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소니 파니치
1798년 9월 16일~1879년 4월 8일
본명은 안토니오 제네시오 마리아 파니치(Antonio Genesio Maria Panizzi).
안소니 파니치(Anthony Panizzi)로 더욱 잘 알려져 있다.
이탈리아인 영국 망명자. 법률가, 혁명가, 사서.
대부분의 사람들이 듣보잡으로 생각할 인물이지만 이 사람이 대영 박물관 부속 도서관(이후 대영도서관)을 뜯어 고치지 않았다면 카를 마르크스의 자본론도 없었을 것이다.
모데나 공국의 작은 마을인 브레셸로에서 태어났다. 성장한 후 파르마 대학에서 법학을 전공했다. 대학 재학 중 비밀결사단체[1]에 가담한 것으로 추측된다. 1818년 법률 학사학위를 취득한 후 고향으로 돌아와 법률 사무소를 개업했다.
1820년 양시칠리아 왕국에서 일어난 혁명의 여파로 인해서 당시 공국을 지배하던 프란체스코 4세는 국내의 혁명세력에 대한 탄압을 가하기 시작했다. 이로 인해 파니치는 스위스로 도망가게 되고 그곳에서 부패한 정권과 시민을 탄압하는 모데나 공국에 대한 비판문을 쓰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각종 압력[2]으로 인해 스위스에서의 생활이 어렵게 된다. 때문에 1823년 5월 영국으로 도피하여 리버풀에서 이탈리아어를 가르치며 생계를 이어간다. 그 후 1828년 런던 칼리지의 이탈리아어와 문학을 담당하는 교수가 되지만 그만두게 되고,[3] 영국 도서관의 보조사서가 된다.
당시 영국 도서관의 목적은 닥치는 대로 자료를 수집하여 영국 의회를 보조하는 데 치중되어 있었다.[4] 한마디로 도서관의 목적이 이용자의 이용에 그 초점이 맞추어져 있지 않았다는 말이다.
이러한 문제점을 해결하기 위해서 파니치는 엄청난 노가다를 통하여[5] 단순한 재고 목록에 불과했던 도서목록을 이용자의 이용을 위한 도구로서 변모시킨다. 또한 단순히 탁자에 의자를 놓아둔 창고 같던 종래의 6개 열람실과 대조되는 이용자의 이용에 적합한 원형 열람실을 설계한다.
이러한 노력에 기초하여 "가난한 학생도 지적 호기심을 충족시키고, 학문을 연마하고, 권위자에게 의견을 구하고, 복잡하고 까다로운 연구를 수행하는 데 이 나라의 부자들과 똑같은 수단을 갖기 바란다"는 파니치의 정신에 합치하는 영국 도서관이 만들어졌다. 그리고 이러한 의미에서 대중에게 도서관이 개방되기 시작했고 사회를 변화시켰다.
영국의 런던에서 사망해 켄살 그린 사설묘지에 매장되었다.
[1] 당시 이탈리아는 여러 개의 나라로 나뉘어져 있었고, 더군다나 모데나 공국의 경우 오스트리아인에 의해 통치되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당시 이탈리아에는 독립국으로서의 통일을 목적으로 하는 비밀결사단체들의 운동이 활발했다.[2] 궐석 재판으로 사형을 언도받음. 스위스에 국외 추방에 대한 압력이 가해짐. 등등.[3] 학생 수가 감소해 강좌를 유지할 수 없었다. 지못미 파니치.[4] 1753년 제정된 의회법의 영향이었다.[5] 책과 책 사이의 연관성을 조사하고 저자와 출판사 등의 서지사항을 추적했다. 말이야 쉽지만 완전히 수작업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