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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1-14 23:20:06

알렉스 제임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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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렉스 제임스의 기타 직책
{{{#!folding ▼
아스날 FC 역대 주장
찰리 존스
(1932~1933)
알렉스 제임스
(1932~1937)
에디 햅굿
(1937~1946)
}}} ||
스코틀랜드의 前 축구선수
파일:external/www.arsenal.com/gun__1278669520_james_alex.jpg
<colbgcolor=#eeeeee,#191919> 이름 알렉스 제임스
Alex James
본명 알렉산더 윌슨 "알렉스" 제임스
Alexander Wilson "Alex" James
출생 1901년 9월 14일
스코틀랜드 노스래너크셔 모센드
사망 1953년 6월 1일 (향년 51세)
잉글랜드 런던
국적 영국 파일:영국 국기.svg (스코틀랜드 파일:스코틀랜드 국기.svg)
직업 축구선수 (인사이드 포워드 / 은퇴)
소속팀 레이스 로버스 FC (1923~1925)
프레스턴 노스 엔드 FC (1925~1929)
아스날 FC (1929~1937)
국가대표 8경기 3골 (스코틀랜드 / 1925~1932)

1. 개요2. 일생
2.1. 선수생활 초기2.2. 아스날 시절2.3. 말년
3. 여담

[clearfix]

1. 개요

스코틀랜드의 前 축구선수. 별명은 'Wee'.
뛰어난 수비력과 리더십을 바탕으로 팀을 이끈 아스날의 전설적인 선수이다.

2. 일생

2.1. 선수생활 초기

1901년에 스코틀랜드 랭커셔 주 모센드에서 태어나 벨실에서 어린 시절을 보내며 훗날 축구선수가 될 휴이 갤러거와 친구로 지내기도 했다.

이후 고향의 한 청소년 축구팀에서 뛰다가 1923년에 레이스 로버스에서 프로 데뷔, 2년 뒤에 3000파운드로 프레스턴 노스 엔드로 옮겨지고 그 해에 스코틀랜드 국대에도 선발되어 1928년에 잉글랜드를 5-1로 격파하기도 했다. 그러나 당시 그가 뛰던 시절에는 풋볼리그의 임금상한제 때문에 8파운드의 주급밖에 얻지 못한 데다가 프레스턴 측이 알렉스의 국제 경기 출장을 거부하여 팀과 잦은 갈등을 겪었고, 결국 그는 8,750파운드의 이적료로 허버트 채프먼 감독이 지휘 하에 전성기의 문을 연 아스날로 이적을 하게 된다.

2.2. 아스날 시절

파일:external/40.media.tumblr.com/tumblr_m6raq8YjYj1rzhkubo1_1280.jpg
프레스턴에서 온 알렉스는 채프먼 감독이 구상한 'WM 포메이션'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하여 1930년 FA컵 결승전에서 골을 넣어 팀을 우승시킨 걸 시작으로 1931년과 1933년에 리그 우승을 차지했고, 채프먼 감독 사후인 1934년과 1935년에 또다시 2번 리그 우승을 하고 1936년에는 FA컵 우승까지 했다. 특히 첫 우승을 기록한 해인 1930/31 시즌 동안에 많은 어시스트가 나왔고, 특히 팀이 기록한 127골은 단일시즌 사상 최다 기록으로써 현재도 깨지지 않고 있다.

그 외에도 상술했듯이 리그에 만연했던 임금상한제의 한계로 인해 제임스는 셀프리지 백화점에서 축구 시범을 보여주며 그 대가로 매년 250파운드라는 거금을 받기도 했다.

2.3. 말년

1937년에 부상으로 인해 아스날을 떠난 제임스는 1939년 여름에 폴란드로 건너가 6주동안 폴란드 축구 기술을 가르쳐주었고, 제2차 세계 대전이 터지자 포병대로 복무하다 전쟁이 끝난 뒤 기자로 활동하다 1949년에 아스날로 돌아와 유스팀 코치로써 팀의 미래를 짊어질 새싹들을 가르치다가 1953년에 암으로 사망했다.

3. 여담

사실 그가 경기 내내 헐렁한 바지를 입은 이유가 바로 류머티즘을 앓고 있었기 때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