, 11중대 병력은 3대대(최승철 중령)가 인수 받았고, 여기에 8중대까지 배속받아 3대대는 예하 4개 중대로 안케패스 19번 도로 개통작전을 개시하였다.

이번에 공격을 선봉이 된건 2대대 8중대(이종윤 대위)였다. 23시부터 8중대는 7부 능선을 따라 기동하게 되면서 작전이 시작된다. 그러나 19일에 중대장 및 1소대장 정종호 중위가 중상을 입는 큰 피해를 입었다. 그리하여 철수하여 도로 경계를 담당했지만, 후임 중대장으로 임명된 정정상 대위가 적 부비트랩 교육중 신관이 터져 사망하였다. 이 과정에서 8중대는 투입된 150명중 사망자 7~8명[6]에 부상 15명이 발생했다.

역시 주공을 하게 되어있던 3중대 역시 철수를 하고 1대대 2중대가 20일에 투입이 결정된다.

19일 공세의 주공을 맡은 기갑연대 1대대는 1연대 8중대(김용강 대위) 100명과 수색중대를 선두로 2중대를 예비중대로 하는 6작전을 펼치게 되지만 15시 30분에 8부능선까지 점령해놓고 적의 82mm 박격포의 대규모 화력공격에 1연대 8중대장 김용강 대위등 9명이 전사하고 12명이 부상을 입게되면서 공격이 돈좌하게 된다. 게다가 연대를 지원하기 위해서 배속된 61포병대대 역시 적의 대대적인 대포병사격(82mm박격포로 200발의 공격을 받았다.) 105mm 주포 1문이 파괴되고 2문이 사용불능상태가 된다.

기갑연대는 예하 11개 중대[7] + 기갑중대를 몽땅 투입하고도 병력이 부족하여 26연대 2중대를 배속 받았다. 4월 20일에 소도산 인근 390고지에 60명을 투입 하였는데 12명이 전사, 부상 26명으로 중대 자체가 작살나고 중대장은 김용걸 대위 마저 부상을 입었다.

3일에 걸친 연대급 공격 역시 실패하게 된다.

이 당시 병력 부족이 너무 심하여 백마부대로 파월 특병을 받고 이동중인 장교와 병사들을 배안에서 강제로 끌어내 차출하였다. 그나마 사병들은 출동한 기갑연대 기지를 방어하는 병력으로 배치했으나, 신임 장교들은 그대로 638 고지에 헬기투입 시켰다.

4.1.8. 4월 22~23일

21일 부대를 재편하고 22일에 다시 공격에 들어갔지만 한국군은 역시 실패했다. 공격부대가 하나같이 동일한 기동로로 축자투입에 가까운 공세를 하고 있었기 때문에 피해만 커지고 있었던 상황이었다. 덕분에 예비중대였던 2중대마저도 3차례나 패퇴해야했다. 15시에 개시된 3차 공격에서는 드럼통에 흙을 넣어서 엄폐물로 삼고 올라가는 다소 무리한 공격방식이 시작되었지만 결국 실패하게 된다. 결국 기갑연대 2중대는 마지막 4차 공격에 들어가게 되는데 소대장들이 분대장들 위치에 해당하는 극단적인 진두지휘 원칙의 방식으로 전환되어서 638고지에 있던 베트남군 1선 방어선을 무력화시키게 된다. 하지만 완전한 공세는 실패하면서 사실상 한국군의 여러차례의 공세는 사실상의 실패로 돌아간다.

결국 23일에 연대장이 직접 현장에 다시 방문하여 새로운 작전을 수립하게 된다.

4.1.9. 4월 24일

한국군의 공세는 04시에 다시 시작된다. 연대에 배속된 61/628포병대대가 04시를 기점으로 638고지와 예상은거지를 집중포격(1300발 사용)을 가하면서 05시에 1대대 4중대가 본격적으로 투입된다. 소규모 교전을 끝으로 07시 30분으로 4중대가 638고지를 점령함으로서 사실상의 안케패스 전투는 끝이 난다. 이미 베트남군은 한국군의 포격에 더이상 버티지 못하고 후퇴를 하게 된다. 하지만 한국군이 638 고지를 점령하면서 산발적으로 기습포격을 해왔다.

4.1.10. 4월 25~26일

638고지를 확보하고 그외 주변지역의 무명고지까지 장악함으로서 베트남군의 19번도로 차단작전을 분쇄하는데 성공하고 한국군은 잔적소탕에 들어간다. 19번 도로 개통은 26일에 맹호부대 사단본부에 APC 장갑차 4대가 19번 도로를 타고 옴으로서 마무리를 짓게 된다.

