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명 | 양상기(梁相基) |
생몰 | 1883년 10월 10일 ~ 1910년 8월 1일 |
출생지 | 전라남도 광산군 서창면 벽진리 |
사망지 | 대구형무소 |
추서 | 건국훈장 애국장 |
1. 개요
한국의 독립운동가.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받았다.2. 생애
양상기는 1883년 10월 10일 전라남도 광산군 서창면 벽진리에서 서암(瑞菴) 양진여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1905년 부친으로부터 나라를 위해 헌신하라는 권고를 받고 서울 시위대에 가담했고, 1907년 8월 정미7조약에 따라 대한제국군이 해산되자 광주경찰서에 근무했다. 그러나 그는 곧 파면되었는데, 일본 조서에 따르면 “양상기는 1908년 4월까지 광주경찰서에서 순사로 봉직한 자이나 평소 결근을 임의로 하여 직무에 불성실한데다가 실부(實父)가 폭도수괴였으므로 4월 23일 순사를 파면하였다.”고 한다. 이후 그는 부친과 함께 전남 일대에서 의병 활동을 전개했다.1909년 2월 9일, 양상기는 9일 30명의 병력으로 담양군 우산면 신기리 거주 안판구로부터 군자금을 제공받았으며, 같은 날 다른 일부는 창평군 지곡리 거주 김 모씨를 비롯한 동민으로부터 군자금을 거출하였다. 또한 1909년 2월 26일 동복군 외남면 동천동에서 다시 군자금을 거출하였으며, 같은 달 담양군 서기 한응길을 체포하고 군자금을 제공케 하였다. 이후에도 광주, 동복, 담양, 장성, 창평 등지에서 부친과 함께 항쟁했지만 1909년 8월 25일 담양군 대전면 행정리에서 부친이 체포되었고, 그해 12월에는 양상기 본인 역시 체포되었다. 재판에 회부된 그는 의병을 일으킨 동기에 대해 다음과 같이 밝혔다.
“일본은 한국을 보호한다는 구실을 내세워 일본인을 한국의 관리 또는 거류민으로 속속 들여보내어 끝내는 한국을 식민지화하려고 하고 있으며 한국의 내정에 간섭하여 한국을 탈취하려 하고 있다. 따라서 일본인은 한 사람도 남김없이 한국에서 추방하려는 것이 나의 목적이었다.”
귀순할 의사가 없느냐는 물음을 받자, 그는 다음과 같이 답했다.
“귀순할 뜻은 추호도 없으며 죽음이 있을 뿐이다. 만일 살아날 수 있다면 다시 의병을 일으켜 침략자와 싸우겠다.”
결국 19010년 8월 1일, 양상기는 대구형무소에서 내란, 폭동 등의 죄목으로 교수형에 처해졌다.
대한민국 정부는 1977년 양상기에게 건국포장을 추서했고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다.