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르헨티나의 前 축구 선수 | ||
<colbgcolor=#000><colcolor=#fff> 본명 | 알베르토 후안 오아코[1] (Alberto Juan Ohaco) | |
출생[2] | 1889년 1월 12일 | |
사망[3] | 1950년 3월 8일 (61세) | |
국적 | 아르헨티나 | |
출신지 | 아베야네다 | |
포지션 | 센터 포워드, 인사이드 레프트 | |
신체 | 170cm / 70kg | |
배번 | -[4] | |
소속 구단 | 라싱 클루브 데 아베야네다 (1912~1921) | |
국가대표 | 23경기 / 7골 (1912–191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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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아르헨티나의 前 축구인.2. 선수 경력
2.1. 클럽 경력
알베르토 오아코는 커리어의 전부를 전부 라싱 클루브에서 보냈다. 그 이유는 아버지 후안이 이 팀의 창립자 중 한 명이었기 때문이다. 1910년에 데뷔하였고, 그는 아르헨티나의 초창기 축구계에서 최고의 스타로 떠올랐다. 라싱 클루브는 우승을, 오아코는 득점왕 등 각종 상들을 쓸어 모으기 시작한 것. 라싱 클루브에서 올라사르, 카나베리, 마르코베키오, 오스피탈, 페리네티 등의 선수들과 호흡을 맞추었고 아르헨티나 대표팀에도 당연히 선발되었다.1913년에는 라싱 클루브를 이끌고 처음으로 국내 정상의 자리에 올랐다. 득점 순위 맨 꼭대기에서 놀았다. 1919년에는 아르헨티나 리그가 아마테우르스와 아르헨티나 축구 협회로 쪼개졌고 아마테우르스에 속한 라싱 클루브는 쪼개진 첫해에도 역시 정상의 자리를 지켰다. 이듬해 CA 리버 플레이트가 그 자리를 뺏기까지 라싱 클루브는 항상 선두를 지켰다.
1921년에 오아코는 리그의 주인공 위치에까지 올랐고 그의 팀에 큰 성공을 안겨주는 주도적 역할을 하였다. 라 아카데미아, 즉 학원이라는 팀의 별명도 그의 시대에 붙은 것. 그리고 2년 후에 선수 생활을 그만뒀다.
2.2. 국가대표 경력
오아코는 1912년 8월 15일, 우루과이와의 시합에서 데뷔전을 치른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 이후에는 띄엄띄엄 대표팀에 소집되었다가 1916년 자국에서 열린 남아메리카 챔피언십에 출전한다. 오아코는 인사이드 레프트 포지션으로 출전한 칠레전에서 두 골을 넣고 득점 2위를 차지했다. 마지막 우루과이전에 다시 출전했지만 승리를 거두지 못하여 준우승을 차지했다.이듬해 남아메리카 챔피언십에서는 브라질과의 시합에서 2분 사이에 2골을 넣었다. 그렇게 4대2의 역전승을 이끌어냈지만 숙적 우루과이에게 패배하여 또 준우승을 차지하였다. 오아코는 1918년 국가대표 은퇴를 선언했다.
3. 플레이 스타일 및 평가
정제된 테크닉을 보유한 스트라이커. 전술적으로도 영민했고 빠른 스피드를 주무기로 했던 라싱 클루브의 공격의 중심적 역할을 담당했다. 초기 아르헨티나 아마추어 리그 시절 라싱 클루브의 전성기에서 가장 중요한 선수고 라싱 클루브 팀 내 역대 최다 득점자다.4. 수상
4.1. 클럽[5]
- 아르헨티나 프리메라 디비시온 우승 8회: 1913, 1914, 1915, 1916, 1917, 1918, 1919 AAm, 1921 AAm
- 코파 데 이바구렌 우승 5회: 1913, 1914, 1916, 1917, 1918
- 코파 데 부에노스아이레스 우승 4회: 1912, 1913, 1915, 1917
- 코파 데 코우세니에르 우승 1회: 1913
4.2. 국가대표
- 남아메리카 챔피언십 준우승 2회: 1916, 1917
4.3. 개인
- 아르헨티나 프리메라 디비시온 득점왕 4회: 1912, 1913, 1914, 19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