5. 638고지 전투외

안케패스 전투의 핵심전투였던 638 고지 전투에 대한 서술만을 그렸지만 4월 12일에 638고지 남동쪽 3km 떨어진 곳에서도 한국군 기갑연대 2대대 6중대가 무명 고지를 두고 치열한 전투를 벌여야했다. 15일을 기점으로 겨우 점령을 하지만 상황이 638 고지보다 안좋아서 6중대가 무명고지에서 고립되는 상황이 벌어진다.

그로 인하여 한국군 기갑연대 2대대 5중대가 15일 저녁에 투입되지만 구원에 실패하면서 6중대의 고립이 계속된다. 당시 6중대원들은 수분부족을 매우 심각하게 호소하였기 때문에 상황은 매우 심각했는데 공세등으로 인하여 4일에 가깝게 물부족에 시달려야 했기 때문이다.[8] 결국 105mm 탄통에 물을 담은 것을 헬기를 통한 공중보급을 했으나 일부 해소만 되었을뿐 6중대의 물부족은 완전하게 해결되지 못한 상황이었다.[9] 결국 18일부로 5중대가 혈로를 뚫음으로서 6중대가 무명고지에서 철수하고 사단에서 증원을 한 26연대 2중대가 20일에 다시 무명고지에 대한 역습을 가함으로서 전투를 종결짓게 된다. 24일에 26연대 2중대가 철수하고 다시 5/6중대가 소탕작전에 돌입함으로서 전투가 완전히 끝나게 된다.

6. 그 후

26일에 기갑연대 3대대가 19번 도로지역의 잔적소탕에 들어감으로서 안케패스에서의 전투는 완전히 마무리 된다. 구정공세 이후 대규모 공세였던 베트남군의 춘계대공세에서 유일하게 선전한 전투가 바로 이 안케패스 전투이지만 당시 한국군의 정보분석 오판과 무리한 축차공세는 오히려 한국군의 피해를 키우게 되는 결정적 역할을 하게 된다. 게다가 638고지를 처음부터 확보하지 못함으로서 적에게 감제고지를 포함한 중요한 전략적 요충지를 내준 문제도 있었다. 그로 인하여 베트남군은 자주 82mm 박격포와 같은 포병화력을 통해서 한국군의 공격을 격퇴하고 역공을 펼치는 사례가 많았다.

실제 한국군은 베트남군의 포병공격에 번번히 피해를 입고 물러나야했다. 게다가 적의 병력규모를 끝까지 제대로 파악을 못했기 때문에 무모한 파상공격밖에 하지 못했다. 핵심지역이었던 638고지에서의 한국군의 전술은 무모한 축차투입이었다. 게다가 이미 638고지를 제외하고 베트남군은 19번 도로지역의 안케패스 지역을 1개월 전부터 파악하고 신속하게 점령할 수 있었지만 한국군은 안케패스 지역에 대해서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점도 피해를 키운 원인이 되었다. 또한 역설적이지만 중대전술기지의 가치를 다시금 증명한 전투이기도 하다. 다만 공격하는 쪽이 한국군, 방어하는 쪽이 베트남군이어서 문제지.

이 전투에서 전사한 임동춘 대위(당시 중위)의 업적을 기리어 2008년부터 육군에서는 모범소대장들을 대상으로 '동춘상'을 제정하여 수여하고 있다.

7. 여담

한국군의 공식 입장은 '베트남전에서 포로란 없다.' 이지만 기갑연대 8중대 1소대 유종철 일병이 이 전투에서 포로가 되었다. 공식적으로 포로는 없기 때문에 실종 즉시 사망으로 처리하여 이미 현충원에 그의 묘소까지 있었다. 유 일병은 330일간의 포로 생활 후 휴전이 되며 포로 교환으로 돌아오게 된다.


[1] 파월한국군전사 제10권 p. 220[2] 12중대는 독립중대로 따로 있었다.[3] 1중대원들이 매일밤 638고지에 매복을 나가야 하는데, 철군등 때문에 매복/정찰을 나가지 않았다는 수기도 있다.[4] 포로로 잡힌 후 자결한 것으로 추정.[5] 1소대장 임진우 중위, 2소대장 김진홍 중위 등 7명 사망. 수색중대장 임규섭 대위 등 다수 부상[6] 무전병 박원배의 시체를 발견 못함. 포로로 잡힌 후 자결 추정[7] 12중대는 독립 중대라 따로 주둔하고 있음[8] 열대지역인 베트남에서 수분부족은 탈수증등을 야기하는 매우 심각한 문제다. 즉 물공급이 안된다는건 전투수행이 어려운 지경에 이른다는 의미이다. 실제로 이 전투를 지휘했던 중대장은 40년 뒤 현장을 찾아 전사한 부하들에게 물을 따라주었다. 당시 물부족으로 인해 소변에 씨레이션 커피를 타서 마실 정도였다고 한다.[9] 참전자들 수기에서는 이때의 물부족에 의한 장기간의 갈증의 괴로움들이 강하게 나타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