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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5-04-08 19:33:37

앙리 마르탱



1. 개요2. 생애와 활동

1. 개요

앙리 마르탱(Henri Martin 1927~2015)은 프랑스의 정치인이자 공산주의자다.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 당시 프랑스의 식민주의 전쟁에 반대한 군인으로 유명하다.

2. 생애와 활동

앙리 마르탱은 1927년 프랑스 셰르(Cher) 도의 로지에(Rosiere)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프랑스 공산당 당원이었으며, 어머니는 가톨릭 신자였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인 1944년 17살의 나이에 프랑스 레지스탕스로 활동했으며, 프랑스 공산주의자들로 구성된 프랑스 의용군에 가담하여 부르주(Bourges) 해방과 로양(Royan) 공략에 참가했다. 1945년 나치 독일이 항복한 이후 일본에 맞서 반파시스트 운동을 계속할 목적으로 5년 기한으로 해군에 입대했으며, 비록 일본이 항복했으나 1945년 10월 17일 쾌속 전투함인 슈브뢰의 호에 몸을 싣고 인도차이나로 갔다.

인도차이나에 도착한 이후 앙리 마르탱은 프랑스가 식민지 재정복을 목적으로 행한 침략전쟁의 실체와 마주했으며, 이에 실망하여 무려 세 번이나 해군에 입대하기 위해 맺은 계약 파기를 신청했다. 1948년 프랑스 툴롱(Toulon)의 병기고 연료시험장에 배치된 그는 1949년 11월 1일 하사 계급의 기관사로 임명됐다. 이 기간 앙리 마르탱은 프랑스 공산당 인사들과 접촉하고,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에 반대하는 전단을 뿌리는 활동을 전개했다.

그 결과 1950년 3월 14일 프랑스 당국에 의해 체포됐다. 이후 그는 1950년 툴롱과 1951년 브레스트(Brest)에서 두 번의 재판 후에 전단을 배포했다는 이유로 5년형과 군사 강등을 선고받았다.

앙리 마르탱이 체포되자 그에 대한 석방운동이 프랑스 공산당을 중심으로 전개됐다. 이렇게 되면서 앙리 마르탱은 프랑스 내에서 유명한 인물이 되기에 이르렀다. 프랑스 공산당은 “베트남에서의 전쟁 반대와 정부의 탄압에 반대하는 투쟁”을 돕는 좋은 수단이 될 것이라 전망했고, 이에 따라 사건을 공론화했다. 1950년 4월 5일, 앙리 마르탱이 체포된 지 3주가 지난 후 처음으로, 『전위(Avant-Garde)』라는 제목의 공산당 청년 주간지의 일면 전체가 “툴롱의 7명의 선원을 감옥으로부터 건져내자”라는 커다란 제목으로 채워졌고, 이것이 앙리 마르탱 석방운동의 시작이었다. 이 운동은 7월 중순에 이르러 전국적 규모로 확산되었고, 7월 13일 프랑스 공산당 기관지인 『뤼마니테(l’Humanité)』도 앙리 마르탱의 석방을 위한 전국적 규모의 시위를 촉구했다. 이러한 앙리 마르탱의 석방 운동에는 프랑스의 유명한 철학자 장폴 사르트르도 참가했다. 심지어 앙리 마르탱을 위한 연극도 만들어졌다.

이러한 반전운동 및 석방운동으로 1953년 8월 2일 앙리 마르탱은 그의 지지자들이 원하고 요구했던 대통령 특별 사면의 혜택을 입어 석방됐다. 이후에도 앙리 마르탱은 프랑스 공산당과 지속적으로 인연을 맺었고, 반전운동을 전개했다. 1954년 여름 마르탱은 프랑스 공산당 휘하에 있는 청년연맹의 지도급 인사가 되었고, 1962년까지 청년연맹에서 활동했다. 1967년부터 1979년까지 마르탱은 프랑스 공산당 측 중앙위원회 교육 부서장으로 재직했고, 1980년대 동안에도 프랑스 공산당에서 활동했다. 이후에는 프랑스 참전용사 문제에도 관심을 가졌다고 한다. 프랑스 공산당에 계속 몸 담은 것으로 확인되며, 2004년에는 베트남을 방문하여 보응우옌잡과도 만남을 가졌다. 2015년 88세의 나이에 암으로 사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